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93 빛, 빛깔, 빛결, 빛살



  지구별에서 빛은 해님과 함께 나타납니다. 해가 뜨면서 빛이 나타나는데, 빛은 볕과 함께 나타납니다. 이리하여 ‘햇빛·햇볕’을 말합니다. 햇빛이 퍼질 적에는 아주 빠르게 퍼집니다. 햇빛이 퍼지는 줄기, 이를테면 빛줄기(햇빛줄기)는 따로 ‘햇살’이라 합니다.


  우리는 ‘빛의 삼원색’이나 ‘색의 삼원색’을 말하면서 ‘빛’과 ‘색(色)’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빛’과 ‘색’을 제대로 갈라서 쓰는 사람이 드물고, 왜 ‘삼원색’을 ‘빛’과 ‘색’으로 나누는가를 알려 하는 사람이 드물며, 이렇게 가르는 잣대가 맞는지 살피는 사람이 드뭅니다.


  한국말사전에서 ‘색(色)’을 찾아보면 “빛을 흡수하고 반사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사물의 밝고 어두움이나 빨강, 파랑, 노랑 따위의 물리적 현상”으로 풀이합니다. ‘색(色)깔’을 찾아보면, “= 빛깔”로 풀이합니다. ‘빛깔’을 찾아보면 “물체가 빛을 받을 때 빛의 파장에 따라 그 거죽에 나타나는 특유한 빛”으로 풀이합니다. ‘빛’을 찾아보면 “1. 시각 신경을 자극하여 물체를 볼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전자기파 2. 물체가 광선을 흡수 또는 반사하여 나타내는 빛깔”로 풀이합니다.


  한국말사전에 나오는 말풀이만 살피더라도 ‘色’이나 ‘色깔’이라는 낱말은 뜬금없거나 뚱딴지 같은 줄 알 만합니다. 이런 한자말이나 엉터리 낱말은 쓸 까닭이 없습니다. ‘빛’에서 ‘빛깔’이 나옵니다. ‘빛’은 온누리 모든 것을 알아보도록 이끄는 ‘전자기파’이고, ‘빛깔’은 빛을 받으면서 드러나는 알록달록한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처음부터 이 대목을 제대로 가르고 살펴서 말해야 했습니다. 어설프게 ‘色깔’ 같은 낱말을 억지로 짓지 말아야 했고, ‘色’이라는 외국말(한자말)을 한국말로 똑똑히 옮겨서 써야 했습니다.


  ‘빛살’은 “빛 + 살”이면서, 빛이 흐르는 줄기(빛줄기)를 나타냅니다. 화살이나 물살처럼, 빛살입니다. ‘빛깔’은 “빛 + 깔”이면서, 빛이 이루는 모습(꼴)을 나타냅니다. 맛깔이나 때깔처럼, 빛깔입니다.


  ‘빛’과 ‘빛깔’이라는 두 가지 낱말만 써야 합니다. 괜히 ‘色’과 ‘色깔’이라는 낱말을 섞으니 뒤죽박죽이 되고 말아요. 그러면 ‘색종이’나 ‘색연필’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빛종이·빛깔종이’나 ‘빛연필·빛깔연필’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사람들 입과 손과 귀에 많이 굳었다 하더라도, 어른들 입과 손과 귀에 굳었을 뿐입니다. 아이들 입과 손과 귀에 굳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생각이 굳어서 딱딱하고 메마른 어른’ 틀에 맞추어 말을 뒤트는 짓을 그쳐야 합니다. 우리는 ‘생각이 열린 아이’ 삶에 맞추어 말을 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말을 바르고 아름답게 쓰자는 뜻보다 ‘삶을 제대로 세우고 슬기롭게 갈고닦아 넋을 제대로 다스리자’는 뜻으로 낱말을 하나하나 제대로 살펴서 제대로 쓰는 길을 열어야 합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쓸 말은 ‘빛의 삼원색’이나 ‘색의 삼원색’이 아닙니다. ‘빛’과 ‘빛깔’로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써야 맞지만, 자칫 헷갈릴 수 있으니, ‘빛’을 ‘빛살’로 바꾸어서 쓸 수 있어요.


  그러니까, ‘빛의 삼원색’이 아닙니다. ‘세 바탕빛살’이며 ‘세 빛살’이고 ‘빛살바탕’입니다. ‘세 빛살’은 ‘빨강·푸름·파랑’입니다. 빨강은 “온 목숨”을 나타냅니다. 온 목숨은 “따뜻하게 흐르는 물”인 피를 품습니다. 이러한 물(피, 불물)을 몸에 담은 목숨은 ‘사람’과 ‘열매(알)’입니다. 모든 열매가 빨간 빛은 아니지만, 빨강이라는 빛으로 목숨을 이야기합니다. 푸름은 “풀과 나무와 숲”을 나타냅니다. 나뭇줄기는 흙빛을 닮으나, 나무에 매다는 잎이 풀과 같은 빛이고, 풀과 나무가 어우러진 숲도 푸른 빛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파랑은 “바람·하늘과 물·바다”를 나타냅니다. 하늘빛은 파랑이고, 이 파랑이 바다빛이 됩니다. 물은 하늘을 닮아서 파란 빛이 되기에, 바다와 물은 파랑이라는 얼거리에서 하나입니다. 


  ‘적·녹·청’처럼 외마디를 따서 일컫기도 하는데, 외마디를 제대로 따려면 ‘빨·푸·파’라 해야지요.


  곧, ‘색의 삼원색’이 아닙니다. ‘세 바탕빛깔’이며 ‘세 빛깔’이고 ‘빛깔바탕’입니다. ‘세 빛깔’은 ‘빨강·파랑·노랑’입니다. 빨강은 목숨을 따뜻하게 안는 빛깔입니다. ‘핏빛’이나 ‘열매빛(알빛)’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파랑은 바람과 하늘을 상큼하게 품는 빛깔입니다. ‘바람빛’이나 ‘하늘빛’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랑은 온누리를 보드랍게 돌보는 빛깔입니다. ‘햇빛’이나 ‘불빛’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빛깔을 보면 짙거나 옅습니다. 짙거나 옅은 느낌은 ‘결’입니다. 그러니까, 짙은 빛깔이나 옅은 빛깔을 가를 적에는 ‘빛결’이라는 낱말을 쓰면 됩니다. 사회에서는 ‘농도(濃度)’나 ‘농담(濃淡)’ 같은 한자말을 쓰지만, 이런 한자말이 아닌, 한국말 ‘빛껼’을 써야 알맞습니다.


  이제 빛살과 빛깔을 살피면서 빛결을 말할 수 있다면, 한 걸음 내딛은 셈입니다. 한 걸음 다음은 두 걸음이면서 새 걸음입니다. 새롭게 내딛는 걸음입니다. 다음 걸음은 무엇인가 하면, ‘빨강’과 ‘푸름’과 ‘파랑’에서 무엇이 나오느냐입니다. 빨강은 핏빛이면서 알빛(열매빛)인데, 동백꽃빛이나 장미꽃빛이나 딸기알빛이나 앵두알빛이나 능금알빛으로 갈릴 수 있습니다. 빨강이라는 빛깔로 드러나는 꽃이나 열매를 떠올릴 수 있어요. 푸름은 풀빛이면서 잎빛입니다. 쑥잎빛이나 감잎빛이나 민들레잎빛이나 모과잎빛이나 풀개구리빛이나 개구리밥빛처럼 온갖 풀이나 작은 짐승이나 벌레를 그리면서 이 빛깔을 가리킬 수 있어요. 파랑은 하늘빛이면서 바다빛인데, 달개비꽃빛이나 봄까지꽃빛이나 쪽빛이라 할 만합니다. 노랑은 해님이 드리우는 포근한 기운이 서린 빛깔이니, 벼빛이나 보리빛이라 할 수 있고, 짚빛(마른 풀잎 빛깔)이라 할 수 있으며, 개나리꽃빛이나 원추리꽃빛이나 병아리빛이나 민들레꽃빛이나 씀바귀꽃빛 같은 모습을 하나하나 헤아릴 수 있습니다. 노란 꽃이나 열매를 가만히 되새깁니다.


  빛깔은 내가 스스로 짓는 삶에서 찾습니다. 한국사람이 흔히 잘못 쓰는 빛깔 가운데 ‘갈색(褐色)’이 있습니다. 이 빛깔말을 으레 쓰기는 하지만 정작 어떤 빛깔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뭅니다. 한국말로는 ‘흙빛’이거나 ‘도토리빛’이거나 ‘밤알빛(밤빛)’입니다. 나뭇줄기 빛깔이 ‘흙빛’이기도 합니다. 자작나무나 벚나무라면 흙빛이 아니지만, 여느 나무는 흙빛하고 거의 같습니다. 아니, 나무는 흙빛을 닮는다고 할까요. 흙이 까무잡잡하면 나뭇줄기도 까무잡잡하다고 할까요.


  푸름을 가리키는 풀빛은 잎빛이기도 하기에 솔잎빛이나 잣잎빛이나 후박잎빛처럼 쓸 수 있습니다. 감잎빛도 봄감잎빛과 여름감잎빛과 가을감잎빛이 다릅니다. 하얀 빛깔을 가리킬 구름빛도, 어느 때에는 잿빛인 구름이니, 매지구름빛은 새로운 잿빛이라 할 만합니다. 까만 빛깔은 까만 씨앗으로 나타낼 만하니 능금씨빛이나 배씨빛을 쓸 수 있고, 깨알빛이나 나팔꽃씨빛을 쓸 수 있습니다. 그림자빛이나 그늘빛을 쓸 수도 있습니다. ‘밤빛’은 밤알과 밤하늘을 가리키는 두 가지 빛깔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늘빛은 ‘낮하늘빛’과 ‘밤하늘빛’이 있을 테지요. 더 가른다면 ‘아침하늘빛’과 ‘새벽하늘빛’도 있어요.


  제 삶을 찾을 때에 제 빛을 찾습니다. 제 삶을 찾아서 바라볼 때에 제 빛을 찾아서 바라봅니다. 제 삶을 찾지 않는다면 제 빛을 보거나 알 수 없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 봅니다. 아직 내 몸이 어둠만 보다가, 밤이 지나서 아침이 찾아올 적에 내 둘레에 어떠한 빛이 퍼져서 어떤 모습을 만날 수 있는지 그려 봅니다. 4348.3.14.흙.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숲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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