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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588 - 조문호 사진집 ㅣ 눈빛사진가선 11
조문호 지음 / 눈빛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216
이웃을 생각하는 사진 한 장
― 청량리 588, 1984∼1988
조문호 사진
눈빛 펴냄, 2015.2.21. 12000원
한국에는 “꿈꾸는 카메라”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다큐영화 〈사창가에서 태어나(Born Into Brothels: Calcutta's Red Light Kids),2004〉가 있습니다. 이 다큐영화는 인도 캘커타에 있는 사창가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창가에 ‘몸 파는 가시내’만 있지 않다는 대목을 보여주고, 사창가에 ‘몸 사는 사내’만 드나들지 않는다는 대목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 다큐영화는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아이들’을 보여줍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짓는 삶을 보여주고, 아이들이 스스로 새로 가꾸는 사랑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마을’을 보여주지요. 사람이 사는 마을, 사람이 사랑하는 마을, 사람이 꿈꾸는 마을을 보여주요.
그러고 보면, 이 다큐영화를 한국말로 옮기면서 “꿈꾸는 카메라”로 새 이름을 붙일 만합니다. 어른들한테서는 꿈이 사라지거나 아스라하지만, 아이들은 꿈을 꾸거든요. 아이들은 새로운 마을을 꿈꾸어요. 아이들은 새로운 학교와 어른과 이웃을 꿈꾸어요. 아이들은 욕하지 않고 술 퍼마시지 않으며, 아이들을 안 때리는 어른들을 꿈꿉니다.
다큐영화 〈사창가에서 태어나〉에 앞서 ‘마을 이웃’으로서 ‘사창가 사람’을 마주하려고 했던 사진가나 영화가는 있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창가’는 어느 나라에서나 ‘불법’이고(불법이 아닌 나라도 몇 있습니다만), 몸을 사고파는 일을 ‘합법’으로 여기면서 ‘직업 칸’에 적을 수 있는 나라는 없다시피 하거든요. 그런데 문학이나 영화에서는 ‘몸을 사고파는 사람’ 이야기를 자주 다룹니다. 불법인 이야기는 문학이나 영화에서 대단히 자주 나옵니다. 이와 달리 사진이나 영상으로 ‘불법 사창가’를 찍거나 기록하는 일은 몹시 어렵습니다. 말 그대로 불법이니까요.
비록 몸 파는 창녀일지라도 하나의 직업인으로 보아 주도록 사회의 인식을 바꿔 보자고 설득했다. 그들은 스스로의 인권을 되찾자는 데 공감해 사진작업에 많은 힘을 보태 주기도 했다. 동등한 사람으로 봐 주는 깨어난 세상을 바라며 4∼5년 동안 뛰어다녔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실패했다. 편견은 보기보다 완강했다. (머리말)
사진을 찍는 조문호 님은 《청량리 588, 1984∼1988》(눈빛,2015)이라는 사진책을 선보입니다.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사진을 찍었고 1990년에 전시회를 열기도 했지만, 사진책은 201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선보입니다.
1988년이라는 올림픽 언저리에는 이런 책이 나오기 어려웠겠지요. 올림픽이 지난 뒤에도 군사독재 정치권력은 그대로 있었으니 이러한 사진책이 한국에서 나오기란 그야말로 어려웠겠지요.
그렇지만 눈길을 넓혀서 생각해 보면, 사창가를 바라보는 사람들 눈높이는 언제나 한쪽으로 굳어집니다. 사창가는 ‘사창가’라는 곳이요, 이곳에 있는 사람도 나와 똑같은 사람입니다만, 이 대목을 살피는 사람이 매우 적습니다. 아니, 사회는 사람들이 ‘편견과 선입관’으로 사창가를 바라보도록 내몹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 평화롭거나 평등할 수 있는 터전이 되는 마을로 나아가는 사회가 아니라, 힘과 돈으로 사람을 억누르거나 짓누르는 사회가 됩니다.
한번 거꾸로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사창가 아가씨’나 ‘사창가 아줌마’가 ‘사진작가’를 기록하거나 촬영을 한다고 한다면 어떠할까요? 사진작가는 사창가 아가씨한테 어떻게 보일까요? 그리고, 사창가 아가씨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사진으로 기록한다고 하면 어떠할까요? 사창가 아줌마가 바라보는 시장님이나 군수님은 어떤 모습일까요? 사창가 아가씨가 바라보는 군대는 어떤 모습일까요? 사창가 아줌마가 바라보는 시골이나 숲이나 바다는 어떤 숨결일까요?
사진책 《청량리 588, 1984∼1988》은 서울 청량리 언저리에서 ‘몸을 파는 일’을 하는 가시내 삶자락 가운데 한 가지를 보여줍니다. 몸을 팔려고 ‘가게 앞’에 서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몸을 팔려고 ‘가게 안’에서 몸을 꾸미거나 화장을 하거나 옷을 갖춰 입는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몸을 팔려고 ‘가게 안’에서 옷을 벗는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밥을 먹으려고 연탄불을 지피는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고단한 하루 일을 마치고 달게 잠든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가게 앞’을 빗자루로 정갈하게 쓸고 치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사진책 겉에 ‘청량리’나 ‘588’이라는 숫자가 없다면, ‘이런 이름’이 없이 사진만 흐른다면, ‘뭔가 다른’ 옷차림이나 ‘어쩐지 다른’ 길거리 모습을 담은 사진이 없다면, 이 사진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내 모습’이거나 ‘이웃 모습’이거나 ‘동무 모습’입니다. 그저 수수하게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입니다.
차근차근 돌아볼 노릇입니다. 왜 ‘성매매’는 불법일까요? 사람을 바보로 갉아먹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되며, 사람을 돈으로 사고팔아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사람을 괴롭히거나 휘둘러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매매업소는 버젓이 있습니다. 게다가 성매매업소를 드나드는 사람은 ‘수수한 여느 사람’을 비롯해서 ‘정·관계’에서 굵직한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까지 두루 있습니다. 그리고, 성매매업소를 드나드는 사람은 모두 ‘사내’이지요. 돈이 있거나 힘이 있는 사내가 성매매업소를 드나듭니다. 성매매업소를 차리거나 성매매업소로 돈을 버는 사람도 하나같이 ‘사내’입니다. 사내들은 권력을 두 손에 거머쥐면서 가시내를 벼랑에 내몰지요. 사내들은 가시내를 발 밑에 두면서 마음대로 주무르지요. 이러면서 합법이니 불법이니 하고 입으로만 떠들고, 이 사회에 평등도 평화도 민주도 자유도 제대로 뿌리내리는 일에는 마음을 쏟지 않습니다.
1990년 2월, 그동안 찍어 온 사진들을 모아 전시회를 가졌으나 주인공인 그녀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니 올 수 없었던 것이다. 언론은 사람 대접을 받게 해 달라는 그녀들의 애끓는 목소리보다 매춘이란 호기심에 무게를 둔 선정적인 나팔을 일제히 불어 재꼈다. (머리말)
우리 집 여덟 살 큰아이가 저녁에 불쑥 “아버지, 밥이 왜 이리 늦어요?” 하고 묻습니다. 낮에 자전거를 타고 바깥마실을 다녀온 뒤 아이들을 씻기고 밥을 차리고 이것저것 바쁘게 움직이는데, 아이들은 제 어버이가 씻겨 주고 입혀 준 뒤에 느긋하게 밥상맡에 앉아서 만화책을 보고 놀다가 문득 한 마디를 합니다. 나는 하하하 웃고는 아주 즐겁게 아이를 타일렀습니다. 여덟 살 아이가 톡 터뜨린 말이 재미있고 즐거워서 웃었습니다. 더욱 신나게 밥을 지어서 얼른 마무리지었어요. 제 어버이는 바깥마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1초도 쉴 겨를이 없이 이 살림 저 집일을 보듬으면서 밥을 차리는데, 아이로서는 배가 고프니까 배고프다는 말이 나올밖에 없을 테지요.
아이들이 터뜨리는 말은 참말 언제나 재미있으면서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사랑스럽지요. 모든 어른은 아기로 태어나서 아이로 자랍니다. 아기이지 않은 어른은 없습니다. 아이로 자라지 않은 어른도 없어요. 사진을 찍은 할아버지도 아기로 태어나서 아이로 살았습니다. 사진에 찍힌 풋풋한 가시내도 모두 아기로 태어나서 아이로 살았어요.
사랑을 받으며 태어난 이웃입니다. 사랑으로 만나서 이 땅에 새롭게 태어난 숨결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자라서 오로지 사랑으로 꿈을 키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 나라에는 사랑이 아닌 돈과 힘 따위로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거나 부려먹거나 휘두르는 제도나 가게가 있어야 할까요? 왜 이 나라에는 아름다운 평화나 평등은 좀처럼 자리를 잡기가 어려울까요?
가까운 곳을 둘러봅니다. 우리 둘레에 흔히 있는 학교만 보아도, 어느 학교이든 대학입시를 맨 앞에 둡니다. 대학입시에서도 서울에 있는 몇몇 대학교에 들어가도록 닦달합니다. 아이들한테 꿈이나 사랑을 가르칠 수 있는 넉넉하고 느긋한 학교는 매우 드뭅니다. 회사나 공공기관이나 공장도 엇비슷합니다. 어느 곳에서나 성과나 성적이나 실적을 외칩니다.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하고, 일을 더 많이 해야 하며, 성장률은 더 높아야 한다고 외쳐요.
아이들은 놀면 안 될까요? 아니, 아이들은 놀면서 자라야 하지 않을까요? 초등학생뿐 아니라 중학생하고 고등학생도 틈틈이, 또는 자주, 아니 날마다 몇 시간쯤 느긋하게 놀면서 즐거운 나날을 누려도 되지 않을까요? 어른들도 빡빡한 일정에 맞추어 쳇바퀴처럼 돌지 말고, 느긋하면서 넉넉하게 삶을 지을 말미를 누려야 하지 않을까요?
“놀다 가세요∼” 거짓 사랑을 구걸했지만 지나치는 이의 반응은 차가웠다. “야! 니가 좋아서 잡는 줄 아니, 돈이 좋아 잡는다.” 체념 섞인 그녀의 절규가 듣는 이의 가슴을 더 아프게 한다. (머리말)
내 한몸 먹고사는 일이 걱정없다면 몸을 팔아야 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 식구 먹고사는 일이 근심스럽지 않다면 몸을 팔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 집 여덟 살 아이가 나한테 불쑥 한 마디를 했듯이, 나도 누군가한테 불쑥 한 마디를 하고 싶습니다. “전투기 한 대만 안 사도 먹고사는 걱정을 안 할 사람이 확 줄 텐데?” 한 마디를 더 하고 싶습니다. “잠수함 한 대만 안 사도 먹고사는 걱정을 안 할 사람이 엄청나게 줄 텐데?” 한 마디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원자력 발전소만 안 지어도 이 나라에 굶거나 가난한 사람이 몽땅 사라질 텐데?”
나한테 전쟁무기가 없어도 너한테 전쟁무기가 있으면 무서우니까 전쟁무기를 너보다 내가 더 갖추어야 한다고 말하는 정치권력자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정치권력자한테 따져야 합니다. ‘이봐, 정치권력자야! 너희는 평화를 지키도록 그 자리에 있지, 전쟁무기를 만들라고 그 자리에 있지 않잖아? 우리한테도 저쪽한테도 전쟁무기가 다 함께 없어서 다 함께 평화로운 길이 되도록 네가 정치를 제대로 해야 하지 않아?’ 하고 따져야 합니다.
나는 너한테 사랑을 말할 수 있어야 사랑스럽습니다. 너는 나한테 사랑을 노래할 수 있어야 사랑스럽니다. ‘거짓 사랑’도 아니고 ‘몸 섞어서 돈 주고받기’도 아닌 ‘서로 아끼는 아름다운 삶’이 될 때에 비로소 ‘사랑’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습니다.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놀고, 그야말로 거리낌이나 스스럼이 없이 서로 아끼고 돌보는 따사로운 마음으로 놀며,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로 꿈을 지을 수 있기를 빌어요. 우리는 모두 꿈꾸는 사람이 되고, 꿈꾸는 사진기를 손에 쥐고, 꿈꾸는 이야기를 오순도순 주고받을 수 있기를 빌어요. 사진이 노래가 되고, 노래가 사진이 되고, 삶이 노래가 되고, 노래가 삶이 되고, 이리하여 시나브로 사진도 노래도 삶도 모두 곱게 사랑이 되는 기쁜 지구별이 될 수 있는 꿈을 가슴에 품어요. 해님이 온 숲에 모든 풀하고 나무를 골고루 자라도록 비추듯이, 사랑이 온 지구별에 골고루 깃들어서 모든 사람이 기쁘게 웃는 삶을 꿈으로 꿉니다. 4348.10.7.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