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없는 사진말
9. 언제 어디에서나 ‘내 사진’
내가 찍는 사진은 언제 어디에서나 ‘내 사진’이다. 내 사진은 ‘네 사진’을 흉내내거나 시늉할 수 없다. 내 사진은 늘 내 사진으로 있을 뿐, 다른 사진이 되지 않는다. 가끔 몇몇 이름난 다른 작가 사진을 흉내내 볼 수 있으리라. 이를테면, ‘내 사진 틀’을 마련하고 싶어서 이렇게도 찍어 보고 저렇게도 찍어 볼 만하겠지. 그런데, 다른 사람이 빚은 ‘다른 사람 틀’에 맞추어 찍는 사진은 언제나 ‘내 사진다운 결’이 하나도 없는 줄 아주 쉽고 빠르게 알아채기 마련이다. 그래서, 내 사진 틀을 세우려고 이렇게도 찍거나 저렇게도 찍어 본들, 정작 나한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줄 곧 알아낼 수 있다.
무슨 소리일까?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찍으면 될 뿐이다. 여기에서는 이렇게 찍어야 하지 않는다. 저기에서는 저렇게 찍어야 하지 않는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 찍을 이야기를 스스로 찍을 뿐이다. 그래서 ‘잘 찍은 사진’이나 ‘잘 찍도록 이끌 만한 도움말(팁)’은 하나도 없다.
오늘날 사회에 떠도는 수많은 사진 가운데 ‘아무개 사진’이라고 이를 만한 사진은 매우 드물다. 거의 모든 사진이 ‘나다움’을 담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뭔가 멋지거나 그럴싸해 보이는 틀(껍데기, 형식)에 매달린 채 다른 사람 흉내나 시늉을 내니까, 이런 사진에는 ‘사진’이라는 이름조차 아깝다. 아니, 쓸 수 없지. 다른 사람을 흉내내어 찍는다면, 이는 그저 ‘흉내’이다. 시늉으로 찍는다면 ‘시늉’이다. 이러면서 ‘베끼기’와 ‘훔치기’가 나온다. 왜 베끼거나 훔칠까? 왜 다른 사람 사진을 베끼거나 훔칠까? ‘내 이야기’를 담을 ‘내 사진’을 찍어서 ‘내 삶’을 ‘내 사랑’으로 가꾸어 ‘내 기쁨’을 한껏 누리려고 하는 ‘내 노래’가 없으니 베끼거나 훔친다.
‘사진이 잘 나오는 곳(포인트, 지점)’은 없다. ‘사진이 잘 나올 만한 때(시간)’는 없다. 찍고 싶을 때에 찍어라. 그러면 된다. 찍고 싶은 모습을 찍어라. 그러면 넉넉하다. 언제 어디에서나 내 눈으로 보고 내 마음으로 찍어 내 사랑으로 읽는다. 4348.10.9.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