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자본주의를 껴안다 - 산촌자본주의, 가능한 대안인가 유토피아인가?
모타니 고스케 & NHK히로시마 취재팀 지음, 김영주 옮김 / 동아시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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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24



숲에서 사는 사람이 튼튼하고 아름답다

― 숲에서 자본주의를 껴안다

 모타니 고스케·NHK히로시마 취재팀 글

 김영주 옮김

 동아시아 펴냄, 2015.7.29. 15000원



  숲에서 바람이 붑니다. 숲에서 숲바람이 붑니다. 숲바람은 ‘숲을 이루는 나무’가 베푸는 바람입니다. 숲을 이루는 나무는 사람이 마실 바람이 되고, 사람뿐 아니라 풀벌레와 새와 들짐승이 마실 바람이 될 뿐 아니라, 깊디깊은 바닷속에서 사는 물고기가 마실 바람이 됩니다.


  공장에서 바람이 붑니다. 공장에서 공장바람이 붑니다. 공장바람은 ‘공장에서 뭔가를 만들면서 나오는 매연’입니다. 공장바람을 마시는 사람은 누구나 콜록거립니다. 공장바람을 마실 때마다 목이 막히거나 답답합니다. 공장바람이 휩쓸면 사람들은 재채기를 하거나 몸이 아픕니다.


  시골에서 바람이 붑니다. 한여름 들판에 농약을 뿌리니 농약바람이 붑니다. 시골에서는 시골바람이지만, 요즈음은 어느 시골이든 농약을 아주 신나게 뿌려대기 때문에, 어느 시골에서나 농약바람을 쐬어야 합니다. 시골에서 사는 사람도, 시골로 놀러온 관광객도, 다 함께 농약바람을 쐽니다.



“1960년대 전까지는 에너지는 전부 산에서 나왔습니다. 목탄 그리고 마른 잎사귀도 주워서 연료로 사용하고 있었으니까요. 그것을 일본 전체에서 실행하는 것은 무리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에너지의 일부를 목재로 해결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 과거 일본인에게 산은 소중한 재산이었다. 양질의 목재를 산출하고 땔감과 숯 등의 연료를 생산했다. (39, 47쪽)


“5월경의 잠들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러운 개구리 대합창이나 휘파람새 부부가 대여섯 쌍이나 있는 계곡, 무릉도원은 바로 이런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이런 산골은 희생되어 왔습니다. 그것은 얼마를 벌고 있다는 금전적인 잣대만으로 모든 것이 평가되어 왔기 때문이 아닐까요? 시골의 희생 위에서 도시의 번영이 이루어지는 그런 일방적인 구도로는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언젠가 한계가 드러나 버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53쪽)



  오늘 아침도 우리 마을에 농약바람이 붑니다. 농협에서 꾸리는 ‘무인 헬리콥터’가 이곳저곳에 뜨면서 농약을 뿌립니다. 그나마 아주 일찍, 새벽 여섯 시 언저리부터 농약을 뿌려대니, 아침에 이불을 빨아서 마당에 널 만합니다. 그런데 농약 헬리콥터가 다른 마을로 갔다가 다시 우리 마을로 돌아오면 부랴부랴 이불을 걷습니다. 농약바람을 맞는 이불을 덮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마을은 ‘친환경농업단지’였고, 친환경농업단지일 적에는 ‘친환경농약’을 뿌린다고 하면서도 면사무소에서 미리 마을방송을 했습니다. 몇 월 몇 일부터 며칠 동안 ‘항공방제’를 할 터이니, 이동안 창문을 꼭 닫고 장독 뚜껑을 반드시 덮으며 벌통을 막으라고 하지요. 항공방제를 할 동안 나들이를 삼가라고까지 말합니다. 친환경농약을 뿌릴 적에도 이렇게 여러모로 ‘피해를 입으니’ 방송을 했는데, 지난해부터 아무 방송을 안 하고 그냥 뿌립니다.


  그러면, 친환경농약이 아닌 ‘그냥 농약’은 어떠할까요? 친환경농약이 아닌 ‘그냥 농약’은 마을방송을 안 하고 뿌려도 괜찮을까요? ‘그냥 농약’을 뿌릴 적에는 창문을 안 닫아도 되거나 장독 뚜껑을 열어도 되거나 벌통을 안 막아도 될까요? ‘그냥 농약’을 뿌릴 적에는 나들이를 다녀도 되거나 이불을 널어도 될까요?



원자력발전소를 정지시킬 수는 없지만, 산촌에서는 전기에 의존하지 않는 생활이 가능하다. 그런 가치를 발견해 가는 것이 21세기의 산촌생활이다. (62쪽)


“매번 밥맛이 달라질지도 몰라서 신경을 써야 하는 것, 다양한 나무를 사용해 불을 지피는 것, 이런 것들을 불편하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부분이 즐겁습니다. 그렇게 해서 맛있는 밥이 완성되면 3배는 더 맛있는 겁니다. 이런 것을 사용하면서 웃음이 넘치는 에너지 절약이 가능한 것 아닐까요?” … 산을 연료의 공급원으로 삼는다면 무제한으로 연료를 얻을 수 있다. 산의 나무는 한 번 베어내도 다시 자란다. (50쪽)



  모타니 고스케 님하고 NHK히로시마 취재팀이 함께 글을 쓰고 엮은 《숲에서 자본주의를 껴안다》(동아시아,2015)를 읽습니다. ‘산촌에서 찾은 또 다른 자본주의’라는 이름이 붙은 《숲에서 자본주의를 껴안다》는 ‘돈만 앞세우는 자본주의’로는 일본 사회와 경제가 모두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들려줍니다. ‘돈 벌고 돈 쓰는 자본주의’로는 일본사람 누구나 꿈(희망)이 사라질 수밖에 없으니, 이제부터라도 ‘돈돈돈 자본주의’가 아닌 ‘새로운 삶’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의 양을 알고 있다면 자원을 유지하려고 노력할 테니까요. 우리들은 현재 산림의 전체량을 감소시키는 그런 벌채는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는가 하면, 숲이 성장한 만큼만 베는 겁니다.” (87쪽)



  돈과 돈과 돈을 외치는 자본주의가 아니라면 무엇이 있을까요? 《숲에서 자본주의를 껴안다》는 ‘산촌 자본주의’를 말합니다. 이 책에서는 ‘돈이 아닌 숲’에서 자본주의를 살리는 길을 밝히려고 합니다.


  자본주의가 말썽투성이라고 하면서 ‘자본주의’라는 껍데기를 내려놓지는 못 합니다. 아니, 자본주의가 아무리 말썽투성이인 줄 알아도 오늘날 도시에서는 자본주의를 내려놓을 수 없는 얼거리입니다.


  도시에서 사는 사람 가운데 손수 씨앗을 심어서 밥을 얻는 길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도시에서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 손수 나무를 심어서 열매를 얻는 길을 아는 아이가 몇이나 되나요?



당시의 마을 지도자들은 지역 외부에 지불하는 에너지 비용을 계산해 보았다. 그러자 매년 600만 유로나 되는 돈이 밖으로 흘러나가고 있었다. 이 돈의 흐름을 바꿔 지역 내부에서 순환시킨다면 마을은 좀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산촌자본주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대도시와 연결되어 빼앗기기만 하는 대상이었던 ‘지역’과 결별하고, 지역 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지역 내에서 해결하자는 운동이 바로 산촌자본주의이다. (96, 104쪽)



  오늘날 학교에서는 흙일을 하나도 안 가르칩니다. 교과서를 보셔요. 교과서는 ‘지식’을 다룰 뿐입니다. 교과서는 ‘흙일’도 ‘삶’도 ‘사랑’도 다루지 않아요. 교과서를 가르치는 어른도 흙일을 모를 뿐 아니라, 시골일을 모릅니다. 도시에 있는 학교뿐 아니라, 시골에 있는 학교에서도 어른(교사)들은 모내기와 벼베기를 모릅니다. 도시학교도 시골학교도 밭일이나 집일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시골학교도 도시학교도 꽃이랑 풀이랑 나무가 지구별에서 어떤 숨결인가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학교에서는 흙일이나 삶이나 사랑을 왜 안 가르칠까요? 교과서에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아이(학생)들은 학교를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지식을 머릿속에 많이 집어넣을 수 있으나, 흙일이나 삶이나 사랑은 배울 수 없습니다.


  교과서로 지식만 다루는 학교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길’을 다루지 않아요. 협동이나 민주나 평화 같은 이야기를 이론으로 다루기는 하지만, 정작 삶에서 ‘옆에 앉은 짝꿍’을 사랑하는 길은 보여줄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언제나 시험을 치러서 서로 경쟁하도록 내몰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돈일까? 그렇지 않으면 식량과 연료일까? 식량도 지하자원도 자급자족하지 못하는 일본에서는 지금까지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었다 … 한 번 더 묻겠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돈일까? 그렇지 않으면 식량과 연료일까? 착각해서는 안 된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물과 식량과 연료이다. (121, 124쪽)



  《숲에서 자본주의를 껴안다》라는 책은 “돈이 없어서 물물교환을 하는 것이 아니다. 즐겁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53쪽).” 같은 이야기처럼, 아이도 어른도 ‘돈’이 아닌 ‘즐거운 삶’을 찾자는 이야기를 다루려 합니다. 돈을 벌려고 하는 장사가 나쁘다는 소리가 아닌, 삶을 즐겁게 나누려고 하는 몸짓일 때에 웃음꽃이 피어난다는 이야기를 다루려 해요.


  생각해 보셔요. 아이들은 호텔밥을 먹어야 맛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신나게 뛰놀거나 노래하거나 떠들면서 밥을 먹을 때에 맛있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값비싼 장난감을 손에 쥐어야 즐겁다고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즐겁게 뛰놀’ 때에 즐겁다고 합니다.


  값비싼 장비를 갖추어야 사진을 잘 찍지 않습니다. 이름난 작가한테서 배워야 사진을 잘 찍지 않습니다. 대학교를 마치거나 유학을 다녀와야 사진을 잘 찍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이 스스로 고운 마음으로 삶을 즐겁게 누리면서 손가락을 단추에 가만히 얹으면 곱고 즐거운 사진이 태어납니다.



전국의 관광지를 찾는 사람들은 그 지역에서 난 식재료로 만든 요리를 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흙과 물은 물론 생산에 사용된 연료까지 지역산인 농산물, 조리에 사용된 에너지까지 지역산인 식사는 더 큰 부가가치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꿈은 더욱 커져 간다. (135쪽)


머니자본주의의 정도가 지나치면 인간이라는 존재까지도 돈으로 환산해 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됐다. 사람은 돈으로는 살 수 없다. 당신만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도 형제도 살 수 없다 … 사람은 누군가에게 “당신은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뿐이다. (159쪽)



  도시에서는 전기가 없으면 물을 못 마십니다. 먼먼 시골에 댐을 커다랗게 지어서 전기로 물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도시에서는 전기가 끊어지면 물이 바로 끊어집니다. 도시에서는 전기가 끊어지면 불을 못 켜는데, 햇빛이 스미지 않는 곳에 온갖 건물과 집과 가게가 많은 터라, 전기 없는 도시는 그야말로 ‘지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기가 끊어진 도시에서는 자동차도 멈춥니다. 왜 자동차가 멈출까요? 기름집에서 기름을 자동차에 넣으려면 전기로 기계를 돌려야 하니, 전기가 끊어지면 자동차도 기름을 채우지 못해요. 전기가 끊어지는 도시는 아파트나 높은 건물에서 아주 끔찍할 테지요. 여름에는 시멘트 건물이 찜통이 될 테고, 겨울에는 쇠붙이 건물이 얼음구덩이가 될 테지요.


  그야말로 도시는 핵발전소나 화력발전소를 시골에 커다랗게 지어서 우람한 송전탑을 잔뜩 박아서 잇는 얼거리를 마련하지 않으면 그예 무너집니다. 도시는 시골을 짓밟는(착취하는) 얼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얼거리인 도시에서 나고 자라는 아이들은 ‘남과 경쟁해서 이기는 길’을 ‘학교에서 길들면서 배워’야 합니다. ‘내가 살아남으’려면 ‘남을 밟고 서야’ 하니까요.


  맑은 물과 깨끗한 바람이 흐르지 않는 도시에서 ‘살아남자’고 하니까, ‘돈을 악착같이 더 많이’ 끌어모아서, ‘온갖 전기제품과 시설’을 갖추려고 합니다. 삶을 즐기려고 돈을 버는 도시가 아니라, 남을 밟고 올라서서 혼자 살아남자면서 악을 써야 하는 도시인 셈입니다.



소는 곡물은 전혀 먹지 않지만 젖이 나온다. 풀만 먹으니까 맛이 없을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마셔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맛이 진하다 … 스하마 씨가 팔고 있는 우유는 시판가격의 5배나 된다. 하지만 팔리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건강한 환경 속에서 자연 그대로의 사료를 먹은 소에서 짠 우유는 누구라도 마시고 싶을 것이다. (198, 200쪽)



  숲에서 사는 사람이 튼튼하고 아름답습니다. 나는 시골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살면서 이 대목을 날마다 새롭게 느낍니다. 숲에서 뛰놀면서 자라는 아이는 튼튼하고 아름답습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이나 일본 모두 고작 스무 해나 서른 해 앞서까지만 해도 아주 많은 아이들이 시골에서 숲을 껴안으면서 튼튼하고 아름답게 자랐습니다. 한국이나 일본 모두 고작 마흔 해나 쉰 해 앞서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아이들이 시골에서 숲을 노래하면서 튼튼하고 아름답게 자랐습니다.


  오늘날 한국이나 일본은 거의 모든 아이들이 숲을 모르는 채 시름시름 앓으면서 과외와 학원에 시달립니다. 오늘날 한국이나 일본은 거의 모든 어른들이 숲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아이들한테 ‘숲 그림책’이나 ‘숲 동화책’이나 ‘숲 인문책’을 읽히기만 합니다.


  숲을 숲으로 껴안지 않고 책으로 껴안을 수는 없습니다. 맑은 물은 코앞에 두고서 떠서 마셔야지, 맑은 물을 사진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깨끗한 바람은 온몸을 활짝 펴고서 마셔야지, 영화나 동영상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도쿄 같은 곳에서는 ‘정부가 나쁘다’라든지 ‘반드시 어떻게든 도와주지 않으면 곤란하다’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들이 시골의 품앗이라고 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사람의 힘을 나누는 것이다.” (242쪽)


그렇다. 젊은이들은 아직도 대도시의 매력에 이끌려, 또는 취직의 기회에 이끌려, 아니 어쩌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위로부터 세뇌당해서, 식량은 물론 물조차 자급할 수 없는 대도시권으로 몰려들고 있다. (307쪽)



  《숲에서 자본주의를 껴안다》를 조용히 덮습니다. 이 책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골고루 들려줍니다. 숲에서 살며 자본주의를 껴안는다고 할 적에는, 숲(시골)이 자본주의(도시)를 껴안는다는 이야기일 뿐 아니라, 숲(지구별)에서 자본주의(삶)가 아름답게 거듭나는 길을 찾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돈이 나쁘지 않아요. 돈을 다루는 꿍꿍이가 나쁠 뿐입니다. 아름답게 돈을 벌어서 아름답게 돈을 쓰는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파트를 나무로 야무지게 지을 수 있는 길을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에서는 벌써 찾아내어 널리 퍼뜨린다고 합니다. 나무로 지은 집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다고 합니다. 나무로 지은 집은 불에도 잘 견딜 뿐 아니라, 오래도록 튼튼하게 마을을 밝힌다고 해요.


  생각해 보셔요. 나무로 지은 집은 오백 해도 가고 천 해도 갑니다. 그렇지만 시멘트나 쇠붙이로 지은 집은 고작 백 해조차 못 가고, 쉰 해도 안 되어 허물어서 다시 지어야 하기 일쑤입니다.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 할까요? 쉰 해도 안 되어 쓰레기더미가 되는 시멘트 건물과 문명을 붙잡아야 할까요? 아니면, 오백 해나 천 해도 거뜬할 뿐 아니라, 오백 해나 천 해 뒤에는 땔감으로 쓸 수 있는데다가, 오백 해나 천 해 뒤에 우람하게 자란 나무로 새롭게 집을 지어서 ‘쓰레기 하나 없’이 ‘아름다운 삶’으로 피어나는 숲살이로 나아가야 할까요?


  맑은 물을 마시겠습니까, 아니면 화학약품으로 처리한 수도물을 마시겠습니까? 깨끗한 바람을 마시겠습니까, 아니면 배기가스와 매연과 방사능을 마시겠습니까? 4348.8.15.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숲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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