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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알파벳 ㅣ 두근두근 어린이 성장 동화 4
배리 존스버그 지음, 정철우 옮김 / 분홍고래 / 2015년 12월
평점 :
어린이책 읽는 삶 128
학교가 아닌, 삶을 배워야 할 아이
― 내 인생의 알파벳
배리 존스버그 글
정철우 옮김
분홍고래 펴냄, 2015.12.10. 12000원
자그마한 우리 집에서는 네 식구가 한 방에서 함께 잡니다. 옛날에는 이 자그마한 집에서 예닐곱 사람도 살고 열 몇 사람도 살았다고 합니다. 아마 옛날에는 집에서만 지내지 않고 집 바깥에서 일하거나 놀다가 저녁이 되어 잠자리에 들 무렵 바글바글 이 자그마한 집에 모여서 잠을 이루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자그마한 집에서 넷이 모여서 자면 밤이 한결 따스하기는 하되, 두 아이는 언제나 나한테 달라붙습니다. 자다가 발로 차든, 자다가 손을 휘두르든, 이 아이들은 마음껏 뒹굽니다. 차다가 썰렁하거나 춥다 싶으면 누군가 이불을 걷어찼기 때문이고, 자다가 무겁거나 아프다면 누군가(큰아이나 작은아이) 나를 걷어찼거나 몸뚱이를 내 몸에 얹었기 때문입니다.
갓난쟁이였던 때에는 밤새 기저귀를 갈며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면, 한창 무럭무럭 자라는 요즈막에는 밤새 이불깃을 여미어 준다든지 잠자리를 다시 챙긴다든지 하면서 밤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똑바로 누이고 이불깃을 새로 여민 뒤에 아이들 이마를 쓸어넘기면서 볼을 토닥이면 모든 시름이 사라져요. 이 어여쁜 아이들하고 누리는 하루가 더없이 고마우면서 기쁘구나 하고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아빠의 근육은 주로 경직돼 있고 눈은 슬퍼 보인다. 동물 학대 방지 광고에 나오는 학대받는 강아지들 같다. 학대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인 듯 인생의 참혹함에 단념한 눈빛 말이다. 하지만 비행기……. 비행기를 날릴 때만큼은 근육은 긴장을 풀고 눈은 부드러워진다. 정말 평화로워 보인다. (24쪽)
“펌프킨 너는 너만의 노래를 부르고 너만의 춤을 춘다는 거야. 너는 우리와 다르게 세상을 바라봐. 그거 알아? 삼촌은 가끔 우리 모두가 너처럼 세상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44쪽)
배리 존스버그 님이 빚은 어린이문학 《내 인생의 알파벳》(분홍고래,2015)을 읽습니다. 이 책은 어린이문학에 넣을 수 있을 테지만 청소년문학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어린이도 청소년도 함께 즐길 만한 문학이고, 어린이와 청소년을 둔 어버이도 기꺼이 누릴 만한 문학입니다.
《내 인생의 알파벳》은 알파벳으로 a부터 z까지 이야기를 잇습니다. 학교에서 내 준 글쓰기 숙제를 하려는 아이는 ‘알파벳 하나’마다 한 가지씩 이야기를 쓰라고 하는 말을 듣고는 ‘어떻게 알파벳 하나에 이야기 한 가지를 쓰는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해 합니다.
이 아이는 왜 고개를 갸우뚱해 할까요? 다른 아이들은 글쓰기 숙제가 지겹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이 아이로서는 ‘고작 한 가지 이야기’만 쓸 수 없다고 여깁니다. 알파벳 하나로 여는 이야기로도 얼마든지 책 한 권이 될 만하다고 여겨요.
우리 아기는 분명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고 내 눈 속에서 뭔가를 봤다. 아기 눈은 연한 파란색이었지만 그 속에 다른 색들도 있었다. 나는 깊이를 모르는 눈을 들여다보았고, 아기의 시선 뒤에는 끝없는 하늘이 펼쳐져 있음을 느꼈다. 나는 그 하늘 속을 들여다보면서 스카이(하늘)가 아기 이름이라는 걸 알았다. (61쪽)
《내 인생의 알파벳》에 나오는 아이한테는 두 가지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캔디스’이고, 다른 하나는 ‘펌프킨’입니다. ‘펌프킨’은 어머니와 아버지와 큰아버지 셋만 쓰는 이름인데, 아이를 사랑스레 부를 적에만 쓰는 이름이라 할 만합니다. ‘캔디스’는 어버이 스스로 차분해질 적에 쓰는 이름이라 할 만해요.
아이는 제 어버이가 저를 어떤 이름으로 부르는가를 잘 압니다.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한 이름으로 저를 부르더라도, 이름 때문이 아니라 어버이 마음에 따라서 느낌이 사뭇 다르다는 대목도 잘 압니다. 두 어버이와 큰아버지는 아이 앞에서 이녁 마음을 숨기거나 감추려 하기도 하지만, 아이가 그런 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이는 이 책에서만이 아니리라 느껴요. 우리 삶자리에서도 아이들은 어버이 마음을 잘 느끼고 살피며 헤아리리라 봅니다. 다만, 아이들이 모르는 척할 뿐이겠지요.
입으로 읊는 말이 ‘모두’이지 않습니다. 종이에 적은 글이 ‘모두’이지 않습니다. 갓난쟁이는 ‘말’이 아니라 ‘결’로 알아챕니다. 아무리 겉으로 듣기에 부드러운 말씨라 하더라도 사랑이 깃든 말인지 아닌지 결로 다 알아채요. 어린이와 푸름이도 말투나 말씨가 아니라 ‘말결’로 속내를 환하게 알아챕니다.
이를테면 이런 얘기도 할 수 있습니다. 나라에서 교육정책을 해마다 새로 내놓는다고 하는데, 나라에서 내놓는 교육정책은 막상 이 나라 어린이나 푸름이를 헤아리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제껏 나온 교육정책 가운데 입시지옥을 떨칠 만한 정책은 아직 나온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에서 나온 교육정책은 모두 입시정책을 어떻게 손질하느냐 하는 대목만 살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대목을 누구보다 아이들이 잘 압니다.
“고맙습니다. 그건 냉장고에 넣을게요. 아니면 쓰레기통에 버리던가요. 전자레인지 말고 음식 말이에요. 그리고 제가 만든 음식을 드세요.” “왜지?” 이렇게 얘기하다가는 밤 11시까지 여기 있을 것이고 잠발라야는 냄비 바닥에 까맣게 눌러 붙을 것이다. 나는 아빠에게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했다. “제가 엄마를 위해 특별 음식을 만들었어요.” (113쪽)
아이들은 누구나 삶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시험공부를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제 어버이한테서 삶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구태여 학교에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나가거나 학교를 얌전히 다니는 까닭은, ‘아이가 학교에 다닐 적에 어버이가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학교에 나가 주어야 어버이가 회사에 가서 돈을 벌 수 있다’는 대목을 아이들이 누구보다 잘 알아요.
아이들은 왜 제 어버이 품이 아니라 할머니 할아버지 품에서 자라야 해도 기꺼이 받아들일까요? 아이들은 왜 제 어버이 품이 아니라 보육시설 품에서 커야 해도 스스럼없이 받아들일까요? 아이들은 저마다 제 어버이가 어떤 삶인지 다 알기에 모두 받아들여 줍니다. 제 어버이가 얼마나 바쁜가를 잘 알기에, 아이들은 느긋하게 제 어버이를 품어 주어요.
우리가 어버이로서 아이 마음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바깥일을 줄일 노릇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어버이로서 아이 마음을 살짝이나마 헤아린다면, 바깥일을 줄이기 어렵더라도 집에서 아이하고 살갑고 사랑스레 어우러지는 한때를 날마다 기쁘게 누리리라 봅니다.
오래전 우리 가족이 화목했던 때가 어렴풋이 생각났다. 우리는 ‘버스 바퀴가 빙글빙글 돌아요’라는 동요를 목청껏 부르곤 했다 … 그 시절의 아빠는 다른 운전자들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았다. (147쪽)
나는 부두에서 바닷물로 몸을 던졌다. 정말 축축했지만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매우 차갑기는 했다. 숨을 들이마시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현명한 일인 것 같았다. 나는 돌처럼 가라앉았고, 기다렸다. 구조든 죽음이든 먼저 오는 것을 기다렸다. (154쪽)
《내 인생의 알파벳》에 나오는 아이 펌프킨 또는 캔디스는 제 생일잔치를 하는 날에 바다에 몸을 던집니다. 이 아이 어버이는 큰아버지하고 사이가 대단히 나쁘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나쁜 사이는 아니었으나 ‘자존심하고 돈’ 때문에 사이가 갈려서 말도 안 섞고 얼굴조차 마주하지 않는다고 해요.
아이는 제 어버이하고 큰아버지 사이를 마음껏 오갑니다. 이러면서 두 어른한테 찬찬히 묻습니다. 왜 두 사람(또는 세 사람)이 말도 안 섞고 다투기만 하느냐 하고. 한쪽(아이 어버이)은 아뭇소리를 안 하고 고개를 돌립니다. 다른 한쪽은 한숨만 폭 쉽니다. 아이는 두 집안 어른(모두 세 사람)이 모두 못마땅합니다. 더군다나 갓난쟁이일 적에 갑자기 저승으로 가고 만 어린 동생 때문에 어머니하고 아버지는 한집에서도 거의 따로 살듯이 지냅니다.
어른들은 이러한 대목을 얼마나 살필까요? 어른들은 작은아이(어린 동생)가 너무 일찍 죽은 일 때문에 슬픔에 잠긴 채 여러 해를 바보처럼 사는데, 이동안 큰아이(오늘 살아서 코앞에 있는 아이, 이 책에서는 펌프킨/캔디스)도 얼마나 괴롭고 아픈가를 어느 만큼 헤아릴까요?
집에서 사랑도 눈길도 못 받는 아이는 ‘살았어도 죽은 삶과 같다’고 여깁니다. 이 엉킨 실타래를 풀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다가, ‘고향 별나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서 날마다 높은 나뭇가지에서 땅바닥으로 뛰어내리는 동무를 보고는, 이 동무한테서 ‘배워서’ 바닷물에 풍덩 뛰어들어 보기로 합니다. 제 생일잔치를 일부러 큰아버지 요트에서 치르기로 하면서 제 어머니하고 아버지를 억지로 큰아버지 요트로 이끌고 오다가 바닷물로 뛰어들면 ‘내(아이)가 죽든, 두 어른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바닷물로 뛰어들어서 나를 살리면서 서로 앙금을 풀든’ 하리라 여겨요.
“아빠, 왜 계속 비행기만 쳐다봐야 해요?” 아빠가 한숨을 쉬었다. “너무 뻔한 거 아니냐, 캔디스. 비행기를 보지 않으면 조종을 못하게 되고 그러면 비행기는 박살날 거야.” “가족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내가 그 말을 하자 아빠가 나를 보았다. 비행기가 괴상하게 우는 소리를 냈다. (185쪽)
《내 인생의 알파벳》을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이 책 이야기를 이끄는 아이를 낳은 두 어버이가 아이를 학교에 보내기만 하지 않고, 집에서 가르치면서 늘 함께 지낸다고 할 적에도 이처럼 ‘아이 삶에 눈길을 못 두는’ 바보스러운 몸짓이었을까요? 아이 아버지는 혼자서 무선비행기를 하늘에 날리면서 ‘짜증풀이’를 한다지만, 아이는 무엇으로 짜증풀이를 할 만할까요?
두 어버이가 한쪽은 무선비행기만 쳐다보고 다른 한쪽은 방구석만 쳐다본다면, 아이는 도무지 어디를 쳐다보아야 할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두 어버이가 서로 ‘아픔에 짓눌린 삶’에 허덕인다면,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게 뭔지 아니, 캔디스?” “사랑이요?” 내가 제안했다. “그리고 새로운 원격 조종 비행기요?” “휴가. 휴가를 가지면 우리 가족이 훨씬 좋아질 거야.” (193쪽)
아이는 모두 압니다. 아이는 모두 알면서 기다립니다. 아이 어버이는 아직 모릅니다. 아이 어버이도 틀림없이 알리라 여기지만, 아이 어버이는 아직 스스로 깨닫거나 똑바로 바라보려고 하지 못합니다.
이 책에서도 나오듯이 아이는 참으로 슬기롭지요. 한집안이 새롭게 일어서려 할 적에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바로 아이가 말하듯이 ‘사랑’이 있으면 됩니다. ‘휴가’가 아니라 사랑이 있으면 됩니다.
어버이라면, 그러니까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라면 아이를 그냥 학교에만 맡길 일이 아닙니다. 아이가 학교를 다니면 아이하고 ‘학교에서 겪거나 느끼거나 한 이야기’를 집에서 도란도란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다른 어른(교사)이 아이를 가르치는 일을 도맡도록 하지만 말고, 집에서도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삶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는 학교에서 교과서만 배워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집에서 삶을 배워야 하고, 집에서 어버이 몸짓과 말결마다 흐르는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야기책에서뿐 아니라 우리 삶자리에서도 아이랑 어버이 사이에 따스한 사랑이 흐를 수 있기를 빕니다. 아이 마음을 어버이가 읽고, 아이 생각을 어버이가 살찌울 수 있는 슬기로운 길을 모든 보금자리에서 저마다 따사롭고 고운 몸짓과 말결로 열 수 있기를 빕니다. 4349.1.14.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어린이문학 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