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이 인권에 답하다 철수와영희 강연집 모음
박경서 외 / 철수와영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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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23



전쟁무기와 핵발전소로는 인권을 못 지킨다

― 인문학이 인권에 답하다

 박경서, 김창남, 오인영, 조효제, 안수찬, 이상재, 김희수, 이찬수, 오창익

 철수와영희 펴냄, 2015.8.15. 15000원



  아침에 미역국을 끓입니다. 미역국은 우리 식구가 즐겁게 먹습니다. 저마다 제 국그릇에 미역국을 덜어서 맛나게 먹습니다. 더 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더 떠서 먹고, 배가 부르면 그만 먹습니다.


  미역국을 받는 아이들은 서로 종알종알 조잘조잘 노래를 부르듯이 놀면서 밥술을 비웁니다. 밥 한 술을 뜨면서 두 마디를 하고, 밥 한 술을 입에 넣으면서 세 가지 놀이를 하며, 밥 한 술을 씹어서 삼키는 사이에 이리 뛰고 저리 달립니다.


  아이들로서는 언제 어디에서나 놀이가 되니까, 밥상맡에서도 밥놀이입니다. 놀면서 크고, 놀면서 생각을 키우며, 놀면서 하루가 즐겁습니다. 아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치지 않고 뛰어놉니다. 이 아이들을 바라보면, 사람으로 태어나서 삶을 짓는 뜻이란 바로 웃음이랑 노래랑 이야기로구나 하고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인권의 도시 제네바는 다른 한편으로 환경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도시환경에 대한 관리가 치밀해요 … 우리나라의 보수세력들이 생각하듯이 인권이라는 게 북한을 압박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저는 인권에서만큼은 보수니 진보니 할 것 없이 손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1, 27쪽)


자본의 속성은 기본적으로 이윤추구예요. 그러다 보면 대중들의 입맛에 맞는 상품만 생산합니다. 획일화되지요. 우리가 TV를 켜면 10대들을 위한 노래만 흘러나온다고 불만을 털어놓지요. 10대들은 또 재미도 없는 막장드라마만 보느냐고 기성세대들을 비웃습니다. (84쪽)



  박경서 님을 비롯해 모두 아홉 사람이 함께 이야기꽃을 펼쳐서 묶은 《인문학이 인권에 답하다》(철수와영희,2015)를 읽습니다. 책이름처럼 ‘인권’을 다루는 책이고, 인권을 ‘인문학’으로 바라보려고 하는 책입니다.


  인권은 “사람 권리”나 “사람 된 권리”나 “사람다운 권리”를 가리킵니다. 사람으로서 누리거나 즐기는 권리란 “사람으로서 살 기쁨”이나 “사람답게 누릴 아름다움”이나 “사람이 되어 가꾸는 사랑”이라고 할 만해요.


  인문학은 “사람이 지은 삶”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사람이 지은 삶”은 말과 문학과 역사와 생각이라 할 테고, ‘인문학으로 인권을 바라본다’고 한다면, 사람으로서 이 땅에 지은 삶을 바탕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누릴 아름다움과 사랑을 바라보려고 한다는 뜻이리라 느낍니다.



한국에서는 4년제 대학 갓 졸업한 젊은이들이 언론사 시험 치고 기자가 됩니다. 그들은 언론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고, 한국 대학 교육의 특성상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대한 교양도 매우 부족합니다. 오직 논술과 작문의 글쓰기만 집중적으로 연습하여 기자가 됩니다. (171쪽)



  법에 적히기에 지켜 주어야 할 인권이 아닙니다. 법에 적히지 않아도 아끼고 보살필 수 있어야 할 인권입니다. 법에 적힌 만큼 지켜 주면 되는 인권이 아닙니다. 법에서 밝히지 않아도, 사람들 스스로 어깨동무하면서 아름다운 삶과 사랑스러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할 인권입니다.


  인권조례가 있어야 인권을 지킬까요? 아닙니다. 내가 나를 참다이 바라보면서 제대로 아낄 수 있어야 인권을 지킵니다. 네가 나를 꾸밈없이 바라보고, 내가 너를 스스럼없이 마주하면서, 기쁘게 어깨동무하는 자리에서 인권을 지킵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를 보면, 법에 적힌 인권을 제대로 지키는 일이 드물기도 하고, 법에 안 적힌 인권은 아예 안 쳐다보기까지 합니다. 함께 사는 이 땅을 헤아리기보다는 다툼과 경쟁으로 내모는 사회 얼거리입니다. 서로 돕는 이 터를 살피기보다는 저마다 밥그릇을 먼저 챙겨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다그치는 사회 틀입니다.



우리나라 빈곤층은 아르바이트, 계약직, 비정규직과 실업의 악순환을 벗어날 길이 없는 겁니다 … 국가가 부강해진다고 해서 알아서 국민들의 가난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게 역사적 교훈입니다. 우리가 요구해야 해요. 복지야말로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194, 196쪽)



  ‘서울’은 여러 ‘지방’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서울은 언제나 ‘서울’이기만 하면서, 이 나라에서 한복판이나 기둥으로 여기곤 합니다. 서울에 있어야 높이 여기기 일쑤이고, 서울에 있지 않으면 낮게 깎아내리기 마련입니다. 서울에서 살며 ‘서울 바깥’을 깎아내리기도 하지만, ‘서울 바깥’에서 사는 사람들 스스로 ‘서울 바깥’을 깎아내리곤 합니다.


  사람들은 자꾸 서울로 모이고, 시골이나 작은 도시는 차츰 줄어듭니다. 아무리 커다란 도시가 되어도 ‘서울이 아니’면 ‘안 된다’고 여겨 버릇하고, ‘서울 아닌 커다란 도시’ 둘레에서는 ‘서울로라도 못 가면 다른 큰 도시로라도’ 가야 한다고 여깁니다.


  이러한 흐름은 시골에서도 똑같습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제 고장이나 마을을 사랑하라는 마음을 배우기 어렵습니다. 신문도 방송도 인터넷도 책도 으레 ‘서울 이야기’입니다. 어쩌다가 서울 바깥 이야기가 나오면 ‘여행이나 관광’으로 ‘서울 바깥 이야기’를 다룰 뿐입니다. 한마을에서 즐겁게 뿌리내려 살아가는 사람들 수수한 이야기를 신문이나 방송이나 인터넷이나 책에서 거의 안 다루거나 제대로 못 다룰 뿐 아니라, 교과서에서도 이 대목을 못 짚습니다. 시골학교도 도시학교나 서울학교하고 똑같은 교과서를 쓰니, 시골학교를 다니더라도 ‘서울 교육’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시골에서는 서울을 으뜸으로 치고, 큰 도시를 버금으로 치며, 아무튼 시골을 떠나면 딸림으로 칩니다. 시골에 남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나마 읍내로 나가야 한다고 여기고, 읍내가 아니면 면소재지라도 가야 한다고 여깁니다. 이리하여, 시골에서 ‘여느 마을’에 남는 어린이나 젊은이는 거의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서울에서 일어나는 일은 좋든 싫든 시시콜콜 알게 되지만, 정작 내 삶의 터전에서 일어나는 일은 제대로 알 수 없는 불합리한 현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서울 중심주의는 오래전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이는 지역을 무시하는 서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서울만 바라보는’ 지역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 운이 좋아 서울로 간 친구들은 대학을 졸업해도 지역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서울에서 자리잡는 게 상식이에요. (206쪽)



  《인문학이 인권에 답하다》는 아홉 사람이 아홉 갈래 눈길로 인권을 바라보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법에 적힌 인권이 아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서 누리는 사람다운 삶을 바라보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법에서 다루든 안 다루든, 법을 알든 모르든,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나서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는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차근차근 짚습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두레나 품앗이나 울력은 아주 멋지고 아름다운 인권이라고 할 만합니다. 예부터 마을살이는 서로 아끼고 보살필 줄 아는 ‘인권사랑’이었다고 할 만합니다. 총이나 칼이 아니라 낫이랑 호미를 벼려서 흙을 일구는 사람은 흙을 아낄 뿐 아니라 ‘흙에 기대어 흙을 돌보는 사람’을 함께 아낍니다. 흙에서 나는 열매를 먹는 사람은 ‘흙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를 모두 아낄 뿐 아니라, ‘풀과 나무에 기대어 사는 모든 목숨’을 골고루 아낍니다.


  인권이란 언제나 평등이면서 평화입니다. 평등하지 않은 인권은 없습니다. 평화롭지 않은 인권은 없습니다. 사랑스럽지 않은 인권은 없고, 아름답지 않은 인권은 없습니다. 나한테만 도움이 될 인권이 아니라, 나와 너 모두한테 도움이 되면서, 풀과 새와 바람과 햇볕한테도 함께 도움이 될 인권입니다.



국가보안법은 역사적 기원을 봐도 그 성격을 알 수 있어요. 일제강점기 때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가져다 베낀 겁니다. 치안유지법이라는 게 천왕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 자를 반역자로 처벌한다는 내용이에요. 그러니까 당시에 독립운동을 하거나 일제강점에 반대하는 사람은 죄다 범법자가 되는 거였어요. (243쪽)



  통일과 평화를 바란다면 ‘통일법’이나 ‘평화법’이 있어야 합니다. ‘국가보안법’이나 ‘치안유지법’ 따위가 아닙니다. 미사일이나 탱크로는 평화를 지키지 않습니다. 오직 평화로운 손길과 마음일 때에 평화를 지킵니다. 괭이로 흙을 갈고, 호미로 흙을 다지며, 낫으로 풀을 베는 손길일 때에 평화를 나눕니다.


  밥 한 그릇을 함께 먹는 사람이 평화를 지키거나 나눕니다. 총부리를 겨누는 사람은 평화를 지키지도 않고 나누지도 않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어른한테서 이 대목을 배워야 합니다. 얘야,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주먹을 흔들거나 발길질을 한다면 평화로울까, 아니면 서로 빙그레 웃고 어깨동무를 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놀 때에 평화로울까? 아이들은 곧 알 테지요. 인권이나 인문학이라는 말은 몰라도, 아이들은 평화로운 사랑과 아름다운 삶을 알 테지요.



후쿠시마에서 원전사고가 나지 않았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봤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가장 큰 피해자는 누가 뭐래도 후쿠시마 지역 주민이고요. 그런데 이 지역에 원전이 들어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일본 주요 대도시에 전기를 제공하기 위해서잖아요. 결과적으로 다수를 위해 지역의 소수자가 희생하게 된 겁니다.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강정, 신고리원전의 전기를 실어 나를 송전탑이 지어지는 밀양 지역도 마찬가지입니다. (305쪽)



  일본 후쿠시마에서 터진 핵발전소 때문에 후쿠시마에서 살던 사람은 거의 다 죽었고, 후쿠시마는 이제 아주 오랫동안 ‘버려진 땅’이 되어야 합니다.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가 터졌으니 ‘도쿄사람(서울사람)’은 걱정이 덜 하다고 할 텐데, 참말 도쿄사람은 걱정이 덜 할까요? 도쿄사람은 도쿄에서 핵발전소가 안 터져서 가슴을 쓸어내릴 만할까요? 도쿄가 아닌 ‘일본 다른 이웃’이 핵발전소 때문에 죽고 사라졌어도 걱정이 없을까요?


  인권과 평화라고 한다면, 해군기지는 강정에도 인천에도 속초에도 부산에도 들어설 수 없습니다. 인권과 평화라고 한다면, 송전탑은 밀양에도 청도에도 대전에도 서울에도 들어설 수 없습니다. 참말 어디에 해군기지나 송전탑을 때려지어야 할까요? 참말 어디에 군부대를 들이거나 전투기와 잠수함과 핵무기 따위를 거느려야 할까요?


  아무 곳도 없습니다. 해군기지가 들어서야 할 자리는 아무 데도 없습니다. 송전탑이나 핵발전소가 들어서야 할 자리는 아무 데도 없습니다.


  이제는 전쟁무기가 아닌 평화로운 손길로 사람다운 삶(인권)을 지키는 길을 생각하고 찾아야 합니다. 이제는 대량소비와 대량생산을 되풀이하는 자본주의 대량발전이 아닌, 지역발전과 깨끗한 발전과 아름다운 삶(평화)을 가꾸는 전기를 살피고 헤아려야 합니다.


  《인문학이 인권에 답하다》는 인권이 묻는 말에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문학을 다룹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대통령이나 정치꾼이나 지식인도 이야기를 해야 할 테지만, 다른 사람더러 이야기를 하라고 맡기거나 떠넘기지 말고, 여느 아이들하고 살아가는 여느 어버이요 어른인 우리 스스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인권은 무엇이고, 인권을 가꾸는 길은 무엇이며, 인권을 사랑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하루가 무엇인지, 바로 우리 스스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4348.8.11.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청소년 인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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