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의 힘 눈빛사진가선 17
엄상빈 지음 / 눈빛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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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104



‘수수하며 착한’ 이웃이 사는 강원도를 바라보다

― 강원도의 힘

 엄상빈 사진

 눈빛 펴냄, 2015.10.12. 12000원



  포근한 겨울 날씨는 더없이 반가운 선물이라고 느낍니다. 추운 날씨가 이어지다가 며칠쯤 포근한 날씨가 찾아들면 이불이며 빨래이며 마당에 내다 넙니다. 어른인 나는 이불이랑 빨래를 널며 하하하 웃습니다. 아이들은 마당에서 신나게 뛰놀다가 ‘아, 겨울인데 덥네?’ 하면서 웃어요.


  매서운 겨울 날씨는 가없이 고마운 선물이로구나 하고 느끼고요.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면 어느새 파리가 깨어나기도 하는데, 다시 차가운 바람이 불면 파리는 감쪽같이 사라질 뿐 아니라, 풀잎이 더 싯누렇게 시들고 가랑잎도 더 바짝바짝 마릅니다. 한겨울에 웬 파리가 나다니나 싶어 파리채를 휘두르다가 요 녀석들도 겨울에는 좀 잠을 자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뒤꼍이나 마당에서 잘 돋던 풀은 숨이 죽으니, 시든 풀을 밟으며 서걱서걱 사각사각 소리를 노래처럼 듣습니다.


  전남 고흥에서 지내는 우리 식구는 한겨울에도 무척 포근한 날씨를 누리기 때문에, 다른 고장에서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씨여도 이곳에서는 싸락눈조차 구경하기 어렵습니다. 눈을 구경하기는 어렵지만 한겨울에 동백꽃이나 장미꽃을 구경합니다. 참말 고흥에서는 한겨울에도 볕이 따사로운 날이 이레 남짓 이어지면 장미나무를 울타리에 심어서 키우는 이웃집에서는 장미꽃이 소담스레 벌어지기도 합니다. 아마 경상남도 통영이나 남해 같은 곳에서도 한겨울에 짙붉거나 새빨간 꽃송이를 소담스레 만날 만하리라 느껴요. 태평양을 거쳐서 부는 포근한 바람을 맞이하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서 빛살조각처럼 퍼지는 즐거운 기운을 맞아들입니다.



강원도 내 한 일간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강원도민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순박하다’를 가장 많이 꼽았다. 도민들이 ‘타 지역 사람들이 도민들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대한 질문에서도 역시 ‘순박하다’는 말을 가장 많이 꼽았다.




  엄상빈 님이 빚은 사진책 《강원도의 힘》(눈빛,2015)을 읽습니다. 이 사진책은 강원도 사람들 이야기를 차분하면서도 포근하게 들려줍니다. 그저 사진일 뿐이라고 여긴다면 그저 사진이지만, 그저 강원도 이야기라고 여길 수 있으면 그저 강원도 이야기입니다. 우리 이웃이라고 바라보면 우리 이웃이요, 우리 할매요 할배라고 여기면 우리 할매요 할배입니다.


  강원도 사람들은 ‘순박’할까요? 그러면 ‘순박(淳朴)’이란 무엇일까요? 한국말사전에서 이 한자말을 찾아보면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순수하며 인정이 두텁다”를 뜻한다고 합니다. 한자말 ‘순수(純粹)’는 “전혀 다른 것의 섞임이 없음”을 뜻해요. 그러니, ‘순박한 강원도 사람들’이라 할 적에는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티없고 살갑다”는 뜻이 되리라 느낍니다. 다른 한국말로 하자면 “수수하면서 착하다”요 “수수하면서 사랑스럽다”라고도 할 만합니다.


  문득 궁금합니다. 서울 사람들은 ‘수수하다’거나 ‘착하다’거나 ‘사랑스럽다’거나 ‘살갑다’고 할 만할까요? 부산이나 대구나 광주 사람들은 어떠할까요? 서울 같은 커다란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을 놓고 강원도 사람들을 바라보듯이 ‘수수하네요’라든지 ‘착하네요’라든지 ‘사랑스럽네요’라든지 ‘살갑네요’ 하고 들려주는 말은 몇 사람이나 할 만할까요?


  어느 모로 본다면, 모든 강원도 사람들이 다 ‘순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고장 사람들이 강원도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순박’하다고 말하는 사이에 강원도 사람들은 차츰 ‘순박’한 마음결이나 마음씨로 거듭납니다. 서울이나 부산 같은 큰도시 사람들을 가리켜 ‘차갑다’거나 ‘새침스럽다’거나 ‘날카롭다’거나 ‘바쁘다’거나 ‘안 착하다’ 같은 느낌을 말하는 동안 참으로 서울이나 부산 같은 큰도시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으로 달라지지 싶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새로운 말을 빚기도 하지만, 우리가 쓰는 말에 따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달라지기도 한달까요. 사진은 바로 이러한 흐름을 찬찬히 살피면서 찍습니다. 사진은 바로 이러한 삶자리를 가만히 돌아보면서 찍습니다. 사진은 바로 이러한 이음고리를 넌지시 밝히면서 찍습니다.



여기에 담겨 있는 30여 년 세월의 사진 속 주인공들이 바로 강원도민들의 순박한 자화상이다. 강원도 여기저기를 다니며 우연히 만난 우리의 이웃 아저씨들이고 아주머니들이다.





  전라남도에서 사는 우리 식구는 우리 이웃을 따사롭게 바라봅니다. 이웃도 우리를 따사롭게 바라봅니다. 그래서 내가 전라남도 고흥이라는 고장에서 사진을 찍는다면 ‘고흥 사람들’이나 ‘전라남도 사람들’을 엄상빈 님이 《강원도의 힘》이라는 사진책에서 강원도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듯이 ‘순박’하게 마주하면서 담을 수 있습니다.


  서울이나 부산에서 사는 이웃님도 서울이나 부산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순박’하게 마주하면서 순박하게 사진으로 찍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은 ‘찍히는 사람’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하는 사진이지만, ‘찍는 사람’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거듭나기도 하는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강원도 사람들이 워낙 순박하기에 엄상빈 님은 강원도 이웃님을 순박한 숨결이 흐르도록 사진으로 찍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엄상빈 님 스스로 순박한 마음결이나 마음씨가 되어 강원도 사람들을 이웃이요 동무요 한식구로 마주한다면, 강원도 사람들을 찍는 사진은 언제나 순박한 기운이 흐르는 따사롭고 착하며 수수하고 살가운 사진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강원도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기에 ‘순박한 빛’이 흐르지 않습니다. 서울이나 부산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어도 얼마든지 ‘순박한 빛’이나 ‘따사로운 숨결’이나 ‘수수한 바람’이나 ‘짙푸른 노래’로 담을 수 있어요. 모델이 훌륭해서 사진이 훌륭할 수 있으나, 모델만 훌륭해서는 사진이 훌륭하지 않습니다. 모델이 좋고 나쁜가에 따라서 좋고 나쁜 사진이 나오지 않으니까요.





집중호우로 다 망가졌던 그 양배추밭에도 이듬해가 되면 어김없이 다시 파종을 하고 농사일을 이어가는 사진 속 주인공 농부처럼 은근과 끈기, 그리고 순박함이 바로 ‘강원도의 힘’이다.



  누구를 찍든 ‘누가’ 찍는가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누구, 이를테면 멋지거나 훌륭한 모델을 찍더라도 ‘누가’ 찍는가에 따라 비틀리거나(편견이 되거나) 뒤틀릴(왜곡될) 수 있습니다. 순박한 사람들을 찍더라도 ‘누가’ 찍는가에 따라 안 순박하게 찍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순박한 이웃을 사진으로 찍으려면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도 똑같이 순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수한 이웃을 사진으로 담으려면 사진기를 손에 잡은 사람도 똑같이 수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스러운 이웃을 사진으로 옮기려면 사진기를 손에 든 사람도 똑같이 사랑스러울 수 있어야 합니다.


  사진은 언제나 삶자리에서 찍습니다. 먼 자리도 가까운 자리도 아닌 삶자리에서 찍는 사진입니다. 그리고 사진은 사랑자리에서 찍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넋으로 사진을 찍지요. 마지막으로 사진은 꿈자리에서 찍습니다.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하면서 삶을 사랑스럽게 짓겠노라 하는 꿈을 가슴에 품으면서 찍습니다. 삶자리와 사랑자리와 꿈자리를 생각하기에 《강원도의 힘》이라는 사진책이 태어날 수 있습니다. 자그마한 사진책 한 권을 책상맡에 두고 오래오래 되읽으면서 우리 이웃이 살아가는 삶자리랑 사랑자리랑 꿈자리를 헤아리다가, 오늘 우리 식구가 지내는 삶자리랑 사랑자리랑 꿈자리에는 어떤 기운과 바람과 숨결이 흐르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4348.12.24.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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