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초 밥상
이상권 지음, 이영균 사진 / 다산책방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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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75



풀밥 먹고 꽃밥 먹는 시골살이

― 야생초 밥상

 이상권 글

 이영균 사진

 다산책방 펴냄, 2015.7.3. 13000원



  전남 고흥 도화면 동백마을에 깃든 조그마한 우리 집에서는 요즈음 쇠무릎잎을 즐겁게 뜯어서 먹습니다. 밥을 지을 적에는 모시잎을 훑어서 잘게 썬 뒤에 섞어 모시밥을 먹습니다. 고들빼기잎이랑 쇠무릎잎은 풀무침을 해서 먹기도 하고, 날로 먹기도 하며, 고기를 익히거나 구울 적에 잔뜩 넣어서 먹기도 합니다.


  어성초꽃이 지는 요즈막에는 까마중 흰꽃도 함께 피고 지면서 조그마한 풋알이 맺힙니다. 소리쟁이는 붉으죽죽 마르면서 씨앗을 맺고, 오월까지 흐드러지던 유채꽃이랑 갓꽃은 꽃대와 줄기까지 모조리 녹아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아주까리잎이 펑퍼짐하게 퍼지고, 잘 자란 쑥은 곧 꽃을 피울 듯합니다. 환삼덩굴이랑 사광이아재비풀이 나무를 타고 오르려 하고, 호박꽃이 피며, 감알도 무화과알도 탱글탱글 익으려 합니다. 조그마한 모과꽃에서 맺히는 모과알은 어찌나 굵은지 나뭇가지가 찢어질 듯 대롱대롱 매달립니다.


  이른봄부터 신나게 뜯어먹던 정구지는 이제 쓴맛이 짙어서 볶음을 할 적에만 뜯습니다. 봄에 고맙게 먹던 민들레잎도 어느덧 거의 자취를 감추고, 별꽃나물은 시듭니다. 꽃이 진 돌나물은 씩씩하게 더 넓게 퍼지려 하고, 살이 통통하게 오르는 비름나물은 틈틈이 꺾어서 고맙게 누립니다.  



어슬어슬 땅거미가 깔리면 여인들은 일어나서 자신들이 솎아 놓은 보리순을 망태기에 담아서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마당에다 망태기를 엎어 놓고는 보리순을 칼로 다듬어서 국을 끓인다. 그러니까 보릿국을 끓여먹기 위해 일부러 보리순을 캐지는 않았다. (22쪽)


“아이고 말도 마라. 뿌리 끝 이파리가 붙어 있는 곳에 까만 때가 붙어 있어서, 그것을 손톱으로 긁어내면서 다듬는 일이 아주 힘들어. 이파리가 붙어 있는 부분을 조각조각 뜯어내고 까만 때를 벗겨내야만 먹을 수가 있거든. 냉이를 캐서 씻는 것도 성가신 일이지만 솔구쟁이 캐서 씻는 일하고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30∼31쪽)



  봄에는 봄풀을 먹습니다. 여름에는 여름풀을 먹습니다. 가을에는 가을풀을 먹고, 겨울에는 겨울풀을 먹어요. 겨울에 무슨 풀을 먹느냐 물을 수 있을 텐데, 늦가을부터 봄까지꽃이랑 갓이랑 유채가 스멀스멀 싹이 돋아요. 한겨울에도 유채풀이랑 갓풀을 누릴 수 있습니다. 겨울이 채 끝나지 않을 무렵부터 쑥하고 냉이를 누립니다.


  이상권 님이 글을 쓰고 이영균 님이 사진을 찍은 《야생초 밥상》(다산책방,2015)을 읽습니다. 책이름에 붙은 ‘야생초(野生草)는 ‘야초(野草)’라는 한자말처럼 일본사람이 즐겨 쓰는 낱말입니다. 일본에서는 이밖에도 ‘산초(山草)’나 ‘산야초(山野草)’ 같은 한자말을 즐겨 써요. 그러면 한국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할까요? 들에서 나는 풀이면 ‘들풀’이라 합니다. 산(메)에서 나는 풀이면 ‘멧풀’이라 합니다. 그래서, 들에서 뜯는 풀 가운데 즐겁게 먹는 풀은 ‘들나물’이라 하고, 산(메)에서 뜯는 풀 가운데 즐겁게 먹는 풀은 ‘멧나물(산나물)’이라 합니다. “야생초 밥상”은 들에서 나는 풀을 뜯어서 차리는 밥상인 만큼, “풀 밥상”이나 “들풀 밥상”이나 “들나물 밥상”인 셈입니다.



우리는 천천해 해당화꽃밥을 입안에다 밀어넣고, 그 모든 향과 맛을 음미하듯이 천천히 씹었다. 내게는 옛날 생각까지 더해져서 그 맛과 향이 더 깊게 배어들었다. (68쪽)


“어린 풀도 씹을 만하네요. 진짜 쓴맛은 하나도 없고 온통 풀냄새뿐이네요. 이걸로 국을 끓이면 무슨 맛이 날까? 맛은 몰라도 국물 색깔은 기가 막히겠네요.” (89쪽)




  풀은 어디에서나 돋습니다. 풀은 시멘트나 아스팔트 틈바구니를 뚫고 돋기도 합니다. 이러한 풀을 바라보면서 참말로 억세다고들 하지만, 풀로서는 시멘트와 아스팔트한테 모질게 짓밟히거나 짓눌리면서도 ‘꿈을 잃지 않’기에 씩씩하게 돋을 수 있습니다. 현대 문명이 도시와 시골을 가리지 않고 흙바닥을 단단히 눌러서 다진 뒤 시멘트랑 아스팔트를 들이붓더라도, 조그마한 풀씨는 흙 기운을 찾아나서면서 뿌리를 내리려 해요.


  시인 김수영 님이 풀을 노래하기도 했습니다만, 풀은 시골사람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임금님하고 양반한테 짓눌리면서 살아온 수수한 사람이 시골사람이요, 성곽을 쌓거나 병졸로 끌려가는 사람이 시골사람입니다. 궁궐에서 심부름꾼이나 종이 되어야 하는 사람이 시골사람입니다.


  시골사람은 풀처럼 씩씩합니다. 시골사람을 풀을 먹으면서 풀빛 같은 마음입니다. 시골사람은 풀을 뜯고 풀을 손질하며 풀을 다루는 동안, 어느새 온몸이 풀물이 들고, 풀내음이 가득합니다.


  사람도 풀을 먹고 짐승도 풀을 먹습니다. 더욱이 벌레도 풀을 먹습니다. 게다가 겨울이 되어 온누리가 차갑게 얼어붙으면, 풀은 시들어 죽으면서 흙으로 돌아가요. 봄부터 가을까지 지구별 모든 목숨붙이를 먹여 살리던 풀은, 겨우내 새로운 흙으로 거듭납니다. 풀이 겨우내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땅(흙)에 새롭게 씨앗을 심어서 거둘 수 있어요.



“곰밤부리야 사방에 천지에 깔렸으니까. 게다가 고것은 비료도 안 주고 농약도 안 주고 한마디로 농사꾼들이 신경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는 풀이니까, 고걸 뜯어다 나물로 하면 우리도 좋지요. 우리야 저런 것 먹고 컸지만 요새 사람들이 어디 그러요?” (112∼113쪽)


“제가 새팥 깍지를 따면 이 동네 어르신들도 다 저보고 손가락질하고 그래요. 제 친구들도 몇 와서 보더니, 왜 이렇게 힘들게 사냐고 하기도 해요. 전 힘들지 않아요. 이게 좋아요. 남들 보기에는 심란해 보이기도 할 것이고, 야생콩이나 풀뿌리 캐먹고 백년 천년 살 거냐고 비웃기도 하지만, 제가 오래 살려고 이러는 건 아닙니다.” (129쪽)




  풀밥은 풀을 뜯어서 지은 밥이요, 지구별 뭍을 두루 덮은 풀내음을 담은 밥입니다. 풀 한 포기에서 꽃이 피면, 이 꽃을 갈무리해서 꽃밥을 짓기도 합니다. 꽃밥은 풀꽃밥이요, 지구별 모든 목숨붙이한테 기쁨과 웃음을 베푸는 사랑스러운 꽃내음을 실은 밥입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는 풀이랑 꽃이랑 알(열매)을 골고루 먹습니다. 맨 처음에는 새싹을 먹어요. 다음으로 풀잎이랑 풀줄기를 먹습니다. 어느덧 풀알(풀열매, 곡식)을 먹고, 나중에는 풀뿌리를 먹습니다. 풀 한 포기를 모조리 골고루 먹어요.


  사람은 모든 풀을 다 먹지 못합니다. 사람이 못 먹고 남은 풀은 겨우내 삭으면서 까무잡잡한 새로운 흙이 되고, 새로운 흙은 온누리를 기름지게 바꾸어 주어요.


  더 생각해 보면, 풀이 돋는 땅이기에 비가 와도 흙이 쓸리지 않습니다. 풀이 돋는 땅이기에 사막이 안 됩니다. 풀이 돋는 땅이기에 싱그러운 풀내음이 가득한 바람이 붑니다. 풀이 돋아 풀밭이 되기에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만하고, 풀밭이 우거지기에 풀짐승이 고요히 깃들 만하며, 풀밭이 예쁘장하기에 사람들이 숲집을 짓고 숲살림을 기쁘게 건사합니다.


  이야기책 《야생초 밥상》은 바로 이 대목을 들려주려고 합니다. 먼먼 옛날부터 모든 시골사람이 저마다 제 고장에서 제철 풀을 뜯고 누리던 삶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눈부신 풀이나, 돋보이는 풀이나, 빼어난 풀이나, 대단한 풀이나, 놀라운 풀이나, 엄청난 풀을 알려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시골사람이면 누구나 흔하게 먹으면서 널리 사랑하던 풀을 함께 나누려고 하는 마음을 밝히려고 합니다. 너랑 나랑 함께 먹고, 오순도순 같이 먹으면서 노래를 부르는 삶을 글로 남기려고 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뱀밥이 맛있는 나물이라는 것은 다 알았지만, 너무 손이 많이 가서 잘 해먹지 않았어. 옛날에는 시골이 늘 바빠서 한가롭게 반찬 할 틈이 없었거든. 그래서 손쉽게 뜯어다 살짝 데쳐서 무쳐먹는 나물을 가장 많이 먹을 수밖에 없었어.” (193쪽)


구량배미 할매는 닳아질 대로 닳아진 손톱으로 그 무시무시한 마름 껍질을 까서 아이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었다. “야, 맛있다! 밤 맛이다!” “아니, 깨금(개암) 맛이다!” 아이들은 신기한 표정을 지으면서 마름을 씹어먹었다. (249쪽)




  《야생초 밥상》이라는 책에서 글을 쓴 이상권 님은 이녁이 어릴 적부터 듣고 보고 겪은 즐거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책에 사진을 찍은 이영균 님은 ‘글로만 읽을 적’에는 요즈음 도시사람이 제대로 헤아리거나 살피기 어려운 모습을 멋스럽게 되살려서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보리, 소리쟁이, 원추리, 점나도나물, 해당화, 광대나물, 뚝새풀, 조팝나무, 별꽃, 새팥, 댑싸리, 옥매듭, 쇠무릎, 피, 쇠뜨기, 무릇 같은 풀이랑 꽃을 맛나게 먹는 삶을 읽으면서 가만히 생각합니다. 이상권 님이 책에서도 쓰듯이 ‘별꽃나물’을 전라도에서 ‘곰밤부리’라고도 합니다. 이상권 님이 ‘새팥’이라고 하는 아이는 전남 고흥에서는 ‘돌콩’이라고 합니다. 돌콩이 익는 철이면 바지런한 할매는 돌콩밭을 찾아가서 광주리를 채우고, 우리 아이들도 돌콩깍지를 하나씩 손에 쥐고는 주머니에 넣습니다. 돌콩깍지를 살살 쥐어 주머니에 빨리 넣지 않으면 깍지가 탁 소리를 크게 내면서 터집니다. 이러면 돌콩이 이곳저곳으로 흩어져서 못 주워요.


  푸짐한 풀밥상을 《야생초 밥상》이라는 책으로 만나면서 우리 집 밥상도 한결 푸르게 북돋우자고 생각합니다. 넉넉한 꽃밥상을 《야생초 밥상》이라는 책으로 마주하면서 우리 집 밥차림도 더욱 싱그러이 가꾸자고 생각합니다.


  풀 한 포기가 햇볕이랑 빗물이랑 햇볕을 먹으면서 흙에 뿌리를 내리면서 싱그럽습니다. 풀 두 포기가 멧새 노랫소리랑 개구리 노랫소리랑 풀벌레 노랫소리를 듣고 자라면서 해맑습니다. 풀 세 포기가 아이들 손길을 타면서 까르르 웃습니다. 풀 네 포기가 내 눈길을 받고 내 마음길하고 이어지면서 즐거이 춤을 춥니다.


  풀밥을 먹고 풀노래를 부르면서 풀사람이 됩니다. 풀밥상을 차리고 풀사랑을 나누면서 풀꿈을 키웁니다. 온누리 모든 사람들이 텃밭이랑 마당을 누리면서 손수 밥상을 차릴 수 있기를 빌어요. 지구별 누구나 텃밭하고 마당에서 예쁜 삶을 짓는 슬기로운 생각을 빛낼 수 있기를 빌어요. 4348.7.8.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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