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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와 통하는 사회 이야기 - ‘사회’를 아는 만큼 내가 보인다 ㅣ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23
손석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5년 12월
평점 :
푸른책과 함께 살기 127
아이들은 왜 ‘사회를 알아야’ 하는가?
― 10대와 통하는 사회 이야기
손석춘 글
철수와영희 펴냄, 2015.12.25. 12000원
곁님하고 나는 아이를 학교에 보낼 마음이 없습니다. 아기를 낳기 앞서부터 이러한 마음이었고, 아기를 낳은 뒤에도 이러한 마음입니다. 큰아이뿐 아니라 작은아이도 학교에 안 보내려 해요.
곁님하고 내가 아이를 학교에 안 보낸다고 하는 얘기를 듣는 이웃은 ‘나중에 사회생활을 어떻게 시키’려고 하느냐고 걱정을 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걱정스러울는지 모르지만, 찬찬히 생각해 보면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아이들은 굳이 ‘사회생활을 해야’ 하지 않으니까요.
아이들은 사회라는 곳에서 회사를 다녀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사회라는 곳에서 연금생활자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사회라는 곳에서 자격증이나 졸업장을 거머쥐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꿈을 키울 노릇입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삶을 지을 노릇입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사랑을 가꿀 노릇입니다.
우리 중·고등학생들처럼 입시 지옥에 갇혀 학교를 마치자마자 저마다 학원으로 가거나, 밤이 깊도록 학교에 남아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모습은 지구촌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운 살풍경입니다. (14쪽)
한국 사회에서 ‘규제 완화’를 쓸 때, 그 대부분은 사회구성원의 권인이나 인권을 위해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많은 돈(이윤)을 벌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본의 탐욕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완화할 때 어떻게 될까요? 세월호 참사와 같은 비극이 일어납니다. (18쪽)
손석춘 님이 이 나라 푸름이한테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쓴 《10대와 통하는 사회 이야기》(철수와영희,2015)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손석춘 님은 ‘사회’가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이 책에서 밝히면서,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지식’이 아니라 ‘푸름이 스스로 이 땅에서 어른이 될 적에 마주할’ 삶터가 어떠한 결인가를 다루려 합니다. 정치권력이나 국가권력이 사람들 생각을 옭아매거나 얽어매는 틀인 ‘사회’가 아니라, 푸름이가 앞으로 ‘새로운 어른’이 되어서 ‘새롭게 어우러질 삶터’인 사회를 어떻게 가꾸거나 일굴 적에 아름다운 삶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이야기를 다루려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존권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고 고등학교 졸업생과 대학 졸업생 사이에 월급 차이가 없이 일만으로 평가받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장 많은 10대들의 꿈이 바뀔 수 있습니다. (25쪽)
외부 침략이 없고 내적 착취가 상대적으로 적은 ‘태평성대’에도 노비나 천민들은 고통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평민들도 양반의 위세에 내내 눌려 살아야 했지요. (62쪽)
사회생활은 회사생활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다만, 회사를 다닌다고 해서 사회생활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회사생활만 사회생활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떤 일자리를 얻어서 돈을 버는 살림일 때에 사회생활이 아니라, 스스로 가슴에 품은 꿈을 일구는 길을 걸을 때에 비로소 사회생활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회사에 다니면서 돈을 벌어야만 밥을 먹지 않아요. 손수 흙을 일구어 먹을거리를 얻어도 밥을 먹습니다. 돈을 벌어서 옷을 사야만 하지 않습니다. 모시풀을 심고 거두어서 실을 얻은 뒤, 모시풀에서 얻은 실로 손수 옷을 지어서 입을 수 있습니다. 돈을 들여 집을 장만해야 집짓기나 집살이가 아닙니다. 손수 숲을 가꾼 뒤에 숲에서 나무를 베어 집을 지어도 집짓기요 집살이입니다.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추어올리고 동상을 세우는 데 앞장선 사람들에게 한국 사회는 ‘세계적으로 기적을 이룬 사회’입니다 … 그렇다면 정부 수립 과정이 곧 분단 수립 과정이었다는 엄연한 사실, 그 과정과 결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사실, 일방적인 산업화로 노동자들이 희생당한 사실,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정작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인 민중의 생활은 더 팍팍해지고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돤 사실 … (33, 35∼36쪽)
나는 아직 밥이나 옷이나 집을 손수 짓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직 우리 아이들한테 밥짓기와 옷짓기와 집짓기를 제대로 가르치거나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앞으로 아이들하고 함께 밥이며 옷이며 집을 손수 짓는 길을 걸어가면서 서로서로 돕고 북돋우는 살림을 가꾸려는 꿈을 키웁니다.
돈으로 짓는 삶이 아니라 사랑으로 짓는 삶을 생각합니다. 자격증이나 졸업장으로 어떤 일을 하지 않고, 꿈과 사랑으로 일을 하는 나날을 생각합니다. 사회에서는 사람들한테 자격증이나 졸업장을 바랍니다만, 어떤 일을 할 적에 자격증이나 졸업장이 있어야 하지 않아요. 무엇보다도 ‘아이를 낳아 사랑을 돌보는 삶’에는 자격증도 졸업장도 없습니다. 자격증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이를 낳지 않아요. 사랑으로 어깨동무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이를 낳지요.
씨앗을 심어서 돌보는 손길은 자격증이나 졸업장으로 키우지 않아요. 오직 사랑스러운 손길이 될 때에 씨앗을 심어서 돌봅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일, 바로 그것이 개인의 등장이었습니다. (88쪽)
신자유주의의 자유는 ‘자본이 누리는 절대적 자유’를 뜻하므로 그것을 한마디로 줄이면 ‘자본 독재’가 됩니다. (105쪽)
그들(조선 사회 양반·지식인)이 말하는 공론, 언로와 간쟁은 신분제 사회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조선의 양반계급이 백성을 위한다며 내세운 ‘민본 정치’ 또한 신분제도의 틀에 갇혀 있었지요. (114쪽)
청소년 인문책 《10대와 통하는 사회 이야기》를 살피면, 조선 사회나 한국 사회에서 ‘권력을 쥔 이들’이 ‘사회 밑바탕을 이룬 수수한 여느 사람들’을 얼마나 옥죄면서 괴롭혔는가 하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권력을 쥔 이들은 언제나 권력을 지키려고 ‘사회’를 단단하게 짓누르면서 톱니바퀴 얼거리를 짰어요. ‘사회 밑바탕을 이룬 수수한 여느 사람들’을 톱니바퀴로, 그러니까 소모품으로 다루는 얼거리를 짰지요.
비정규직이라든지 정리해고란 무엇인가 하면, 수수한 여느 사람들이 언제나 소모품이 되어 ‘쉽게 갈아치울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벌이는 슬픈 몸짓입니다. 서로서로 이웃이요 동무로 여긴다면, 어느 사회에서든 비정규직이 있을 수 없고 정리해고도 나올 수 없어요. 자격증이나 졸업장 때문에 일삯을 다르게 받아야 할 까닭이 없고, 가난이나 푸대접이 있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더더구나 전쟁무기와 군대 때문에 돈을 엉뚱하게 쓰느라, 막상 삶과 살림(문화와 복지)에는 등을 지는 사회 얼거리가 되어야 할 까닭이 없지요.
‘국민’이라는 번역은 옳지 못합니다. ‘people’은 결코 ‘국민’으로 옮길 수 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의 기초는 특정 국가의 틀에 갇힌 국민이 아니거든요. (133쪽)
먼먼 옛날부터 슬기로운 어른은 아이들한테 삶을 가르쳤습니다. 슬기로운 어른은 학교나 책이나 지식이 아닌 사랑으로 아이들한테 삶을 가르쳤습니다. 풀이나 나무나 짐승이나 벌레한테 붙인 이름은 모두 수수한 여느 사람이 사랑으로 지어서 붙였습니다. 식물도감이나 곤충도감이 있어야 아는 이름이 아니라, 수수한 여느 사람이 스스로 삶을 짓고 가꾸면서 고장마다 다 다르게 곱고 재미난 지어서 붙인 이름입니다. 사랑으로 가꾸는 마을에서 사랑으로 자라는 아이들이 웃고, 꿈으로 빚는 보금자리에서 꿈으로 자라는 아이들이 노래한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나아갈 길은 사회생활이 아닌 마을살이입니다. 사회가 아름답도록 하기에 앞서 마을이 아름다울 노릇입니다. 그리고 마을이 아름다우려면 먼저 여느 집살림부터 아름다울 수 있어야 할 테지요.
소비자본주의 사회가 굴러가는 모습을 자세히 분석하면 경제성장이 행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불행이 경제 성장을 지탱해 준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소비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를 계속 부추겨 물건을 사도록 조장하고, 그렇게 이윤을 남김으로써 자본주의 체제는 강화되어 갑니다. (171쪽)
아이들은 사회를 알아야 하기 앞서 ‘삶’을 알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아이들은 교과서 지식을 외우기 앞서 ‘사랑’을 배워야 한다고 느낍니다.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며 졸업장을 따거나 자격증을 거머쥐기 앞서 ‘꿈’을 가슴에 품을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나는 곁님하고 시골에서 삶하고 사랑하고 꿈을 함께 짓고 누리면서 이러한 숨결을 아이들이 물려받을 수 있는 보금자리를 돌보려 합니다. 교과서를 쓰고 시험점수를 받아야 하며 입시지옥 대학바라기로 나아가는 학교가 아닌 집에서 삶이랑 사랑이랑 꿈을 아이하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나날을 생각합니다.
삶을 알 때에 비로소 사회도 제대로 안다고 느낍니다. 사랑을 배울 때에 비로소 사회도 제대로 배운다고 느낍니다. 꿈을 가꿀 때에 비로소 사회도 제대로 가꾸는 길을 걷는다고 느낍니다. 삶도 사랑도 꿈도 모르거나 배운 적 없이 어릴 적부터 사회생활에 길든다면 그예 삶도 사랑도 꿈도 모르는 어른이 되어 바보스럽거나 어리석은 몸짓을 보이지 싶습니다. 온누리 모든 아이들이 ‘사회를 제대로 배우고 알’도록 먼저 삶·사랑·꿈부터 제대로 배우고 알 수 있기를 빕니다. 4348.12.24.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청소년 인문책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