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뭐고? - 칠곡 할매들, 시를 쓰다 칠곡 인문학도시 총서
칠곡 할매들 지음, (사)인문사회연구소 기획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5년 10월
평점 :
품절


시를 노래하는 시 107



시가 뭐고? 삶노래요 사랑노래요

― 시가 뭐고?

 강금연 외 88명

 삶창 펴냄, 2015.10.26. 9000원



  아이들이 나한테 찾아오기 앞서까지 나는 ‘시’라고 하는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아니, 시라고 하는 글을 쓸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제대로 말하자면, 아이들이 나한테 찾아오기 앞서까지 ‘시’라고 하는 글을 잘 읽지도 않았고, 잘 헤아리지도 못했으며, 잘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


  큰아이가 글을 알아차리고, 이러한 글을 읽어 달라 하고, 나중에 아이 스스로 글을 읽으려 하는 무렵부터 비로소 ‘시’라고 하는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아니, 아이가 글을 읽고 싶다고 할 적에 아이한테 어떤 글을 읽힐까 하고 생각하다가 내가 손수 써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이가 스스로 글을 읽겠다고 할 적에 무엇보다 ‘어버이가 쓴 글’을 읽히면서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태 시쓰기를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시읽기를 배운 적도 없습니다. 초등학교에서는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동시를 읽고 외우는 수업을 받았습니다. 중·고등학교에서는 시험 문제에 나오는 어른시를 읽고 외우는 수업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시쓰기이든 시읽기이든 모두 나하고 동떨어진 어느 머나먼 별나라나 달나라나 꿈나라 이야기로만 여겼어요.



비가 안 와서 / 노은 마르고 / 드래 가서 오지도 안는 영감 때무네 / 마음이 단다 / 하느님이 비를 주쓰면 조겠는데 / 비를 안 주니 / 콩 모종 들개 모종 해야 하는데 / 무러서 땡땡 마음도 가물다 (김기선-마른 땅)


참 따뜻하다 / 감나무밭 김을 멘다 // 꽃다지는 노랑꽃을 뽐내고 / 냉이꽃은 흰꽃을 뽐내고 / 된장꽃은 보라색으로 뽐내고 (김숙이-밭 김매기)



  경상도 칠곡 시골자락에서 사는 할머니 여든아홉 분이 쓴 시를 그러모은 《시가 뭐고?》(삶창,2015)를 읽습니다. 책이름에도 붙듯이, 시골 할매는 “시가 뭐고?” 하고 묻습니다. 시를 쓰라고 하니 시라고 하는 글을 써 보지만, 할매들 스스로 시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알면서 쓰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시골 할매는 ‘할매 나이’에 이르고도 한참이 지난 오늘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글을 익혔습니다. 예순이든 일흔이든 여든이든, 이런 늘그막에 한글을 처음으로 익혔지요.


  이는 무슨 소리인가 하면, 시골 할매는 예순이나 일흔이나 여든이라는 나이에 이르도록 ‘한글로 된 책’은 읽은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한글로 된 신문’조차 읽은 적이 없다는 뜻이에요.


  재미있지요. 시골 할매가 한글을 익힌 적이 없어서 한글을 읽을 줄 몰랐다면,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는 어떻게 했을까요? 사람 이름도 읽지 못하셨을 텐데 그야말로 선거를 해야 할 적에 어떻게 하셨을까요?



감꽃이 피었다가 하얗게 떨어지면 / 지푸라기 홀겨메어 한층 두층 뀌다보면 / 목걸이 만들고 옛날 그 시절 생각난다 / 감은 어머니의 둥지에서 영양분을 흠북 먹으면서 / 잘 큰다 가을 돼면 즐경을 이루고 (박태분-감나무)


택배 주소도 쓸 줄 몰라 / 우체국 여직원 손 빌렸다. / 용기 내어 내 손으로 / 주소를 써 갔더니 / 여직원 둘이서 의아한 표정 (김옥순-고마운 한글 공부)



  시를 배운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글조차 배운 적이 없고, 책을 배운 적도 없는 할매한테는 문학이라고 하는 글도 처음입니다. 이른바 베스트셀러 작가도 시골 할매한테는 아무것이 아니기도 하고,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입니다. 시골 할매한테는 이녁 딸아들이랑 이녁 손자 이름이 대수롭고 사랑스러우며 가슴에 남지만,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군수 같은 사람들 이름은 안 대수롭고 안 사랑스러우며 가슴에 안 남지요.


  그렇지만 이 시골 할매들이 시를 씁니다. 처음으로 한글을 익히고, 처음으로 연필을 쥐면서, 처음으로 할매들 이야기를 이녁 손으로 스스로 씁니다. 이녁 이야기를 입으로 읊어서 지식인이나 연구원이 녹음기로 받아서 따로 옮겨서 나오는 글이 아니라, 늙은 할매가 스스로 연필을 쥐고 스스로 이녁 이야기를 시라고 하는 얼거리로 찬찬히 빚습니다.



어릴 적 / 산골짝에 남자아이들 / 학교 보내주고 여자들은 / 공부하면 남의 집에 간다고 / 보내주지 않았다 (박후불-한글 공부)


논에 들에 / 할 일도 많은데 / 공부시간이라고 / 일도 놓고 / 헛둥지둥 왔는데 / 시를 쓰라 하네 / 시가 뭐고 / 나는 시금치씨 / 배추씨만 아는데 (소화자-시가 뭐고)



  글을 모르고 책을 모르며 학교를 모르는 시골 할매입니다. 그렇지만 시골 할매는 다른 것을 알아요. 집짓기하고 밥짓기하고 옷짓기를 알지요. 시골 할매는 대학교뿐 아니라 학교 문턱조차 밟은 일이 없으나, 씨앗을 언제 심고 풀은 언제 베며 열매는 언제 거두는가를 압니다. 시골 할매는 박사도 석사도 연구원도 아니지만, 씨앗을 겨우내 어떻게 갈무리를 하고, 추운 겨울에 먹을 밥은 어떻게 건사해서 어떻게 다루는가를 압니다. 시골 할매는 보일러 같은 기계를 만들거나 다룰 줄 모르지만, 나무를 할 줄 알고, 아궁이에 불을 지필 줄 압니다. 시골 할매는 오븐이나 전자제품을 마음껏 다룰 줄 모르더라도, 전기 하나 없이 밥을 짓고 옷을 지으며 살림을 건사할 줄 알아요.



새벽 다섯 시 손자 자는 것 보고 / 자전거 타고 논밭에서 / 바쁘게 일을 하고 집에 온다 / 손자는 깨지 않고 있다 / 자는 모습이 예쁘고 고맙다 / 꽃나무에 물을 주고 또 문을 열어보면 / 일어나서 손을 빨고 놀고 있다 (김순덕-손자 규현)



  칠곡 할매 시집인 《시가 뭐고?》를 읽으면서 가만히 생각합니다. 시골 할매더러 ‘씨앗’이라는 낱말을 글감으로 주어서 씨앗마다 언제 심고 어떻게 돌보아 어떻게 거두는가 하는 이야기를 시로 적어 보라고 하면 어떠했을까요? 시골 할매더러 ‘땅’이나 ‘밭’이나 ‘논’이라는 낱말을 글감으로 주어서 땅이나 밭이나 논을 어떻게 가꾸고 일구고 보듬으면서 삶을 짓는가 하는 이야기를 시로 적어 보라고 하면 어떠했을까요? 시골 할매더러 ‘아기’라는 낱말을 글감으로 주어서 아기를 집에서 어떻게 낳고 어떻게 돌보며 어떻게 키우는가 하는 이야기를 시로 적어 보라고 하면 어떠했을까요?



둘째딸이 쇠비름 무침이 먹고 싶답니다 / 온갖 좋은 것 다 먹고 살았을 텐데 / 딸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이종희-쇠비름)


나는 나무 타는 냄새가 좋다 불을 때면서 / 그을린 부뚜막에 눈을 지그시 감아본다 / 어린 시절 엄마가 나무를 아궁이에 넣던 모습 / 불을 꺼집어내어 감자를 굽던 모습이 / 생각난다 (한순길-추억)



  나는 우리 아이들한테 ‘시’라는 말을 안 씁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한테 ‘노래’라는 말을 씁니다.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자, 우리 함께 부를 노래를 써 봤어’ 하고 글종이를 내밉니다. 그러면 큰아이가 이 글종이를 받아서 아이 나름대로 가락을 입혀서 나긋나긋 살가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노래처럼 글로 빚기에 이 글, 그러니까 ‘시’를 ‘삶노래’라고 느낍니다. 우리가 서로 아끼고 보살피며 사랑하는 이야기를 노래처럼 글로 엮기에 이 글, 그러니까 ‘시’를 ‘사랑노래’라고 느낍니다.


  일하며 부르는 노래는 ‘일노래’입니다. 아기를 재우며 부르는 노래는 ‘자장노래’입니다. 아이들이 놀면서 마음껏 부르는 노래는 ‘놀이노래’입니다. 들일을 하며 부르는 노래는 ‘들노래’입니다. 숲을 그리며 부르는 노래는 ‘숲노래’입니다. 그러니까, 따로 ‘시라고 하는 문학’을 모르더라도 우리는 모두 시인이 될 수 있어요. 아니, 시인이 아닌 ‘삶노래님’이 되고 ‘사랑노래님’이 됩니다. ‘들노래님’이 되고 ‘숲노래님’이 됩니다. ‘자장노래님’이나 ‘놀이노래님’이 되어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누구나 다 다르게 아름다운 ‘노래님’입니다. 4348.12.21.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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