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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셔터 걸 1
키리키 켄이치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101
무엇을 왜 사진으로 찍으려 하는가
― 도쿄 셔터 걸 1
켄이치 키리키 글·그림
주원일 옮김
미우 펴냄, 2015.7.30. 8000원
한국에 사진을 찍는 사람은 많으나, 어떤 사진을 왜 찍어야 하는가를 헤아리는 사람은 뜻밖에 매우 드뭅니다. 값진 사진기와 장비를 갖춘 사람은 무척 많지만, 이 사진기와 장비로 어떤 사진을 어떻게 찍고 읽는가 하는 대목을 슬기롭게 살피는 사람은 뜻밖에 아주 드뭅니다.
가만히 보면, 한국 사회에서 ‘사진읽기·사진찍기’를 차근차근 이야기하거나 나누는 자리는 매우 드물어요. 학교나 강단에서도 ‘사진’을 알뜰살뜰 가르치거나 배우는 자리는 아주 드뭅니다.
이른바 ‘이론 교육’은 있고, ‘잘 찍는 사진 소개’는 있으며, ‘공모전에 뽑히기’라든지 ‘전시회 열기’라든지 ‘사진 작품 팔기’는 있지만, ‘사진읽기·사진찍기’라든지 ‘사진 이야기’는 없다시피 합니다.
피사체는 흔히 볼 수 있는 도쿄 거리.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걷기만 해도 생각지 못한 만남과 놀라움이 있다. (10쪽)
내 카메라는 도쿄에 흐르는 현재의 시간을 담아내고 있다. (14쪽)
켄이치 키리키 님이 빚은 만화책 《도쿄 셔터 걸》(미우,2015) 첫째 권을 읽습니다. 고등학교 사진부 학생들이 도쿄 시내 곳곳을 거닐면서 ‘두 다리로 느끼는 이웃 삶’을 이야기하고, ‘머리에 넣는 지식보다는 몸으로 마주하는 삶’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느끼고 헤아리는 삶을 ‘사진으로도 넌지시 옮기는 즐거움’을 이야기합니다.
다만, 이 만화책은 그림결이 그리 뛰어나지 않습니다. 만화책에 나오는 사람들 얼굴이 거의 똑같습니다. ‘인체 비례’도 썩 잘 그리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도쿄 시내 구석구석’을 꼼꼼히 그려서 보여주려는 뜻인 만화책이기에 ‘인물 그림’은 뒤로 처졌구나 싶기도 합니다. ‘만화책으로 사진을 이야기하기’에 눈길을 맞춘 작품인 만큼 ‘인물 데생’에는 마음을 덜 기울였구나 싶기도 해요.
어느 모로 본다면, 만화책에 나오는 그림은 좀 못 그려도 될 수 있습니다. 그림은 뛰어나지만 이야기가 없으면 어떤 작품이 될까요? 그림결은 훌륭하지만 이야기에 아무런 알맹이가 없이 재미조차 없으면 어떤 작품이 될까요?
‘사진을 이야기하는 만화책’이라는 얼거리를 헤아려 봅니다. 사진을 찍을 적에는 ‘사진을 잘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잘 찍은 사진이라 하더라도 아무런 이야기가 깃들지 않으면 부질없어요. ‘사진 묘사’가 훌륭하다든지, ‘황금비율을 맞추었다’든지 ‘색감이나 비례나 콘트라스트나 이것저것 멋지다’든지 하더라도, 이 사진 한 장에 이야기가 없다면, 이런 사진은 더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요절한 위대한 작가의 모습은 이제는 사진에 담을 수 없다. 그래도 우리는 남겨진 작품 속에서 언제나 그와 만날 수 있다. (34쪽)
미하루는 그날 표정 중 제일 기쁘게 웃으며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40쪽)
안 흔들리고 찍은 사진이기에 ‘좋지’ 않습니다. 안 흔들리고 찍은 사진은, 말 그대로 ‘안 흔들린 사진’입니다. 초점이 잘 맞은 사진도 그저 ‘초점이 잘 맞은 사진’입니다.
어떤 사진을 찍어야 할까요? 아주 쉽습니다. 내가 즐겁게 여기는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으면 됩니다. 사진을 왜 찍어야 할까요? 아주 쉽지요. 내가 기쁘게 사는 모습을 그야말로 기쁘게 웃고 노래하기에 이 기쁨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즐거움을 사진으로 담을 적에는 ‘좀 흔들린다’든지 ‘초점이 살짝 어긋났다’든지 ‘색감이 좀 처진다’든지 ‘구도가 엉성하다’든지 하더라도 다 괜찮습니다. 즐거움을 담았으니까요.
기쁨을 사진으로 옮길 적에도 이와 같아요. 기쁜 이야기가 흐르는 사진을 찍을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럴듯해 보인다거나 멋져 보여야 하지 않습니다. 돋보인다거나 대단해 보여야 하지 않습니다.
“내 사진은 안 돼. 조금 세련되지 못하다고 할까. 투명감이 떨어진다고 할까. 찍고 싶은 순간의 공기를 담을 수가 없어.” “라이카를 사면 찍을 수 있을지도? 키무라 이헤이처럼.” “고등학생한테 그런 돈이 어딨어. 가끔 생각해. 좋은 사진이란 대체 뭘까 하고.” “음, 정해진 답이 없는 게 아닐까? 난 이렇게 생각해. 카메라는 ‘신의 눈’이라고. 하늘의 색, 나무의 흔들림, 철새의 무리, 길을 걷는 사람들 표정, 어디를 어떤 각도에서 찍어도 거기에는 반드시 빛이 들어가고 생명의 흔적이 있어.” (75∼76쪽)
문학상을 타려는 뜻으로 문학을 한다면 재미있을까요? 졸업장을 따려는 뜻으로 학교를 다닌다면 재미있을까요? 공모전에서 뽑히려는 뜻으로 사진을 찍는다면 재미있을까요?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은 ‘남이 보아주라’는 뜻으로 일구지 않습니다. 글도 그림도 사진도 ‘내가 스스로 다시 보고 또 보고 새로 보고 자꾸 보는 즐거움’을 누리려고 일굽니다.
내가 쓴 글을 내가 새롭게 읽으면서 스스로 즐겁습니다. 내가 그린 그림을 내가 새롭게 바라보면서 스스로 즐겁지요. 내가 찍은 사진을 내가 새롭게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즐거워요.
남한테 보여주려고 찍는 사진이 아니라, 내가 다시 보고 새롭게 보려고 찍는 사진입니다. 그러니까, 사진 좀 ‘잘 찍었다’고 해서 자랑할 일이 없습니다. 사진 좀 ‘못 찍었다’고 해서 서운해 하거나 아쉬워 할 일이 없습니다.
“스카이트리 건설에 따른 재개발로 풍경이 점점 변하고 있으니까, 들를 때마다 꼼꼼하게 촬영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 그래서 이건 나 나름대로 남기는 마을의 기록이야.” (87쪽)
상반된 음과 양, 빛과 그림자를 통해 보이는 세계. 마치 내가 이제까지 몰랐던 오토나시 선생님의 또다른 모습과도 같았다. (118쪽)
만화책 《도쿄 셔터 걸》에 나오는 고등학교 사진부 학생은 사진을 왜 찍을까요? 바로 ‘사진을 좋아하는 내 눈길로 내 삶을 담으려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바라보아 주는 모습이 아닌 ‘내가 바라보는 내 고장’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이 훌륭하다고 북돋아 주는 모습이 아닌 ‘내가 스스로 가꾸는 내 보금자리와 마을 이야기’가 흐르는 모습입니다.
“난 내가 가진 물감으로 도저히 하늘의 파란색과 나뭇잎의 녹색을 제대로 칠할 수 없어서 화가가 되는 건 무리라고 포기했어.” “딱히 하늘이 파란색으로만 되어 있는 건 아니잖아. 그건 너 스스로가 무의식중에 선택한 거야.” (163쪽)
사진은 잘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말솜씨는 훌륭해야 하지 않습니다. 시험점수가 높게 나와야 하지 않습니다. 졸업장이나 자격증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되거나 시장·군수 같은 자리에 서야 하지 않습니다.
그저 여기에 있으면 됩니다. 그저 나를 사랑하면서 삶을 가꾸면 됩니다. 그저 오늘 하루를 새롭게 맞이하면 됩니다.
어떤 사진기를 써야 할까요? 어떤 사진기라도 다 되지요. 값진 사진기를 쓰고 싶다면 값진 사진기를 쓰면 됩니다. 가벼운 사진기를 쓰고 싶다면 가벼운 사진기를 쓰면 돼요.
어떤 것을 찍어야 할까요? 어떤 소재나 주제라도 다 됩니다. 스스로 마음에 드는 소재와 주제를 찾으면 됩니다. 스스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자리에서 즐겁게 마주하는 소재나 주제라면 모두 다 사진으로 담을 만합니다. 남들이 많이 찍는 소재나 주제라도 됩니다. 남들이 아무도 안 찍는 소재나 주제라도 되지요. 가리거나 따져야 할 것은 없지만, 꼭 한 가지만 가리거나 따지면 됩니다. ‘너, 이 사진을 찍어서 즐겁니?’ 하고 물으면 돼요. ‘나, 이 사진을 찍으면서 즐거웠나?’ 하고 물으면 됩니다.
“카메라나 렌즈도 중요하지만 포트레이트를 찍을 때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해? 상대와 많은 커뮤니케이션을 취해 그 사람 본연의 모습에 되도록 가까워지게 만드는 것.” (177쪽)
이야기가 흐르기에 사진입니다. 이야기를 빚기에 사진입니다. 이야기를 나누기에 사진입니다. 이야기가 새록새록 넘치기에 사진입니다. 그러니까, 이야기가 있기에 사진입니다. 모든 사진은 이야기입니다. 모든 책도 이야기요, 모든 글과 그림도 이야기예요. 모든 춤과 노래도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누리는 삶은 저마다 다르면서 새롭고 즐거운 이야기입니다.
사진은 이야기를 찍습니다. 사진은 삶을 찍습니다. 사진은 사람을 찍습니다. 사진은 사랑을 찍습니다. 사진은 바로 내가 나를 찍는 즐거운 길입니다. 4348.10.10.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비평/사진책 읽는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