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귀족 3 세미콜론 코믹스
아라카와 히로무 글.그림, 김동욱 옮김 / 세미콜론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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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17



백성이자 귀족인 시골사람

― 백성귀족 3

 아라카와 히로무 글·그림

 김동욱 옮김

 세미콜론 펴냄, 2014.6.23.



  하얀 종이를 바른 나무문 가득 하얀 빛이 스며들면 새벽입니다. 동이 트는 빛입니다. 유월을 앞둔 시골은 다섯 시 즈음이면 어느새 바깥이 밝습니다. 그리고, 다섯 시 언저리는 들마다 ‘일하는 목소리와 몸짓’이 가득합니다. 바야흐로 일철이요, 일철에는 시골에서 누구나 새벽 네 시부터 하루를 엽니다. 새벽 네 시부터 하루를 열어 아침 여덟 시에 일손을 쉽니다. 그러고는 다시 일손을 잡고는 열두 시까지 일손을 놀립니다. 낮밥을 먹고 한숨을 돌리면 햇볕이 뜨거워, 이제 들판에서 일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일거리가 많은 곳만 한낮에도 일합니다.


  햇볕이 누그러지는 네 시 즈음 다시 들판이 북적입니다. 저물녘에 하루 일을 마무리짓고 일찌감치 저녁을 들면, 어느새 마을은 고요합니다. 해가 지기 무섭게 집집마다 잠이 듭니다. 그야말로 일찍 깨어서 그야말로 일찍 잠드는 하루입니다.



- “왜 쪼그려앉는 동작들만 그렇게 안정감 만점인 거죠?” “왕년에 농사를 좀 지었거든요! 1년 365일 늘 쪼그려앉아 지냈기 때문에!” (3∼4쪽)

- “우리 집안 너희 할머니가 좀 엄한 분이셨어야지. 며느리한테 집안일부터 바깥일까지 다 시키시더라니까.” “옛날엔 그게 일반적이었나 봐요?” “뭐, 확실히 뭐든지 다 하는 분이셨지. 전쟁이 끝난 뒤 우리 집에 자전거를 들이니까 당장 연습해서 타고 다니시지 않나. 트랙터를 들이니까 운전을 배워서 타고 다니시지 않나! 환갑이 다 된 노인네가 글쎄!” (5∼6쪽)




  아라카와 히로무 님이 빚은 만화책 《백성귀족》(세미콜론,2014) 셋째 권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시골사람으로 태어나서 언제나 시골일을 하면서 자란 삶을 만화로 담은 《백성귀족》입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랐으니 수수한 삶(백성)이라 할 만한데, 도시로 나와서 여러 가지 일을 겪어 보니까 시골에서 늘 누린 하루는 무척 놀랍도록 엄청나기도 했구나(귀족) 하고 여기면서 그리는 만화입니다.


  이를테면, 시골에서는 ‘돈’이 나올 길은 없어도 ‘먹을거리’는 늘 넉넉합니다. 우리 집에 넉넉한 것을 이웃집에 주면, 이웃집에서는 이웃집에 넉넉한 것을 우리 집에 줍니다. 끝없이 주고받습니다. 도시에서는 매우 값지거나 비싼 먹을거리로 여기지만, 시골에서는 그저 흔하거나 너른 먹을거리입니다. 시골에서 어린 나날과 푸른 나날을 보내면서 ‘밥값’을 생각한 적이 없고, 도시로 나가서 혼자 살기 앞서까지 ‘감자나 고구마나 배추를 사다 먹는다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기에, 남새 값이 얼마나 하는지 몰랐다는 아라카와 히로무 님입니다. ‘먹는 데’에 돈을 쓴 적이 없다 보니, 도시에서 ‘먹는 데에 돈을 많이 써야 하는 살림’을 겪으면서, 시골살이는 백성이면서 귀족이었네 하고 깨닫습니다.



- “무한의 물물교환! 갓 딴 백합 뿌리로 쑨 백합 단팥죽도 꿀맛이죠!” “꿀맛 정도가 아니라 백합 뿌리면 엄청 고급 재료잖아요? 백성의 탈을 쓴 귀족 같으니.” “어머나, 그랬나? 백합 뿌리 같은 건 우리 집에서는 그냥 냄비째 식탁에 올라오는데. 멜론 같은 건 너무 먹어서 물리네. 오호호.” (26쪽)

- “가족 경영으로 이 정도 선에서 대충 수지를 맞추고 있지요. 아니 뭐, 젖소에게 무리가 안 가는 정도로만 젖을 짜는 만큼 생산성이 낮은 점도 감안해야 하지만요. 흉작이거나 큰 기계가 망가진 해에는 재정난이. 고로 우린 이런 귀족! 앞은 호화찬란, 뒤는 빈털터리. 특정 식품 관련해서만 특권 계급이라니까요!” (70쪽)




  도시에서는 어느 고장 마늘이 맛나다거나 어느 고장 고추가 좋다거나 하고 따집니다. 그렇지만 시골에서는 ‘우리 집’에서 거둔 마늘이나 고추가 가장 맛납니다. 유기농이나 자연농이나 친환경을 따지기 앞서 ‘우리 집’ 감자나 고구마가 가장 맛납니다.


  수수께끼라고 할 만하면서도, 이 수수께끼는 아주 쉬워요. 내가 손수 흙을 갈고 살찌우고 보듬고 북돋우면서 돌본 먹을거리는 언제나 내 입맛에 찰싹 달라붙으면서 맛있습니다. 내 품과 땀을 들여서 가꾼 먹을거리는 참말로 언제나 내 몸을 일으키면서 사랑스레 어루만집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얼마 앞서까지 한국사람뿐 아니라 지구별 모든 나라에서 거의 모든 살림집이 ‘홀로서기(자급자족)’를 했어요. 지구별 모든 나라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손수 집을 짓고 옷을 기우며 밥을 지었습니다. 아주 마땅히 ‘내 보금자리’에서 밥과 옷과 집이 척척 나왔어요. 온 식구가 둘러앉아 밥 한 그릇을 나누었고, 기쁘게 웃고 노래하는 삶을 누렸어요.



- “아라카와 선생님은 고향 집에 계실 때부터 만화를 그리셨죠? 그런 스케줄로 어떻게 만화를 그리는 게 가능했어요?” “아, 만화를 그릴 짬을 어떻게 내냔 말씀이죠? 간단해요. 아주. 안 자면 되지롱!” (57∼58쪽)

- “꽃을 보고 있으면 와 예쁘네 하고 행복한 기분은 들지만, 왠지 기막힐 정도로 품종 같은 건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니까요!” “왜 그럴까요?” “진지하게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 본 결과, 먹을 수 없는 거니까, 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79쪽)




  만화책 《백성귀족》은 시골살이를 재미나게 들려줍니다. 시골살이가 더 낫다고 말하지 않고, 시골살이가 괴롭다고 따지지 않습니다. 시골에서는 ‘쉬는 날’이 없습니다. 집짐승이 하루를 굶는다거나 밭에 심은 남새를 하루라도 안 돌보아도 될 날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겨울이 되어 눈이 소복히 덮여야 비로소 일손을 쉬지만, 이때에도 집짐승을 건사해야 합니다. 겨우내 연장을 손질하고 아이들한테 옛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백성귀족》을 그린 분은 어릴 적부터 하루 내내 일하던 삶에 익숙했기에 도시에서 부업 자리를 찾을 적에 아주 쉬웠다고 합니다. 참말 그럴 만합니다. 공장이나 회사에서는 하루 여덟 시간 노동이나 여섯 시간 노동을 말하지만, 시골에서는 하루 열네 시간 노동도 아무렇지 않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쁜 일철에는 거의 잠을 못 이루면서 일하기도 합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이란 아예 없습니다.


  이리하여, 시골사람은 일하고 또 일하는 백성입니다. 오로지 일만 하고 다시 일만 하는 백성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을 하고 나서 샛밥을 먹거나 주전부리를 누릴 적에는 늘 멋진 밥잔치가 됩니다. 밥상만 놓고 본다면 어엿한 귀족입니다.



- “고등학교 졸업할 나이가 되면 젊은이들을 강제로 농촌에 보내 한 2년쯤 농업에 종사하게 하는 게 어떨까요?” “이웃나라의 징병제 같은 건가요 … 농업에 아무 관심 없는 쥐뿔도 모르는 젊은 애들이 매년 매 시즌마다 농촌에 우르르 몰려오고, 그런 걸 매번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 이제 겨우 농사일 좀 시킬 만하겠다 싶을 대쯤 되면 다시 도회지로 돌아가 버리고, 또 다른 젊은 애들이 몰려와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부터 반복해야 하고, 소젖 같은 건 초보자가 짰다간 눈 깜짝할 새 유방 트러블이 생겨 생산량이 떨어지기 십상이고 …….” (81. 83쪽)




  문득 우리 집을 돌아봅니다. 우리 집에서 노는 아이들은 여러 이웃이 물려준 장난감을 갖고 놀기도 하지만, 마당에서 대나무 작대기를 휘두르거나 나비를 좇거나 꽃을 따기도 합니다. 위층이나 아래층이 따로 없이 마당이 있는 시골집이기에, 집에서도 마당에서도 고샅에서도 거리낌없이 쿵쿵 콩콩 뛰고 달립니다.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릅니다. 흙투성이가 되어 뒹굴어도 즐겁고, 마을 어귀 빨래터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즐깁니다. 자전거를 달리거나 군내버스를 타고 가볍게 바닷마실을 합니다.


  시골에는 학원도 없고(읍내에 가면 있습니다만), 극장도 없으며, 놀이공원이나 백화점이나 상가나 이런저런 문화시설도 편의시설도 없습니다. 그러니, 시골사람은 언제나 백성입니다.


  어느 모로 보면 ‘문화와 동떨어진’ 삶입니다. 그렇지만, 시골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나 마음껏 노래하거나 춤출 수 있습니다. 뜀뛰기도 달리기도 홀가분하지만, 꽃하고 풀하고 나무를 넉넉히 누립니다. 눈 닿는 곳은 숲이요 멧골이요 들이요 바다입니다. 밤마다 별빛이 쏟아지고, 낮에는 하늘이 새파랗습니다. 온갖 멧새와 들새가 하루 내내 노래합니다. 한밤에는 개구리가 노래잔치를 베풀어 주어 포근하게 잠듭니다. 여름이 다가오면 개구리 노랫소리 사이에 풀벌레 노랫소리가 섞입니다.


  어느 모로 보면, 시골은 ‘숲에 둘러싸인’ 삶입니다. 그러니까 도시는 ‘숲하고 동떨어거나 바다와 동떨어지거나 별빛이나 무지개와 동떨어진’ 삶입니다.




- 호박의 생명력을 본 어머니가 한마디. “살겠다고 기를 쓰는 얘네 생명력을 보고 있으면, 일부 채식주의자들이 말하는 ‘동물과 달리 식물은 자기 의사가 없으니까 먹어도 된다.’라는 얘기가 꼭 궤변 같지 않니.” (99쪽)



  밭에서 부추 한 줌을 고맙게 뜯어서 먹습니다. 민들레잎이랑 고들빼기잎을 고맙게 한 줌씩 뜯어서 먹습니다. 돌나물을 꽃 달린 아이까지 고맙게 훑어서 먹습니다. 굵고 짙푸르게 익는 매화알을 건사하고, 들딸기를 누리며, 감꽃을 줍습니다. 모두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다운 숨결입니다.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다운 숨결을 내 몸에 맞아들이니, 나는 언제나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시골에서는 시골바람을 쐬면서 사랑스럽습니다. 도시에서는 도시바람을 쐬면서 아름답습니다. 바람은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싱그럽게 붑니다. 햇볕은 시골하고 도시를 골고루 비춥니다. 비는 시골에도 도시에도 똑같이 내립니다.


  웃고 노래하면서 일하는 백성은, 웃고 노래하면서 밥잔치를 누리는 귀족입니다. 춤추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백성은, 춤과 이야기꽃으로 하루를 새롭게 짓는 귀족입니다. 만화책 《백성귀족》을 읽으면서 ‘백성이자 귀족인 시골사람’을 떠올리고, ‘귀족이자 백성인 도시사람’을 그립니다. 4348.5.27.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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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ejhm 2015-05-27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특한 책이네요..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ㅎ

숲노래 2015-05-27 14:09   좋아요 0 | URL
강철 연금술사를 그린 분이 빚은
아주 재미난 만화랍니다.
아이들도 함께 볼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