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리장수 다로 1
김민희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544



나를 사랑하니까 죽여 주겠다고?

― 젤리장수 다로 1

 김민희 글·그림

 마녀의책장 펴냄, 2010.11.30. 6000원



  노예제가 사라졌을 적에 노예로 있던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합니다. 소작제가 사라졌을 적에도 소작농으로 있던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합니다. 아무런 대책이나 보호장치를 마련하지 않은 채 제도만 없앤다고 해서 삶이 바뀔 수 없습니다. 수백 해에 걸쳐서 노예나 소작농으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은 ‘남이 시키는 일’을 하는 삶에 익숙합니다. 게다가 수백 해에 걸쳐서 노예나 소작농으로 있었기 때문에 ‘내 땅’이나 ‘내 일’이 없기 마련입니다. 제도가 없어져도 노예나 소작농은 다시 노예나 소작농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얼거리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노예나 소작농은 ‘노예로 뒹굴어야 하는 삶’이나 ‘소작농으로 짓눌려야 하는 삶’ 말고는 보거나 겪거나 배운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다른 삶’이나 ‘새로운 삶’을 찾거나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노예나 소작농이 다른 삶이나 새로운 삶을 찾거나 생각할 적마다 목숨을 빼앗기거나 끔찍하게 얻어맞았을 테니, 제도만 하루아침에 없앤다고 해서 달라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긴 전시 동안 대량생성된 군인들은 평화로운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 살육에 익숙한 그들은 평화로운 삶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게 된 것이다. 적응에 실패한 군인들은 걸인이나 산적과 같은 주변인으로 전락하여 사회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이에 나라에서는 구 케산국의 변경에 위치한 ‘절망의 광야’에 출몰하는 괴물들에게 현상금을 붙인다. 그리하여 방황하던 군인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절망의 광야에 몰려들게 되었다.’ (9쪽)



  김민희 님이 빚은 만화책 《젤리장수 다로》(마녀의책장,2010) 첫째 권을 읽으면서 빙긋빙긋 웃습니다. 김민희 님이 보여주는 우스개가 재미있기도 하고, 이 만화책에서 흐르는 이야기는 만화에서만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어서 쓸쓸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보며 빙그레 웃고, 쓸쓸한 이야기에는 쓰겁게 웃습니다.



‘부럽긴 뭐가 부러워. 착각하면서 사는 게 자신감의 비밀이라니, 쯧쯧. 시시한 인간 같으니! 그나저나 저런 인간을 위해 일평생 여기서 갇혀 살아야 한다니!’ (35쪽)


‘전쟁의 시대는 지나갔다. 저 사람들은 과거의 사람들이다. 하지만, 난 아니다.’ (52쪽)



  ‘전쟁하는 때’에 태어나서 군인이 되어야 한 사람들은 전쟁터에 끌려갈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들은 전쟁터에서 무기를 들고 ‘누군가를 죽이는 몸짓’이 익숙합니다. 이 일 말고는 달리 할 줄 아는 일이 없습니다. 게다가 무척 오랫동안 온 나라가 싸움판이었다면, 젊은 사내는 무엇을 할까요? 봄이 되어 흙을 갈아 씨앗을 심는 일을 할까요, 아니면 무기를 들고 훈련을 하는 일을 할까요?


  다만, 만화책 《젤리장수 다로》는 ‘무거운 사회비판’ 만화가 아닙니다. 《젤리장수 다로》는 바보스러운 사회에서 바보스러운 몸짓으로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언뜻선뜻 터져나오는 웃음을 가만히 잡아채는 만화입니다. 무엇보다도 ‘전쟁하는 쳇바퀴’에 길든 어른하고는 다르게 살겠노라 다짐하는 ‘내 삶을 새롭게 찾으려고 하는 어린이(또는 푸름이)’가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미자 씨는 지도 그리는 일을 진짜 좋아하는구나. 미자 씨 꿈은 금방 이루어지는 거라서 좋겠다.’ (93쪽)



  군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적군 잘 죽이기’입니다. 군인이 보람을 누릴 수 있는 일이란 ‘적군 많이 죽이기’입니다. 우리한테 적군이 될 저쪽 군인도 마찬가지예요. 서로서로 ‘너를 빨리 죽여’야 내 가슴에 훈장이 붙습니다. 서로서로 ‘너희를 많이 죽여’야 우리한테 평화가 찾아오는 줄 여깁니다.


  그런데 전쟁은 좀처럼 끝나려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서로 죽이고 죽여도 전쟁이 끝날 낌새가 안 보입니다. 전쟁이 커지면 커질수록 애꿎게 죽어야 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마련이기에, 이쪽과 저쪽은 서로서로 더 미워하고야 맙니다.


  전쟁은 평화로 나아갈 뜻이 없습니다. 전쟁은 언제나 더 오랫동안 사람들 마음속에 미움과 짜증과 앙갚음을 아로새기려 합니다. 이러는 동안 권력자는 높다란 걸상에 한갓지게 앉아서 온갖 권력을 누립니다.



“사람 친구를 먹다니, 그런 적은 없어요. 아직 친구랑 같이 여행 다녀 본 적이 없거든요.” “아직?” “그래서 여러분과 같이 여행을 떠난 것이 몹시 흥분되고 즐거워요.” “시끄러워, 시끄럽고! 아직이란 말은 그런 상황이 오면 사람 친구도 먹을 거란 말이냐? 엉?” “예? 그거야 불가피한 상황이 온다면야, 우리는 지도 그리는데 목숨을 걸고 있단 말이에요. 제가 먼저 죽으면 제 몸을 줄 거고, 반대로 친구가 먼저 죽으면 그 몸을 먹어서라도 살아갈 거예요.” (112∼113쪽)



  군인이 꿀 수 있는 꿈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남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루 빨리 전쟁이 끝나서 지긋지긋한 이 짓을 그만두기입니다. 군인을 부리는 권력자는 전쟁이 끝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전쟁이 이어져야 사람들을 전쟁터로 내몰면서 권력을 더 단단히 지키기 때문입니다. 어쩌다가 전쟁이 끝나더라도 사람들한테 ‘또 전쟁이 터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사람들 마음에 심어서 언제까지나 권력을 아주 단단히 지키려 합니다.


  그런데, 군인으로서 전쟁터에서 ‘내가 안 죽어’도 내 동무와 이웃과 한식구는 죽기 마련입니다. 군인으로 전쟁터에 끌려가서 ‘내가 안 죽어’도 끝없는 아픔과 슬픔을 언제까지나 짊어지고야 맙니다. 게다가, 전쟁이 끝나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군인이라 하더라도 고향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피비린내에 익숙한 사람이 흙내에 온몸을 비벼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인어국의 최고 형벌이 인간으로 변화시켜서 인간의 감옥에 유배시키는 거라고? 사형이 최고형이 아니네.” (133쪽)



  만화책 《젤리장수 다로》에는 젤리장수인 앳된 사내가 나옵니다. 앳된 사내는 젤리를 한몫 단단히 팔아서 하루 빨리 부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루 빨리 부자가 되어야 ‘권력자 밑에서 노예로 지내는 어머니’가 풀려나는 길을 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앳된 사내가 젤리를 팔려면 ‘인어 할아버지’를 옆에 끼어야 합니다. 젤리를 팔려고 가로질러야 하는 붉은닥세리는 아무나 가로지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만화책에서는 ‘평화와 전쟁’ 두 가지를 한몸에 품은 인어가 나오는데, 이 만화책에 나오는 인어는 ‘남을 죽이는 짓’을 아무한테나 하지 않습니다. 만화책에 나오는 인어 사회에서는 ‘목숨을 빼앗는 짓’은 가장 좋아하는 사람한테 하는 일이라고 나와요. 그리고, 가장 싫어하는 사람한테는 “너 미워.” 하고 내뱉는 한 마디가 가장 끔찍한 폭력이라고 합니다. 사람 사회 잣대로 보면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는 ‘인어 사회 잣대(만화책에 나오는 얼거리)’라 할 테지요.



“이것이 나의 정체다. 인어 중에 가장 못된 인어가 나다!” ‘정말 이게 사실이야? 사람을 미워하는 게 죄라니. 인어국은 귀여운 나라구나.’ (156쪽)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님이 있으면 ‘목숨을 빼앗아(죽여)서’ 고마움을 나타낸다고 하는 인어 할아버지를 옆에 끼고 붉은닥세리를 가로질러서 젤리를 신나게 팔아 부자가 되려는 만화책 주인공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앳된 주인공은 인어 할아버지가 ‘귀엽다’고 느껴서 더 잘해 주려고 하는데, 인어 할아버지는 앳된 주인공이 더없이 착하고 고마워서 ‘너처럼 멋지고 사랑스러운 사람은 죽여 주고 싶다’고 잠꼬대로 한 마디를 합니다.


  젤리장수 아이는 젤리를 팔아서 부자가 될 수 있을까요? 인어 할아버지는 저한테 따스한 젤리장수 아이를 죽일까요?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도를 그리겠다는 젊은 가시내는 지도를 다 그릴 수 있을까요? 참말 한 치 앞조차 내다볼 수 없는 삶이고, 이러한 삶을 김민희 님은 《젤리장수 다로》에 재미나면서 멋지게 잘 담았구나 싶습니다. 4348.8.18.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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