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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의 소리 9
라가와 마리모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527
‘농약바람 헬리콥터’와 ‘노래하는 마음’
― 순백의 소리 9
라가와 마리모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5.2.25.
요 며칠 사이에 마을에서 개구리 노랫소리가 끊어졌다고 느꼈습니다. 얼추 열흘 남짓 됩니다. 왜 개구리 노랫소리가 끊어졌는지 아리송했는데, 어제 낮에 수수께끼를 풉니다. 해마다 이맘때, 그러니까 칠월 한복판이면 온 마을에 농약뿌리기가 한창입니다. 벼포기가 무럭무럭 자라는 이즈음에 다른 풀이 돋지 못하게 하려는 생각에다가, 메로(멸구)가 들지 말라면서 농약을 뿌립니다.
요즈음은 시골에서 할매와 할배가 손수 농약을 뿌리는 일이 드뭅니다. 날이 갈수록 할매와 할배는 나이가 드는 터라, 손수 농약을 뿌리고 싶어도 못 뿌리기 일쑤예요.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시골 할매와 할배는 농협에 돈을 내고 헬리콥터를 빌립니다. 농협 공무원은 무인 헬리콥터에 농약을 그득 실어 논배미에 띄워요. 무인 헬리콥터는 온 마을 논을 두루 날아다니면서 농약을 뿌립니다.
‘민요주점에 있는 민요 가사책에, 전국의 노래 대략 700곡이 실려 있다. 그것도 널리 알려진 노래만 싣기 때문에 실제로는 더 많다. 할당량은 하루 두 곡. 외울 것.’ (6쪽)
“너, 호흡을 주고받을 생각이 있는 거니? 노래꾼의 개성을, 죽이지 말아야지.” (40쪽)
농약바람이 부는 요즈막 시골마을에는 소리가 없습니다. 농약바람이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울려퍼지는 요즈막 시골마을에는 노래가 없습니다. 개구리도 풀벌레도 농약바람이 부는 동안에 쥐죽은듯이 고요합니다. 아니, 아뭇소리를 못 냅니다.
농약 헬리콥터 여러 대가 이 마을 저 마을 떠다니면서 농약을 날릴 적에는, 들판에 농협 공무원을 빼고는 아무도 안 돌아다닙니다. 그야말로 쥐죽은듯한 시골 여름이요, 우리 집 아이들은 바깥에서 뛰놀지 못하고, 우리 식구는 자전거 나들이도 다니지 못합니다.
참말 쥐죽은듯이 고요한 시골마을에서 《순백의 소리》(학산문화사,2015) 아홉째 권을 읽으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소리와 노래와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소리와 노래가 잠들어 버리는 삶터란 무엇인가 하고 돌아봅니다.
“8년 동안 쌓아 온 지식을, 1주일밖에 안 된 녀석한테 쉽게 줄 수야 있나.” (24쪽)
“손님과 내가 주는 거야. 네 연주에 대한 대가라고. 기쁘지 않냐?” “…….” “저기 말야.” “예?” “호흡을 맞춘다는 건, 원치 않는 방향으로 교정된다는 건지도 몰라. 그건.” “그건?” “그때가 돼 보지 않으면 모르지.” (87∼88쪽)
“난 있지, 네 행동 하나하나가 놀랍지만, 진심이다 싶어 감탄했고, 뒤처진 것 같아 조바심이 났어. 그러니까 내 진심의 결실도 봐 주렴.” (109쪽)
농약바람이 휘몰아치는 낮에 자전거에 두 아이를 태우고 마실을 갑니다. 오늘 꼭 우체국에 가서 부쳐야 할 소포가 있습니다. 안 갈 수 없는 노릇입니다. 아이들한테 비옷을 입힐까 하다가 그냥 갑니다. 날이 워낙 더워서, 비옷을 걸치고 자전거를 달리면 아이들은 온몸이 땀범벅이 되겠구나 싶어요.
농약 헬리콥터가 없겠거니 싶은 길로 돌아서 가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코앞에 농약 헬리콥터가 농약을 촤아악 뿌립니다. 농협 공무원은 농약 헬리콥터를 낮게 띄워서 뿌리는데, 우리 자전거를 보더니 길 오른쪽으로 가라고 합니다. 속으로 웃음이 납니다. 자전거야 아주 마땅히 길 오른쪽으로 가지요. 그런데 바람이 길 오른쪽으로 부는데 어찌해야 할까요.
두 해 앞서까지는 농협에서 농약 헬리콥터를 띄울 적에 며칠 앞서부터 면내방송을 했습니다. 지난해부터는 면사무소에서 ‘농약 헬리콥터가 뜬다’는 방송을 안 합니다. 농약 헬리콥터가 뜰 적에는 장독 뚜껑을 모두 닫고, 창문도 닫으며, 외출을 삼가라고 방송을 해요. 하늘에서 헬리콥터가 이리저리 날면서 온갖 곳에 농약을 뿌리니 한여름에 집안에 박혀서 문을 죄다 닫고 숨을 죽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화책 《순백의 소리》를 가만히 헤아립니다. 노랫가락을 온몸으로 익혀서 온마음을 터뜨리듯이 들려주려고 하는 아이들은 언제나 구슬땀을 흘립니다. 악기 하나를 켜는데 그야말로 땀범벅이 됩니다. 영화 〈나인틴 헌드레드〉를 보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배에서만 지내던 ‘나인틴 헌드레드’가 ‘재즈의 아버지’라는 사람하고 피아노 겨루기를 할 적에 어마어마하게 땀을 쏟으면서 놀라운 연주를 선보입니다. 악기를 켜거나 다루는 사람이 흘리는 땀이란, 노랫가락에 싣는 온사랑이라고 할 만합니다.
‘소리가 모두를 이끌고, 흥을 돋우고, 즐겁게 하며, 축제다.’ (70쪽)
‘이야기가 소리를 필요로 하고, 소리가 이야기를 필요로 하며, 조개처럼 합이 맞는다. 말의 호흡, 소리의 타이밍, 그것이 맞아떨어져 하나가 된다.’ (133쪽)
커다란 소포를 수레에 싣고 우체국으로 달리는데, 농약 헬리콥터가 바로 옆에서 나란히 납니다. 농협 공무원은 ‘아이 태운 자전거’가 지나가더라도 ‘농약 뿌리기’를 10초나 1분조차 멈추지 않습니다. 안내방송조차 없이 헬리콥터로 농약을 뿌려대니, 이 시골마을에서 볼일 보러 다니는 사람한테 마음을 쓸 겨를이 없으리라 느낍니다.
나는 농약을 온몸으로 쏴악 얻어맞습니다. 눈이 매우 따갑습니다. 두 아이를 태우고 자전거를 모는데, 눈이 따갑더라도 눈을 감거나 손으로 가리면 그만 고꾸라질 수 있습니다. 뒤에 앉은 아이들더러 “눈 감아!” 하고 외친 뒤에 눈을 부릅뜨고 자전거 발판을 세게 구릅니다. 마음속으로 ‘괜찮아, 괜찮아, 지나가는 바람이야.’ 하고 생각합니다. 이 외침말 빼고는 아뭇소리도 나한테 안 들립니다.
한참 달려서 농약 헬리콥터한테서 벗어나고 나서야 겨우 숨을 돌립니다. 참새도 제비도 가뭇없이 사라진 들판입니다. 개구리도 왜가리도 숨을 죽이는 들녘입니다. 아무래도 지난 열흘 사이에 엄청난 농약을 들마다 듬뿍 뿌렸으니, 개구리가 거의 다 죽었을는지 모르겠구나 싶습니다. 이즈음에 새끼한테 먹이를 물어다 나르는 제비는 어떠할는지 걱정스럽습니다만, 제비도 사람들이 농약을 뿌리는 줄 알 테니, 농약이 없는 깊은 숲으로 깃들어서 먹이를 찾을까요.
“‘우메조노’에서 다른 사람의 힘과, 소리에 승패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더. 지금 ‘타케노하나’에서, 돈을 벌려면 손님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는 ‘잘하고 못하는’ 것 이전에, ‘좋고 싫은’ 것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더.” (157쪽)
“솔직히 재능만 보면, 너는 여기의 누구보다도 위야. 그러니까, 기술을 배울 생각은 하지 마라. 배워야 할 건, 폭넓게 바라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이야.” (168쪽)
만화책 《순백의 소리》에서 악기를 켜는 아이들은 빼어난 손놀림만 보여주지 않습니다. 갓난쟁이였을 적부터 노랫소리를 듣고 자랐으니, 또 갓난쟁이였을 무렵부터 악기를 만지며 놀았으니, 이 아이들 손놀림은 참으로 훌륭하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노래는 손재주로 들려줄 수 없습니다. 노래는 오롯이 ‘마음 울림’입니다. 마음을 건드리려고 켜는 노래요, 마음을 북돋우려고 들려주는 노래이며, 마음을 어루만지려고 나누는 노래입니다. 그러니, 악기를 켜는 사람은 ‘손놀림’보다 ‘마음’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없이 켜는 노래에는 ‘들을 만한 기쁨’이 없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쓰는 글도 이와 같다고 느낍니다. 마음이 없이 쓰는 글에 어떤 노래가 흐를 수 있을까요? 또, 마음이 없이 그리는 그림에, 마음이 없이 찍는 사진에, 마음이 없이 읊는 말에, 마음이 없이 짓는 밥에, 마음이 없이 세우는 아파트나 송전탑에 어떤 기쁨이나 노래가 흐를 만할까요?
저녁이 흐르고 밤이 되니 빗줄기가 굵어집니다. 어제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뿌린 농약이 이 빗물을 타고 스러지려나요. 이 비가 그치면 부디 개구리도 풀벌레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 씩씩하고 힘차게 노래를 다시 부를 수 있기를 빕니다. 아름다운 시골마을 한여름에 맑고 사랑스러운 노랫가락이 새롭게 울려퍼질 수 있기를 꿈꿉니다. 4348.7.23.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