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풍경이 말을 건네신다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91
전성호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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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01



시와 저녁놀

― 저녁 풍경이 말을 건네신다

 전성호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11.3.31. 8000원



  저녁이 되어 어스름이 깔립니다. 큰아이는 “아버지, 이제 저녁이야?” 하고 묻습니다. 나는 “그래, 이제 저녁이야.” 하고 말합니다. 여덟 살 큰아이는 ‘아침’인지 ‘낮’인지 ‘저녁’인지 으레 묻습니다. 이제 궁금해 할 만한 나이가 되었으니 물을 수 있지만, 저녁이 되어 해가 지면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든다는 말을 늘 했기에 저녁을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저녁이나 밤이나 새벽이나 아침을 가리지 않습니다. 안 졸리면 놀고, 졸리면 졸음을 참다가 곯아떨어집니다. 잠에서 깨면 일어나고, 일어나면 놉니다.



재봉틀의 페달을 밟다 보면 / 나는 까맣게 사라진다 (재봉공)



  전성호 님 시집 《저녁 풍경이 말을 건네신다》(실천문학사,2011)를 읽습니다. 오늘도 저녁놀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저녁놀이 진 깜깜한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봅니다. 모기가 사라질 듯하면서 사라지지 않아, 모기에 물리면서 밤바람을 쐽니다. 잠든 아이들 이마를 쓸어넘기고 가슴을 토닥이다가 이불깃을 여밉니다. 시집에서 흐르는 이야기도 있지만, 참말 저녁놀이 말을 건네시고 아침놀이 말을 건네십니다. 아이들이 놀면서 눈빛으로 말을 건네시고, 아이들이 밥을 먹다가 웃음짓는 눈빛으로 말을 건네십니다.



처맛기슭은 언제나 시끄럽다 / 노란 주둥이 뾰족뾰족 들어 올리던 지푸라기 섞인 흙집 / 새끼들 날개 달아 띄울 때까지 / 밀, 보리, 감자, 강냉이 밭일에 파묻혀 / 손톱 밑이 까매지셨다 (제비집)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마실을 다니다 보면 드문드문 제비를 봅니다. 이제 늦여름이요, 가을 문턱이니 제비를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 집 처마에서 자라던 새끼 제비는 모두 날갯짓을 익혀서 둥지를 떠났습니다. 늦깎이로 태어난 제비인 탓인지, 올해 새끼 제비는 한 번 둥지를 떠난 뒤로 다시 우리 집 처마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지난해까지는 날갯짓을 처음 익힌 뒤로도 밤에 돌아오고 새벽에 다시 나가기를 한 달 남짓 했으나, 올해에는 이렇게 드나들지 않아요.


  아무튼, 자전거를 타고 논둑길을 달리면서 여러 마을이 둘러싼 들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전깃줄에 내려앉은 제비를 세면 꼭 열아홉 마리입니다. 요 며칠 여러 날 세어 보는데 이 숫자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집에서 어미 제비 두 마리 있었고 새끼를 여섯 마리 깠으니 ‘올해 우리 집 제비는 여덟 마리’입니다. 그러니까, 열아홉 마리 가운데 여덟 마리는 우리 집 제비인 셈이고, 다른 열한 마리는 다른 집 제비인 셈입니다.



앉은뱅이 대나무 의자 / 드러누운 개 발등에 얹혀 / 반쯤 잘려나간 오후 / 커피 잔에 자꾸 날아와 붙는 (무풍지대―따옹지)



  나락꽃이 살그마니 피려고 하는 이즈음 제비는 몸을 넉넉히 살찌운 뒤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부디 농약바람이 좀 잦아들면서 제비가 더는 다치지 말고 살을 찌워서 씩씩하게 바다를 가로지를 수 있기를 빕니다. 이리하여, 따순 고장에서 겨울을 난 뒤, 이듬해 새봄에 새로운 날갯짓으로 이 마을과 우리 집으로 기쁘게 날아올 수 있기를 빌어요.



들녘이 젖고, 공사장이 젖고 / 빈랑나무 잎이 젖고, 서름한 되모시 머리가 젖고 / 빈민굴 띤양공이 젖고 기어코 내 뒷덜미가 젖는다 (雨)



  바람이 조용합니다. 올여름은 참으로 바람이 조용합니다. 지난해에는 무더위가 이어졌어도 곧잘 드센 바람이 불면서 더위를 식혀 주곤 했으나, 올해에는 센 바람이 좀처럼 불지 않습니다. 아니, 아예 바람조차 없는 무더위가 이레나 열흘씩 흐르기 일쑤입니다. 바람이 안 부니 빨랫줄을 받친 바지랑대가 넘어질 일이 없지만, 바람이 참말 안 부니 자전거를 몰면서 맞바람 때문에 애먹을 일이 없지만, 여름마다 으레 만나던 뭉게구름과 소낙비와 바람과 무지개 가운데 네 가지 모두 찾아보기 어려운 나날이 이어지니 여러모로 쓸쓸합니다.


  나는 도시에서 나고 자라던 어릴 적 여름날에 뭉게구름도 소낙비도 바람도 무지개도 흔히 보며 자랐는데, 시골에서 나고 자라는 우리 집 어린 아이들은 시골에서마저 뭉게구름도 소낙비도 바람도 무지개도 자꾸 못 봅니다.


  아이들은 구름을 타고 놀아야 푸른 마음이 될 텐데요. 아이들은 소낙비를 맞으며 놀아야 무럭무럭 자랄 텐데요. 아이들은 바람을 먹으며 웃어야 사랑스러운 마음이 싹틀 텐데요. 아이들은 무지개와 동무하며 달려야 싱그러운 꿈을 키울 텐데요.



식탁 위의 청어 눈알 / 반짝이는 비늘 / 나는 동문서답 / 뼈를 가진 것들의 비밀을 말한다 (빛 속의 뼈)


비가 오면 / 나무들은 물고기가 된다 (비)



  시집 《저녁 풍경이 말을 건네신다》를 살몃살몃 읽습니다. 천천히 읽고 천천히 덮습니다. 저녁 풍경이 건네시는 말을 귀여겨들으며 삶노래를 부른 전성호 님 이야기를 되새기면서, 내가 오늘 이곳에서 귀여겨듣는 ‘저녁 말’이랑 ‘아침 말’은 무엇인지 되돌아봅니다. 내가 스스로 즐기는 삶노래는 무엇인지 되새기고, 내가 아이들한테 물려줄 삶노래에는 어떤 사랑이 어떤 꿈으로 흐르는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성호 왔나 / 네 어머님 (빈방)



  벽에 찰싹 붙어서 자는 큰아이를 벽에서 떨어뜨립니다. 머리카락을 쓸면서 “벽에 너무 딱 붙지 말고 좀 떨어져야지.” 하고 말을 겁니다. 아이는 잠결에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고, 못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아이 마음속에 이야기를 건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건넵니다.


  뭉게구름은 없어도 온갖 무늬와 빛깔로 고운 수많은 구름이 하늘 넓게 있습니다. 소낙비는 없어도 요새 여우비를 곧잘 만났습니다. 바람이 좀처럼 불지 않는 날씨이지만, 나는 아이들한테 신나게 부채질을 해 주고, 올해에는 아이들이 처음으로 선풍기 놀이를 누립니다. 무지개는 찾아볼 수 없더라도 밤마다 미리내는 얼마든지 올려다볼 수 있습니다.


  우리 집에서 손수 딴 호박으로 호박국을 끓여서 아침저녁으로 먹습니다. 우리 집 풀밭에서 함께 사는 풀벌레가 들려주는 노래를 하루 내내 실컷 듣습니다. 우리 집 울타리에서 자라는 무화과나무 열매가 거의 익어서 곧 따먹을 수 있습니다.


  깊은 밤으로 흐르는 저녁 끝자락에 찬물 한 모금을 마시면서 생각합니다. 나는 내가 물려줄 수 있는 사랑을 스스로 누릴 때에 즐겁습니다. 저녁놀이 들려주는 말을 듣고, 애벌레와 나비가 들려주는 말을 들으며, 쇠무릎 잎사귀가 들려주는 말을 들으며 재미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언제나 노래입니다. 4348.8.23.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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