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꽃 1
오시마 슈지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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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54



열네 살 푸름이는 왜 ‘버러지’가 되어야 했을까

― 악의 꽃 1

 오시미 수조 글·그림

 최윤정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1.7.25. 4500원



  나는 내가 다닌 중학교라는 곳을 거의 떠올리지 않습니다. 1980년대가 저물면서 1990년대로 접어들 무렵 한국 사회에서 중학교는 대단히 재미없는데다가 메말랐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다닌 중학교만 참으로 재미없고 메말랐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닌 중학교는 제법 재미있었을 수 있고, 즐겁거나 아름다웠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다닌 중학교에서는 다달이 치르는 시험에서 1점이 떨어질 때마다 몽둥이로 한 대씩 때렸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한 번 받은 점수에서 1점이라도 떨어지면 안 되었고, 98점에서 97점이 되든, 100점에서 99점이 되든 똑같이 몽둥이질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보충수업은 모든 학생이 학교에 돈을 바치면서 들어야 했고, 자율학습은 조금도 자율이 아닌 채 밤 열 시까지 교실에 갇힌 채 꼼짝을 할 수 없는 고문하고 같았습니다. 이런 곳에서 무엇을 생각할 만할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곳에 학교라는 이름을 붙이는 일은 옳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나카무라, 꼴등! 0점이다! 대체 어떻게 돼먹은 거야, 너! 답란이 전부 빈칸이라니! 뭐라고 말 좀 해 봐! 그래서야 어디 사회에 나가서 제대로 …….” “시끄러워. 버러지 주제에.” “버, 감히 선생님에게 버러지라니, 너, 이 녀석!” (10∼11쪽)


“카스가는 늘 책을 읽고 있더라. 왜? 그것도 좀 이상한 책. 아무도 모르는 그런 거. 재미있어?” (38쪽)



  오시미 수조 님이 빚은 만화책 《악의 꽃》(학산문화사,2011) 첫째 권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만화책에 나오는 여러 아이들은 저마다 재미없거나 따분하거나 고단한 하루를 보냅니다. 또는 저마다 재미있거나 즐겁거나 새로운 하루를 보냅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야 하니까 학교에 갑니다. 학교에 다니는 웬만한 아이들은 제 어버이가 학교에 보내니까 학교를 다닙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어느덧 집에서 어머니나 아버지하고 말을 거의 안 섞고, 학교에서는 따돌림에 휘둘리지 않도록 마음을 씁니다.


  무슨 재미일까요. 무엇에 재미를 붙여야 할까요. 학교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보여줄까요.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예비 사회인’으로서 뭔가를 배우는 셈일까요. 아이들은 숙제를 꼬박꼬박 하고 시험도 알뜰히 잘 치러야 할까요. 100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으면 모범생이고, 50점 안팎인 점수를 받으면 말썽꾸러기이며, 0점 언저리에 맴돌면 골칫거리인 셈일까요.



“망상만이라면 몰라도, 그걸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녀석은 위험하단 말이야. 범죄잖아, 완전히. 진짜 깬다니까.” (62쪽)


‘할 수 없어, 자수 따위. 보들레르, 악의 길은, 이렇게도 고통스러운 것이었구나. 하지만 자수하지 않으면, 나카무라가 떠들 테니, 훨씬 더 최악의 사태가! 아아아, 하하하하! 어째서 나만 이런 수난을, 하하하!’ (63쪽)



  만화책 《악의 꽃》에 나오는 주인공 사내인 ‘카스가’는 중학교를 다니면서 거의 아무런 재미를 붙이지 못합니다. 카스가라는 아이는 보들레르 책을 늘 끼고 사는데, 보들레르 책뿐 아니라 ‘교과서 아닌 책’을 마을 헌책방에서 꾸준히 장만해서 ‘교과서보다 아끼면서 읽’습니다. 교과서나 진도나 시험에는 거의 마음을 안 쓰지만, 교과서 아닌 책에는 온통 마음을 쏟아서 하루를 보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카스가는 어느 날 어떤 일을 하나 벌입니다. 같은 반에 있는 예쁜 가시내 체육복을 몰래 훔치지요. 처음부터 체육복을 훔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빈 교실에 문득 혼자 들어갔고, 교실 뒤쪽 바닥에 떨어진 체육복 주머니를 보았으며, 그 주머니가 카스가가 마음에 들어 하던 가시내 체육복인 줄 알아차립니다. 처음에는 체육복을 만져 보기만 하려고 했으나, 카스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웃도리 안쪽에 체육복을 집어넣고 학교를 빠져나왔습니다. 제 넋을 차렸을 적에는 벌써 돌이킬 수 없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누가 이 모습을 보았을까요? 누가 카스가라는 아이 마음을 읽었을까요? 카스가는 앞으로 어떤 길을 갈까요? 카스가는 이제 이 일을 돌이킬 수 있을까요?



“카스가, 난 말이지, 훨씬 오래 전부터 근질근질 좀이 쑤셨어. 몸 속 저 아래 깊은 곳에서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뭔가가 부글부글 끓고 있어. 이 세상 전부, 내 부글부글 속에서 버러지가 돼 버리면 좋겠어.” (104∼105쪽)



  카스가는 체육복을 돌려주려고 하지만 끝내 돌려주지 못합니다. 게다가 체육복을 훔치는 모습을 다른 아이가 보았습니다. 카스가가 교실에서 앉는 자리에서 바로 뒤에 앉는 나카무라라는 아이가 보았습니다. 나카무라는 학교에서 아무 재미를 못 붙이는 아이 가운데 하나인데, 카스가가 저지른 짓을 문득 본 뒤에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일어나는 것이 있었다고 해요. ‘너도 나도 다 같이 버러지가 되어’ 그야말로 실컷 썩어문드러지는 길로 굴러떨어지자고 카스가한테 말합니다.


  중학교에 다니는 나이라면 이제 열너덧 살입니다. 열너덧 살인 아이는 어찌하여 ‘너도 나도 버러지’라고 하는 생각을 마음에 품어야 했을까요. 열너덧 살인 아이는 어찌하여 같은 반 동무 체육복을 몰래 훔치면서 스스로 부들부들 떠는 하루를 아슬아슬하게 보내야 했을까요. 열너덧 살인 아이는 어찌하여 마음이 괴로운 동무를 더 괴롭게 몰아붙이면서 스스로도 더 괴로운 삶이 되려고 할까요. 열너덧 살인 아이는 스스로 끌어들인 이 소용돌이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요.



“다 벗겨버리겠어. 네가 쓰고 있는 거죽을 내가 몽땅 벗겨버릴 거야. 알았으면 어서 입어. 네가 훔친 사에키 체육복.” (198∼199쪽)



  나비가 되려면 허물을 수없이 벗는 애벌레를 거쳐서 번데기가 되어야 합니다. 번데기로 무척 오랫동안 고요히 잠을 자면서 온몸을 녹여야 합니다. 애벌레였던 몸을 몽땅 녹이지 않으면 나비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번데기에서 고요히 잠들어 오랫동안 온몸을 모조리 녹인 애벌레일 때에 비로소 나비라는 새 몸으로 깨어날 수 있습니다.


  만화책 《악의 꽃》에 나오는 카스가나 나카무라 같은 아이들은 아직 ‘애벌레’입니다. 말 그대로 ‘버러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벌레이든 버러지이든 ‘아기 벌레’예요. 아직 철이 들지 않았고, 철을 모르며, 철부지로 이것저것 부딪히는 아이들입니다.


  두 아이를 비롯해서 다른 아이들도 아직 철이 들지 않았습니다. 눈을 뜨지 못했고, 마음을 깨지 못했어요. 그러니 이런 잘못이나 저런 말썽이라고 할 만한 짓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아직 어느 것도 제대로 모르니까요.


  두 아이는 저마다 거죽을 벗어야 합니다. 남이 벗겨 주기를 기다릴 수 없습니다. 스스로 벗어야 합니다. ‘바보스레 저지른 짓을 자수하느냐 마느냐’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거죽도 벗고 허물도 벗어야 해요. 학교에 얽매이지 말고, 굴레나 사회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하고픈 일을 찾고, 스스로 나아가려는 길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만화책 《악의 꽃》에 나오는 두 아이 카스가와 나카무라는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채 ‘썩어문드러지는 길’로 굴러떨어지려고만 합니다.


  쓸쓸하며 안타까운 노릇일 수 있지만, 오늘 이 아이들은 이 길에 서면서 한 걸음을 내딛겠지요. 괴롭고 힘들지만 한 걸음을 내딛겠지요. 바보스러운 어른이 아닌 새로운 어른이 되기를 바랄 테니까요. 굴레에 가두는 사회가 아닌, 굴레를 떨치는 삶을 바랄 테니까요. 4348.9.19.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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