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논객 한윤형
나는 한윤형 님 글을 읽은 일이 없다. 내가 ‘진보가 아니’기 때문도 아니고, ‘ㅈㅈㄷ을 좋아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저 내 눈길이 한윤형 님 글에 가지 않았고, 내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즐거움이 있다고 느끼지 않았다. ‘한윤형 데이트 폭력’이나 ‘한윤형 사과글’도 따로 읽지 않는다. 무슨 소리인가 어리둥절했고, 이런 일이 왜 생기는가 하고 알쏭달쏭했다.
낮에 손빨래를 하며 문득 생각에 잠긴다. 폭력이란 무엇일까? 폭력을 일으키는 쪽은 거의 다 ‘사내(남자)’이고, ‘폭력을 일으키는 사내(남자)’는 거의 다 힘(권력)이 있다. 사내가 거머쥔 힘은 ‘주먹힘’이랑 ‘발힘(발길질을 하는 힘)’을 비롯해서 ‘이름값 힘’에다가 ‘돈힘’이 있다. 요즈음은 여기에다가 ‘사회권력’이나 ‘정치권력’이나 ‘교회권력’이라는 힘이 있다.
아무튼, 한윤형 님이 ‘글을 안 쓰겠다(절필)’고 밝힌 듯하다. 낯부끄러워서라도 글을 쓸 수 없을 테며, 낯부끄러운 짓이 뒤늦게 밝혀졌는데 이런 사람 글을 실어 줄 만한 매체가 선뜻 나오기도 어려울 노릇이리라 본다. 그러면, 한윤형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자리에서 가만히 돌아본다. 아이들하고 복닥이다가 아이들을 나무라거나 아이들한테 빽 소리를 지르고는 스스로 내가 몹시 밉거나 싫어서 아플 때가 있다. 여린 아이들을 나무란들, 또 빽 소리를 지른들, 아이들이 ‘말을 잘 듣게 해’서 도무지 나한테 뭐가 좋을는지 알 수 없으나, 아이와 지내면서 곧잘 이런 바보짓을 하면서 참말 스스로 바보가 된다.
바보짓을 하나하나 되새기면서 밥을 짓고 빨래를 한다. 바보짓을 삭이면서 비질을 하고 걸레질을 한다. 바보짓을 낱낱이 돌아보면서 나무를 쓰다듬고 풀을 뜯는다. 그리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되찾아서 자장노래를 부르며 아이들을 재운다. 아이들을 다그친 날은 어김없이 ‘아이들이 잠들고 나’서 눈물이 뚝뚝 듣는다.
한윤형 님 같은 이들이 ‘진보논객’ 같은 허울좋은 이름은 모두 내려놓을 수 있기를 빈다. 신경숙 님 같은 이들도 ‘작가’ 같은 허울좋은 이름은 모조리 내다버릴 수 있기를 빈다. 도시를 떠나서 시골로 가고, 시골에서 텃밭을 일구고 나무를 심으면서 적어도 몇 해쯤 ‘참말 글 한 줄 안 쓰고 책 한 줄 안 읽는’ 삶을 보내 보기를 바란다. 나중에 ‘참으로 글을 안 쓰고 못 배기겠다’ 싶다면, 다른 글은 쓰지 말고 ‘시골에서 손수 씨앗을 심고 돌보면서 곡식이랑 열매를 거두는 이야기’하고 ‘숲에서 바람이 구름을 날리면서 들려주는 노랫소리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마음이 온몸에 깃들지 못하기에 폭력을 저지른다. 아름다운 마음을 배우지 못했기에 그만 폭력을 일삼는다. 사과글로는 폭력을 씻지 못한다. 삶을 새롭게 가다듬어야 비로소 ‘사랑’을 가슴에 담을 수 있다. 사랑을 가슴에 담으려면 ‘참회록 쓰기’ 같은 일보다는 ‘씨앗 심기’와 ‘나무 어루만지기’와 ‘숲바람 쐬기’가 가장 걸맞고 알맞으리라 본다. 이제 나는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나들이를 다녀와야겠다. 4348.6.28.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람과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