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초상화에 숨은 비밀 찾기 책과함께어린이 찾기 시리즈
최석조 지음 / 책과함께어린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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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123



어떤 얼굴을 그림으로 담을 적에 즐거울까?

― 조선시대 초상화에 숨은 비밀 찾기

 최석조 글

 책과함께어린이 펴냄, 2013.4.20. 12000원



  그림을 그립니다. 눈으로 가만히 바라본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면서 그림을 그립니다. 그림을 그립니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을 마음속으로 되새기면서 그림을 그립니다. 연필을 손에 쥐고 종이에 그림을 그립니다. 나뭇가지나 돌을 손에 쥐고 흙바닥에 그림을 그립니다. 맨손가락을 하늘에 대고 그림을 그립니다.


  어디에 그리든 모두 그림입니다. 화가나 예술가가 그릴 적에만 그림이지 않습니다. 어린이가 그린 그림도 즐거우면서 예쁜 그림입니다. 여느 어버이가 그린 그림도 재미있으면서 훌륭한 그림입니다. 역사책에 이름이 남아도 아름다운 그림이고, 역사책에 이름이 안 남아도 아름다운 그림이에요. 삶을 사랑하는 숨결을 담을 수 있으면 모두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왜 이렇게 초상화를 많이 그렸느냐고? 조선은 유교 국가였기 때문이야. 유교에서는 제사가 매우 중요한 행사였잖아. 조상들을 사당에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낼 때 초상화가 필요했거든. (11쪽)


조선 시대 초상화가들은 실제 인물과 똑같이 그리려고 무척 애썼어. 터럭 한 올은 물론 사마귀, 점, 곰보 자국, 검버섯까지 있는 그대로 그렸지. (13쪽)



  최석조 님이 쓴 《조선시대 초상화에 숨은 비밀 찾기》(책과함께어린이,2013)를 읽습니다. 조선이라는 사회는 다른 때보다 ‘얼굴그림(초상화)’이 많았다고 합니다. 고려나 신라나 백제나 고구려 무렵에도 그림을 그렸다고 하지만 조선 무렵처럼 그림을 많이 자주 그리지는 않았다고 해요. 아마 옛 조선 무렵에도 그림을 그렸을 테고, 부여와 발해 무렵에도 그림을 그렸을 테지요. 더 헤아려 보면, 단군에 앞서 육천 해나 칠천 해 앞서에도 그림을 그렸으리라 생각해요. 다만, 팔천 해나 구천 해 앞서 누군가 그렸을 그림이 오늘날까지 남지는 않았을 뿐입니다. 벽에 남긴 그림이나 동굴에 새긴 그림은 더러 남았지만요.



옷차림을 보아하니 벼슬이 높았던 사람이야. 어떻게 아느냐고? 가슴에 두 마리 학을 수놓은 장식이 있잖아. (33쪽)


옛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남에게 함부로 보여주길 꺼렸어. 그래서 이렇게 손이 안 보이게 그렸지. 조선 시대 초상화가 대부분 이래. 조선 후기에서야 손이 드러나는 초상화가 나오게 돼. 손을 소매 속에 감춰 그리다 보니 정작 화가들은 손을 그릴 기회가 별로 없었어. (38쪽)



  조선 무렵을 살던 이들이 그린 그림은 거의 모두 ‘이름·돈·힘’이 있던 사람들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무렵에 그림 한 점을 그려 달라고 맡길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고, 그림 한 점을 그리기까지 돈이 무척 많이 들었다고 해요. 조선 무렵에도 ‘풍속화’라고 해서 여느 사람들이 누리던 여느 살림살이를 그림으로 담기도 했을 테지만, 여느 사람들 스스로 그린 여느 사람들 살림살이 그림은 아예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분하고 계급이 크게 갈리던 사회였기에, ‘위에 있는 이들이 더러 아래에 있는 이들을 그리는 일’은 있으나, ‘아래에 있는 여느 사람들 스스로 붓과 종이를 손에 쥐는 일’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할 만합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초상화에 숨은 비밀 찾기》에 깃든 이야기는 우리 삶에서 어느 한 토막만 보여줄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조선이라고 하는 사회에서 이름이 있거나 돈이 있거나 힘이 있는 사람들 얼굴과 차림새를 보여줍니다. 신분하고 계급에 따라 어떤 모습이요 어떤 옷을 입었으며 어떤 몸짓이나 입성이었는가를 보여주지요.




무관 4품은 문관 6품 벼슬과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고 해. 그러니 무관들이 한눈에 자신을 알아보는 군복을 좋아할 리 있겠어. 심지어 흉배도 호랑이 대신 학으로 바꿔 다는 무관들이 있었지. (41쪽)


초상화를 그리는 데 든 비용은 얼마였을까? 초상화를 그릴 비단은 10냥에 샀고, 화가 이명기에게는 10냥의 수고비를 주었어. 족자를 만드는 재료비와 이득신에게 준 수고비가 13냥, 궤를 만드는 데 4냥 등 모두 37냥의 돈을 썼지. 지금 돈으로 치면 약 400만 원 정도래 … 경제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야. 그러니까 돈 많고 신분이 높은 벼슬아치들만 초상화를 남길 수 있었지. (53쪽)



  오늘날에는 흔히 사진을 찍습니다. 한식구가 한자리에 모여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그날 그때에 맞추어 가볍게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종이로 뽑은 사진을 벽에 붙이기도 하고, 손전화나 셈틀에 사진파일을 모아 놓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는 아주 적은 돈으로도 사진 한 장을 얻을 만합니다. 그림을 그린다고 할 적에도 누구나 손쉽게 어디에서나 그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누구이든 그림으로 그릴 수 있어요. 이름난 사람이나 돈 있는 사람이나 힘이 센 사람들 모습도 사진이나 그림으로 나오지만, 어버이가 아이를 그리고 아이가 어버이를 그리지요. 동무끼리 서로 그리고, 이웃이 스스럼없이 서로 그립니다.


  우리 집에서는 으레 그림잔치가 벌어집니다. 우리 집 두 아이는 저마다 저희 깜냥껏 저희 모습을 스스로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 모습을 나란히 그려 줍니다. 나도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아이들 모습을 내 나름대로 그리고, 내 모습을 나 스스로 함께 그립니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 가운데 더할 나위 없이 곱구나 하고 느끼는 그림을 벽이나 문마다 붙입니다. 아이들이 ‘아버지 그렸어. 선물.’ 하고 내미는 그림을 책상맡에 줄줄이 올려놓습니다. 나 스스로 우리 보금자리를 기쁘게 돌아보면서 그린 그림도 책상맡에 놓습니다. 앞으로 이루려는 꿈도 그림으로 그려서 책꽂이에 책과 함께 살짝 꽂아 놓습니다.




휴버트 보스는 서양화가답게 조선의 물감이나 먹을 쓰지 않고 서양 물감을 썼지. 특이하게도 고종은 서 있어. 우리 어진에는 이런 모습은 볼 수가 없지. 임금의 위엄이 별로 느껴지질 않거든. 휴버튼 보스는 존엄한 임금이 아니라 한 인간의 모습을 강조한 거야. 만국 박람회에서 세계 여러 인종을 보여주는 전시회에 출품하려 했기 때문이지. 비록 임금의 옷차림이지만 한 사람의 평범한 조선인이 되었어. (98∼99쪽)



  《조선시대 초상화에 숨은 비밀 찾기》를 읽으며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조선 무렵에 궁중에서 임금님이나 여러 궁중 행사를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는데, 그무렵부터 임금이든 계급이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든, 저희끼리 저희(권력자) 그림만 그리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궁중 화가를 시켜서 ‘여느 사람(백성)이 사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도록 했다면 어떠했을까 궁금합니다. 임금은 궁궐 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할 뿐 아니라, 계급이나 신분이 높은 사람도 여느 사람이 어떻게 사는가를 잘 모른다고 할 수 있는 만큼, 이들이 여느 사람들 살림살이와 마을살이를 잘 알거나 살피거나 헤아리도록 도울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면 어떠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다른 한쪽으로 헤아린다면, 조선왕조실록처럼 ‘왕조 발자취’만 남길 노릇이 아니라, ‘백성실록’ 같은 기록도 남긴다든지 ‘백성화첩’ 같은 그림도 그렸다면, 조선 사회를 둘러싼 삶자락과 숨결을 훨씬 넓고 깊이 돌아보는 바탕이 되었으리라 느껴요.


  그러나, 조선 사회에서 권력자 자리에 있던 이들은 이러한 데에 마음을 쓰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권력자 자리에 있는 이들은 이러한 데에 눈길을 두지 않습니다. 정치권력자 자리에 있는 이들은 이녁 입맛에 맞게 국정교과서를 바꾸려고 하는 데에 힘을 쏟을 뿐입니다. 여느 사람들 살림살이를 꾸밈없이 바라보면서 갈무리한다든지, 여느 사람들 마음자리를 아름답게 북돋우는 길에는 좀처럼 나서지 못해요.




조선 시대 여인 초상화 중에는 이런 명작이 드물어. 명작은 고사하고 아예 여인 초상화 자체가 없어. 다 모아 봐야 겨우 한 손으로 꼽을 정도거든. 조선 시대에는 여인 초상화를 그릴 수 없었기 때문이야. (106쪽)


특이하게도 사냥꾼 털모자를 쓰고 있어 …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친근해 뵈잖아. 관복 차림보다 훨씬 강인한 느낌도 들어. 털모자는 추운 겨울 바깥에서 활동할 때 쓰니까. 채용신은 의병장으로 온 산천을 누비던 최익현의 모습이 훨씬 인상 깊었나 봐. (140쪽)



  조선 끝무렵에 나온 ‘최익현 그림’은 조선 사회에서 쏟아진 다른 얼굴그림하고 사뭇 다르다고 합니다. 의병장 최익현을 담은 그림은 ‘권력자가 돈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니까요. 한 사회가 스러지고 다른 사회로 들어설 무렵 그림결이 천천히 바뀐다고 할 만합니다. 신분이나 계급을 허물면서 그림도 새로운 숨결로 거듭난다고 할 만합니다.


  조선 사회까지만 하더라도 궁중 화가가 아니면 임금 모습을 섣불리 그릴 수 없었으나, 이제는 누구라도 대통령 모습을 마음껏 그릴 수 있습니다. 한때 ‘원수 모독’ 같은 죄를 물리기도 했으나 이제는 이런 모독죄까지 춤추지는 않습니다. 〈로빙화〉라는 작품(책·영화)을 보면 시골마을 권력자가 권력을 새로 거머쥐려고 이녁 모습을 ‘멋있게 그려 줄 화가’를 찾는 모습이 나오는데요, 틀이나 굴레에 박힌 어른들은 그야말로 틀이나 굴레에 박힌 그림만 그리고 그런 그림이 좋다고 여기지만, 이 작품에 나오는 고아명이라는 아이는 오직 아이 마음에서 흐르는 사랑과 꿈과 삶을 그림으로 그려요.


  그래서 《조선시대 초상화에 숨은 비밀 찾기》를 읽는 동안 이 대목을 새삼스레 헤아려 봅니다. 조선 사회에서 이름과 돈과 힘이 있는 사람들 모습만 그릴 수밖에 없던 수많은 얼굴그림을 살필 적에는 ‘그림 기법’과 ‘표현 기법’을 살피는 테두리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권력자와 사대부와 임금 얼굴그림 아니고는 살펴보기 어려운 조선 사회 얼굴그림을 바라보면서 ‘조선 사회가 어떤 모습이었을까?’라든지 ‘조선을 이룬 사람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짚을 수도 없습니다. 이른바 ‘근엄해 보이려’는 몸짓으로 남은 얼굴그림이란, 그만큼 조선 사회가 틀에 박히거나 굴레에 갇혔다는 뜻이지 싶습니다. 더욱이 얼굴그림에 남을 수 있던 사람은 거의 모두 사내일 뿐입니다. 임금 곁에서 임금을 모신 이들은 모조리 사내이기도 했어요.


  이제 앞으로 백 해가 흐르고 이백 해가 흐르면 오늘날 20∼21세기를 돌아볼 뒷사람으로서는 조선 사회하고는 사뭇 다른 ‘그림 이야기’를 누리리라 생각해요. 앞으로는 이름이나 돈이나 힘이 있는 사람들 얼굴그림뿐 아니라 수수하고 투박한 이 나라 수많은 ‘여느 이웃’ 살림살이를 그림 한 점으로 읽을 만하겠지요. 4348.11.26.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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