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도 말해도
카츠타 번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515



잘해야 하는 말이 아니니까

― 말해도 말해도

 카츠타 번 그림

 사토 타카코 글

 시리얼 펴냄, 2011.6.25.



  나는 혀짤배기입니다. 혀가 짧아서 잘 못 내는 소리가 있습니다. 조금만 빨리 말하거나 서둘러 말하려고 하면 혀가 꼬이기 마련이고, 말을 곧잘 더듬습니다. 내가 어릴 적에 둘레에서는 이런 내 말투를 듣고 웃거나 놀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럴 때면 나는 얼굴이 벌개져서 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웃거나 말거나 놀리거나 말거나 대수롭지 않은 노릇이지만, 다른 사람 눈치를 볼 일이 없다는 대목을 깨닫기까지 꽤 오랜 나날이 걸렸습니다.


  말을 더듬든 걸음걸이가 엉성하든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군가는 글씨가 엉성합니다. 누군가는 글을 잘 못 씁니다. 누군가는 밥을 잘 못 짓습니다. 누군가는 낫질을 잘 못 합니다. 누군가는 자동차를 못 몰고, 누군가는 자전거를 못 탑니다. 그런데, 이 모두 다 아무렇지 않아요. 그저 그럴 뿐입니다.




- “좀더 하나를 깊이 파야 해. 내가 한 걸 똑같이 따라하면 어쩌겠다는 거야? 연구를 안 하잖아. 자네는 머리가 나빠. 나 흉내내기도 아니고, 그러면 안 되잖아?” (11쪽)

- “그 아저씨는 그저 입을 놀렸을 뿐이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가 아니었어.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나왔던 거라고!” (16쪽)



  사토 타카코 님이 쓴 글에 카츠타 번 님이 그림을 입힌 만화책 《말해도 말해도》(시리얼,2011)를 읽습니다. ‘라쿠코’라고 하는 ‘일본 전통 만담극’이 있다고 합니다. 이 일본 전통 만담극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만화책입니다. 먼저 소설로 나온 책이 있고, 이 소설은 영화로도 나왔습니다. 만화책은 맨 나중에 나옵니다. 소설과 영화를 알맞게 갈무리하면서 만화답게 새로운 숨결을 담아서 새로운 눈길로 보여줍니다.


  일본에서는 ‘전통 만담극’을 예나 이제나 꾸준하게 잇는다고 할 만합니다. 한국에서는 ‘전통 이야기마당’으로 무엇이 있을까요? 판소리가 있다고 할 만할까요? 그러면, 판소리를 여느 날 스스럼없이 들을 만한 무대가 있을까요? 농악이나 사물놀이를 여느 날 얼마든지 듣거나 즐길 만한 자리가 있을까요?




- ‘나도 여자애한테 늘 이런 것은 아니다. 이부코 씨는 특별하다. 한심할 정도로 말이 뜻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 녀석들은 언제나 이런 감정을 품고 있는 걸까.’ (31쪽)

- “젊은이는 말을 더듬나? 흐응, 그렇구만.” “그게 어쨌다는 거죠?” “응, 재미로 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재미로 하면 안 되나요?” “안 되지, 난 진지하거든,” “그거야 아저씨 사정이죠! 잘난 척하지 말아요. 야구선수인지 뭔지 모르지만 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요.” “뭐라고?” “대개는 라쿠고를 재미로 배워요. 하지만 여기에 오는 사람은 모두 사연이 있어요. 다들 인생을 걸었다고요.” (38∼39쪽)



  ‘라쿠코’를 여덟 해째 배우는 젊은이가 있습니다. 여덟 해째 배우지만 도무지 솜씨가 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한테 이 사람 저 사람이 찾아와서 ‘라쿠코’를 배우겠다고 합니다. 젊은이는 제 솜씨를 키우거나 갈고닦지 못해서 헤매는데, 그만 ‘제자’라고 해야 할는지 ‘문하생’이라고 해야 할는지, 아무튼 곁에 세 사람을 두고 라쿠코를 가르치는 자리에 섭니다.


  배우다가 길이 막혀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면, 남을 가르쳐 보면 외려 길을 틀 수 있기도 합니다. 배우는 사람은 마냥 배우기만 할 수 없습니다. 배워서 제대로 알자면, 내가 배운 이야기를 둘레에 넉넉히 가르치거나 알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제대로 배우는 길이라면 둘레에 얼마든지 알려줄 수 있어요. 내가 똑똑히 배워서 슬기롭게 익힌다면, 내 둘레에서는 내 가르침을 받을 수 있어요.


  훌륭하거나 대단하다는 사람만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름나거나 잘난 사람만 가르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스스로 배우는’ 사람일 때에 ‘스스로 가르치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 “타츠야는 왕따 당한 적이 없지? 매일이 지옥이야.” (96쪽)

- “똑같은 다도회라는 것은 절대 없단다. 어느 다도회든 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마음으로 임하라는 뜻이야.” (100쪽)



  만화책 《말해도 말해도》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해도 말해도’ 실마리를 풀지 못해 스스로 갑갑합니다. 내 마음을 둘레에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니 언제나 스스로 답답합니다. 삶을 즐겁게 누리면서 사랑을 기쁘게 가꾸고 싶은데, 막상 뜻대로 안 되니 괴롭습니다.


  이리하여, 갑갑하고 답답하고 괴로운 사람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입니다. 이제는 더 갑갑하기 싫고 답답하기 싫으며 괴롭기 싫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갑갑함이랑 답답함이랑 괴로움을 떨쳐내고 싶습니다. 앞으로는 환하게 웃고 맑게 노래하고 싶습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삶을 사랑하는 길을 눈부시게 걷고 싶습니다. 말해도 안 되니 다시 말하고, 다시 말해도 안 되기에 거듭 말하며, 거듭 말해도 안 되니까 자꾸 말합니다.


  스스로 말합니다. 새롭게 말합니다. 씩씩하게 다시 일어납니다. 다시 일어나서 웃음지으려 합니다. 새롭게 웃음지으면서 삶을 지으려고 합니다. 오늘 안 되면, 모레에 다시 하고, 모레에도 안 되면 글피에 더 하려고 합니다.




- ‘누가 뭐라 해도 좋다. 지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할 것이다.’ (114쪽)

- “싸움이나 승부가 아니라, 녀석을 웃겨 주자는 마음으로 부르면 어떨까? 남을 웃기는 건 기분 좋은 일이야.” (122쪽)

- “잘 들어, 무라바야시. 잘하려고 하지 마. 이건 네가 좋아하는 이야기야. 네가 말하고 웃을 정도로 좋아하는 이야기야. 그걸 관객에게 들려주는 거야. 대서비스를 하는 거지. 마야타한테도 말이야.” (125쪽)



  어떤 일이든 ‘잘해야’ 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든 ‘해야’ 합니다. 씩씩하게 해야 합니다. 즐겁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담아 아름답게 해야 합니다. 남이 무어라 하든 말든 아랑곳할 일이 없습니다. 내 걸음걸이가 엉성해 보이든 말든 나는 씩씩하게 걸어야 합니다. 엉성해 보이는 걸음걸이라서 걸음을 걷지 않으면, 앞으로도 끝내 걸음을 못 걷습니다. 엉성한 걸음걸이라 하더라도 걷고 다시 걷고 또 걸어야, 비로소 새로운 걸음이 되어 ‘엉성함’에서 스스로 풀려나 ‘맑고 밝은’ 걸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혀가 꼬이고 더듬더듬 쭈뼛거려도 다시 말합니다. 말해도 말해도 자꾸 말더듬이가 된다 하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말합니다. 뒤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으뜸이나 버금이 되겠다는 뜻이 아니라, 그야말로 내가 나답게 서서 웃음꽃이 피어나는 이야기잔치를 이루려는 뜻입니다. 웃으면서 말하고, 노래하면서 꿈꾸는 삶이 되려는 뜻입니다. 4348.5.15.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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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구리왕짜 2015-05-15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하지 못해서
아름답습니다
인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