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책을 읽었더라면 - 디자인 평론가 최범이 읽어주는 고전 10선
최범 지음 / 안그라픽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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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90



사람을 사랑하는 ‘그 책’을 바로 오늘 읽자

― 그때 그 책을 읽었더라면

 최범 글

 안그라픽스 펴냄, 2015.6.1.



  하싼 화티라는 분이 쓴 《이집트 구르나 마을 이야기》(열화당,1988)라는 책이 있습니다. 나는 이 책을 1994년에 처음 알아본 뒤 매우 크게 놀랐습니다. 집짓기(건축)를 바라보는 눈길이 이러할 수 있구나 싶어서 몹시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이 책을 읽던 무렵 나는 외국말(네덜란드말)을 배우는 사람이었는데, 둘레에서 내가 손에 쥔 책을 보더니 ‘네가 왜 그런 책을 읽니?’ 하고 핀잔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답게 사는 길을 배우지 않으면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부질없으니까.’ 하고 짧게 대꾸했습니다.


  브루노 무나리라는 분이 쓴 《예술로서의 디자인》(일지사,1976)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나는 이 책을 1999년 언저리에 처음 보았습니다. 예술이나 디자인하고 얽힌 일을 하지 않았으나 어쩐지 눈길이 끌렸습니다. 이 책은 예술하고 삶은 동떨어지 않았음을 밝히고, 디자인은 언제나 삶을 가꾸는 길로 나아가도록 도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보기 좋도록 꾸미는 일이 예술이나 디자인이 아님을, 사람들이 저마다 삶을 사랑하도록 이끄는 손길이 예술이나 디자인임을 이 책을 읽으면서 배웠습니다.



한국 디자인을 지배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이러한 구호이다. 한국의 현대 디자인은 출발부터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이라는 위로부터의 목표에 강력하게 종속되었다. 그리하여 디자인은 우리 삶의 환경을 쾌적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선한 도구’가 되지 못하고 국가에 의해 ‘동원된 도구’가 되어 버렸다 … 주료 디자인은 무엇인가. 현대 디자인의 주류는 당연히 소비주의 디자인이다. 소비주의 디자인은 현대 소비 사회 시스템의 일부로서 생산과 소비를 매개하며 소비적 가치를 추구한다. (11, 157쪽)



  야나기 무네요시 님이 쓴 《공예문화》(신구문화사,1976)를 읽을 적에는 그릇 한 점을 빚어서 쓰는 마음을 새롭게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릇뿐 아니라 수저 한 벌도, 옷 한 벌도, 신 한 켤레도, 싸리비랑 대바구니도 새삼스레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먼 옛날부터 고이 쓰던 살림뿐 아니라 오늘 이곳에서 누구나 흔히 쓰는 살림을 찬찬히 아끼면서 건사하는 손길로 일으키는 아름다운 삶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빅터 파파넥 님이 쓴 《인간을 위한 디자인》(미진사,1986)을 읽을 무렵, 둘레에서 저더러 ‘디자인을 하는 대학교에 갈 생각이느냐?’ 하고 묻기도 했습니다. 이때에 빙그레 웃으면서 ‘나는 내 살림을 아직 정갈히 건사하지 못하지만, 내 살림부터 정갈하면서 알차게 건사하는 길을 배우려고 이 책을 읽어요.’ 하고 대꾸했습니다.


  《이집트 구르나 마을 이야기》도 《예술로서의 디자인》도 《공예문화》도 《인간을 위한 디자인》도 모두 ‘건축이나 디자인을 다루는 책’이 아닌 ‘삶을 사랑으로 바라보는 책’이라고 느껴서 곁에 두고 읽었습니다.



우리는 로스를 가리켜 ‘망치를 든 건축가’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그는 서구 건축사에서 누구보다도 더 낡은 건축을 부수는 데 열정을 바친 사람이기 때문이다 … 이성과 과학의 근대 서양 문명은 결코 동양 문명보다 우월하지 않다는 것. 유리와 전기의 문명은 종이와 등불의 문명보다 아름답지 않다는 것. 지금은 비록 너희 서양 문명에게 압도당하고 있지만 우리 전통을 버릴 수는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근대 아시아의 맹주로서 일본이 발명한 동양의 모습이기도 하다. (23, 81쪽)



  최범 님이 빚은 이야기책 《그때 그 책을 읽었더라면》(안그라픽스,2015)을 읽습니다. 디자인평론을 하는 최범 님은 디자인하고 얽힌 ‘오래된 책’ 가운데 열 권을 골라서 이녁 마음을 움직이거나 건드린 대목을 되짚습니다. 오래된 책에서 오늘날 삶을 밝히는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오래된 책이 앞으로 오래도록 이 지구별에서 아름다운 숨결을 북돋우도록 사람들 생각을 건드리는 대목을 헤아립니다.



야나기가 찬탄한 조선 공예품은 그저 작위적인 느낌이 나지 않는, 솜씨를 드러내거나 다투고자 하지 않은, 마치 저절로 빚어진 것 같은 하찮은 물건이었다. 그럼에도 감동을 주는 이러한 작품을 설명할, 서구 미학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미학이 필요함을 야나기는 절감했다. 그렇게 조선 예술을 이해하고자 한 노력의 결실이 바로 민예론이다 … 그는 천재의 미술 대신 일상의 공예를, 귀족공예 대신 민중공예를 찬양했다. (94∼95, 96쪽)



  그때 그 책을 읽었더라면 우리는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었을까요? 아마 조금 더 슬기롭게 바꿀 만하리라 느낍니다. 그러면, 오늘 그 책을 읽는다면 우리는 삶을 어떻게 바꿀 만할까요? 이제까지 좀 어수룩하거나 어설프게 살림을 꾸렸다고 하더라도, 바로 오늘 이 자리부터 새로운 마음이 되어서 즐겁고 아름답게 삶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때 꼭 그 책을 읽어야 하지는 않습니다. 그때 그 책을 읽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가슴속에 아름다운 꿈을 품지는 않아요. 오늘 그 책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바로 오늘부터 마음속에 사랑스러운 꿈을 담지는 않습니다.


  고전명작을 반드시 읽어야 하지는 않습니다. 고전명작을 젊은 날에 일찌감치 읽어야 하지는 않습니다. 고전명작은 누구한테나 ‘때가 되면’ 찾아옵니다. 아니, 누구나 ‘스스로 때를 알아채어’ 고전명작에 손을 뻗습니다. 삶을 손수 가꾸거나 꾸리거나 일구거나 짓고자 하는 뜻이 설 적에 비로소 고전명작을 읽을 만합니다.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하는 삶이 아닌, 저마다 스스로 즐겁게 살려는 뜻으로 새길을 열려고 할 적에 바야흐로 고전명작이 눈에 뜨이기 마련입니다.



파파넥이 말하는 ‘현실 세계’란 무엇인가. 이미 이야기했듯 그는 오늘날 디자인이 소비주의를 위해 봉사하며 ‘어른들을 위한 장난감’을 만들어낸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디자인은 비윤리적이며 또 반환경적이다. 그가 비판하는 것은 윤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환경 문제와도 커다란 관련이 있다 … 파파넥은 소비사회의 현실을 현실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가짜 현실이다. (158, 159쪽)



  디자인하고 얽힌 ‘오래된 책(고전명작)’은 열 권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때 그 책을 읽었더라면》은 딱 열 권으로 추린 고전명작을 가만히 보여주면서, 다른 수많은 아름다운 책으로 사람들이 스스로 손길이랑 눈길이랑 마음길을 뻗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책 한 권을 읽든 책 만 권을 읽든, ‘고이는’ 지식이 아니라 ‘흐르는’ 슬기가 되어 아름다운 넋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책끝에는 야나기 무네요시 님과 픽터 파파넥 님을 둘러싼 ‘사회의식’ 이야기를 붙입니다. 어떤 고정관념이나 편견이나 선입관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열린 마음이 되어 두 사람을 바라볼 때에, 우리가 이 나라에서 새로운 디자인과 생각과 슬기와 삶과 살림을 지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가 진정 물어야 할 것은 야나기가 우리를 사랑했는가가 아니라,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의 민중사랑, 민예사랑, 주체성이 왜 우리 근대사에서는 발견되지 않는가. 왜 식민지 조선과 이후 한국은 반민족적·반민중적 세력에 의해 지배되었는가. (224쪽)



  내가 나를 사랑할 때에 내 삶을 스스로 엽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할 때에 우리 삶을 손수 짓습니다. 꼭 민중사랑이나 민예사랑이나 주체성 같은 이름을 안 붙여도 됩니다. ‘삶사랑’이어도 되고 ‘삶’이나 ‘사랑’이어도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흙을 파서 질그릇을 빚는 마음을 헤아립니다. 풀줄기에서 실을 얻어 물레를 잣고 베틀을 밟은 뒤 바느질을 해서 옷을 깁는 마음을 헤아립니다. 나무를 베고 손질하고 말려서 기둥과 서까래와 들보로 얹고는 집을 짓는 마음을 헤아립니다.


  먼 옛날부터 모든 사람은 시골사람이었고 흙사람이었으며 숲사람이었습니다. 먼 옛날부터 누구나 손수 집이랑 옷이랑 밥을 지을 줄 알았습니다. 따로 대학교나 대학원을 다니지 않았어도, 먼 옛날부터 어떤 사람이든 집·옷·밥을 손수 지어서 누렸습니다. 건축학을 알아야 짓는 집이 아니라, 사람들 누구나 손수 짓는 집이었어요. 디자인을 알아야 빚는 질그릇이 아니고, 호미나 괭이나 낫이 아닙니다. 삶과 살림을 알고 사랑하기에 누구나 손수 질그릇을 빚고 호미나 괭이나 낫을 갈았어요.


  그때 그 책은 바로 오늘 읽으면 됩니다. 고전명작이라는 책도 읽고, 삶이라는 책하고 사랑이라는 책도 읽습니다. 바람이라는 책하고 비와 눈과 풀과 나무라는 책도 읽습니다. 4348.6.16.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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