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도 익혀야지

 (1086) 푸르다/파랗다 (푸른 하늘, 파란 들)


 푸른 하늘 은하수

→ 파란 하늘 은하수

→ 파란 하늘 미리내



  한국사람은 ‘푸르다’하고 ‘파랗다’를 제대로 갈라서 볼 수 없는 눈길일까요? 아니면, ‘푸르다’하고 ‘파랗다’를 섞어서 써도 될까요? 영어로 ‘green’을 ‘파랑’으로 옮기는 일은 없을 테고, ‘blue’를 ‘풀빛’으로 옮기는 일도 없으리라 봅니다. 너른 바다를 보면 파란 빛깔이 ‘쪽빛’이랑 닮았다고 여기는데, 바닷말이 잔뜩 끼는 날에는 바닷물 빛깔이 ‘푸르게’ 보입니다. “푸른 바다”가 되는 철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나, 너른 바다는 으레 ‘파랑’으로 가리키는 빛깔입니다. 〈미래 소년 코난〉이라는 만화영화에 나오는 “푸른 바다 저 멀리”는, 어느 때에는 “푸른 바다”일 수도 있으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파란 바다 저 멀리”처럼 바로잡아야 알맞습니다.


  뻘이 있는 바다는 뻘흙빛이 섞여서 누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이때에 바다는 “누런 바다”입니다. 바닷속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물빛이 달라지는 셈입니다. 하늘도 노을이 질 적에는 “노란 하늘”이 되다가 “붉은 하늘”이 되다가 “보라 하늘”이 되기도 합니다. 언제나 한 가지 모습이나 빛깔로만 있지 않아요. 다만, 늘 이런저런 모습이나 빛깔로 바뀌더라도 ‘바탕빛’을 헤아릴 적에는 “파란 하늘”하고 “푸른 들”입니다.


[2015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푸르다 : 1. 맑은 가을 하늘이나 깊은 바다, 풀의 빛깔과 같이 밝고 선명하다 2. 곡식이나 열매 따위가 아직 덜 익은 상태에 있다

파랗다 : 1. 맑은 가을 하늘이나 깊은 바다, 새싹과 같이 밝고 선명하게 푸르다 2. 춥거나 겁에 질려 얼굴이나 입술 따위가 푸르께하다


[1940년, 문세영 조선어사전]

푸르다 : 1. 갠 하늘 빛 같다 2. 무성한 나무 잎의 빛과 같다

파랗다 : 진하게 푸르다


[1957년, 한글학회 큰사전]

푸르다 : 무지개의 다섯째 빛과 같다. 하늘빛이나 풀빛이나 쪽빛과 같다

파랗다 : 매우 푸르다


  세 가지 한국말사전을 보니, 1940년대나 1950년대에 ‘푸르다’하고 ‘파랗다’를 똑똑히 가르지 않습니다. ‘푸르다’를 “진하게 푸르다”나 “매우 푸르다”로 풀이하지만, 진하게 푸르거나 매우 푸른 모습은 ‘짙푸르다’로 적어야 올바릅니다. 파란 빛깔이 짙다면 ‘새파랗다’고 합니다. 게다가 무지개 빛깔을 헤아릴 적에 ‘빨주노초파남보’라 하니까, 다섯째 빛은 ‘파랑’이니, 1957년 《큰사전》은 ‘풀빛(푸르다)’을 엉뚱하게 풀이했다고까지 할 만합니다.


 파란 들

→ 푸른 들


  모든 말은 맨 처음에 숲(시골)에서 태어났기에 ‘푸르다’도 숲에서 바라본 빛깔을 나타냅니다. 요즈음에는 ‘푸르다’ 뜻풀이에 “곡식이나 열매가 덜 익은 모습”을 가리킨다고 덧붙이는데, ‘푸른’ 빛깔은 바로 ‘풀’ 빛깔이면서 ‘덜 익은 열매(알)’ 빛깔입니다. 그래서 ‘풋능금’이나 ‘풋감’이라 합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나오듯이 ‘파랗다’는 “파랗게 질리다” 같은 자리에 씁니다. 핏기가 사라지면서 춥거나 아프거나 무섭다고 느끼는 ‘파랑’은 풀 빛깔하고 동떨어집니다.


  시골에서 들이랑 숲이랑 하늘이랑 냇물이랑 바다를 늘 마주하면서 살면, ‘푸르다’하고 ‘파랗다’를 헷갈려서 쓸 일이 없습니다. 들빛과 풀빛을 보면, 봄부터 ‘푸른’ 싹이 여리게 돋아서 여름에 짙게 우거지고, 가을에 누렇게 익거나 시들면서 겨우내 흙으로 돌아갑니다. 맑은 하늘이 파랗고, 싱그러운 냇물이 하늘빛을 담아서 파랗습니다. 이제라도 한겨레 빛깔말을 똑똑히 갈라서 제대로 쓸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4348.6.29.달.ㅅㄴㄹ



하늘이 푸른빛으로 보이는 이유는

→ 하늘이 파란빛으로 보이는 까닭은

《피터 에디/임지원 옮김-공기, 신비롭고 위험한》(반니,2015) 34쪽


※ 덜 익은 열매를 가라킬 적에는 ‘풋-(푸른)’을 붙입니다. ‘풋능금·풋사과·풋감·풋콩·풋고추’처럼 쓰는데, ‘풋김치·풋나물’처럼 쓰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깊이 무르익지 못한 모습을 놓고도 ‘풋-’을 붙여서 ‘풋내기’라 하고, 아직 깊지 않은 모습을 나타내면서 ‘풋사랑’이나 ‘풋잠’처럼 쓰기도 합니다. 그러니, 글이나 노래가 여물지 않으면 ‘풋글·풋노래’처럼 쓸 수 있습니다. 사람한테는 ‘풋사람’이나 ‘풋기자’나 ‘풋학자’나 ‘풋가수’나 ‘풋작가’ 같은 이름을 재미나게 쓸 수 있어요.


  덜 익은 포도를 ‘청포도’라 하지만 ‘풋포도’로 고쳐야 올바릅니다. ‘靑’은 “푸를 청”으로 읽지만 ‘파랑’을 가리키는 자리에 쓰는 한자입니다. 덜 익은 포도는 ‘파란’ 빛깔이 아닌 ‘푸른’ 빛깔입니다. 덜 익었으나 덜 익은 맛도 즐기려는 뜻에서 ‘풋포도’를 먹습니다. 그런데, 다 익은 포도인데 푸른 빛깔일 수 있어요. “잘 익어서 푸른 빛깔인 포도”라면, 이때에는 ‘푸른포도’라 하면 됩니다.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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