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닷 Photo닷 2015.5 - Vol.18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206



사진이 보는 곳, 사진을 보는 마음

― 사진잡지 《포토닷》 18호

 포토닷 펴냄, 2015.5.1.



  사진잡지 《포토닷》 18호(2015.5.)를 읽습니다. 《포토닷》 첫머리에 실은 “평화박물관이 운영하는 전시공간 스페이스99에서 예정됐던 이재갑 사진전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전이 참전군인 단체들의 무력시위와 압력행사로 개막식과 환영식 등 행사가 파행을 겪은 일이 발생했다(17쪽).” 같은 이야기를 짤막하게 읽습니다. 왜 참전군인은 무력시위와 압력행사를 벌이면서 사진전시를 못 하게 할 생각이었을까요? 사진 몇 점이 얼마나 대수롭기에 이런 사진을 사람들이 못 보게 할 생각일까요? 이 전시장에 걸린 사진을 사람들이 보아서는 안 될 까닭이 있을까요? ‘한군국 증오비’를 찍은 사진은 참전군인 이름을 깎아내리는 몸짓이라고 여길 만할까요? 왜 베트남에 ‘한국군 증오비’가 섰는가를 차분히 돌아볼 마음은 있을까요?


  베트남 사내는 한국 군인이 쏜 총에 맞아서 죽어야 했습니다. 베트남 가시내는 한국 군인한테 몸을 짓밟힌 뒤 총에 맞아서 죽어야 했습니다. 버젓이 알려진 이 같은 이야기를 고개 숙여 뉘우치는 참전군인이 있고, 이러한 이야기를 꽁꽁 감추는 참전군인이 있습니다.


  일본사람은 배를 타고 한국으로 건너와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짓밟았습니다. 이 짓을 뉘우치는 일본사람이 있고, 이러한 일은 정벌이라고 여기는 일본사람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인데, 한겨레도 지난날 고구려는 중국 쪽으로 군대를 보내어 땅을 넓혔다고 말합니다. 다만, 고구려가 땅을 넓혔다는 말을 할 뿐, 이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짓밟았는가 하는 대목은 역사책에 한 줄로도 안 나옵니다. 그저 ‘정벌’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포토닷》 끝자락에 실은 “정작 천만 명에 육박하는 이들이 생산하는 사진들을 살펴보면, 그것이 그 어마어마한 숫자만큼 다양하지 않다는 건 확실하다. 각종 사진 커뮤니티를 살펴보면 그곳에 올라오는 대다수의 사진은 주로 ‘피사체의 힘’에 의지하는 그림 같은 풍경과 화보 스타일의 인물사진에 편중돼 있다(112쪽/이기원).”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몇몇 이름난 사진기를 즐겨쓰는 사람들이 모인 인터넷모임이 퍽 많고, 회원도 대단히 많습니다.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사진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립니다. 한국에서 사진을 즐기는 사람은 그야말로 아주 많습니다.


  따로 ‘전문 사진장비’를 쓰지 않더라도 손전화로 사진을 찍는 사람이 많았고, 요즈음은 스마트폰으로 무척 멋지다 싶은 사진을 찍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터넷 사진모임’ 사진은 《포토닷》에 실은 글에서도 다루듯이 ‘피사체의 힘’이나 ‘그림 같은 풍경’이나 ‘화보 스타일 인물사진’이기 마련입니다. 사진으로 삶을 드러내거나 밝히거나 나누려고 하는 몸짓은 좀처럼 터져나오지 못합니다. 멋져 보이는 사진이 아닌, 삶을 사랑하는 사진으로는 좀처럼 나아가지 못합니다.


  ‘멋져 보이는’ 사진이나 ‘그림 같은’ 사진은 겉모습입니다. 겉모습은 겉치레입니다. 겉모습이나 겉치레는 삶이 아니라 껍데기입니다.





  값비싸거나 값진 장비가 사진을 찍어 주지 않습니다. 사진은 바로 ‘내가 스스로’ 마음을 열어서 찍습니다.


  “작업이라는 게 결국 나를 향한 스스로의 질문이고, 이에 대한 고민이기 때문에, ‘기억’이란 소재는 평생 가져갈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24쪽/이재용).” 같은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사진을 찍든 글을 쓰든, 늘 내가 나한테 묻습니다. 어떤 사진을 찍으려 하는지, 어떤 글을 쓰려 하는지, 늘 내가 나한테 묻습니다. 사진 한 장을 어디에서 누구와 나누려 하는지, 글 한 줄을 어디에서 누구와 나누려 하는지, 이 같은 이야기도 늘 내가 나한테 묻습니다.


  베트남에서 전쟁이 터졌을 적에, ‘돈(달러)을 벌려고 사람 죽이는 짓’을 시킨 대통령이나, ‘돈을 벌 생각으로 사람 죽이는 짓’을 한 사람이나 서로 같습니다. 사람을 죽이라고 시킨 사람만 나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죽인 사람만 나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손을 맞잡고 서서 그들 스스로 저지른 ‘살인’을 뉘우치고 새 삶으로 거듭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되지 못한다면, 사진을 제대로 찍지도 못하고 제대로 읽지도 못합니다.





  “작가는 남도에 터를 잡기 시작한 8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남도의 풍경을 발견해 간다. 그에게 사진은 표현이 아니라 ‘발견’이다. 오래 전부터 쓰여 왔던 역사와 신화의 원형, 혹은 땅의 주인이 작가의 눈앞에 이미 있었고, 널려 있었다(43쪽/최연하).”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문화는 따로 있지 않습니다. 문화회관이라는 건물에 문화가 있지 않습니다. 문화단체에서 문화를 세우지 않습니다. 문화예술인이라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우리 둘레에서 수수하게 삶을 짓는 사람들이 언제나 스스로 문화를 이룹니다. 네가 짓는 하루가 바로 문화이고, 내가 가꾸는 하루가 새삼스레 문화입니다.


  오늘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사람이 ‘흙’과 풀과 숲이라고 하는 문화를 가꿉니다. 오늘 밥을 짓고 빨래를 하는 사람이 ‘살림’과 집과 보금자리라고 하는 문화를 가꿉니다. 오늘 아기한테 젖을 물리거나 아이한테 말을 가르치는 여느 어버이가 ‘말’과 이야기와 노래라고 하는 문화를 가꿉니다.


  베트남전쟁과 얽힌 이야기를 마주하려고 베트남으로 찾아가서 ‘한국군 증오비’를 사진으로 찍은 분이 있다고 합니다. 이분이 ‘한국군 증오비’를 사진으로 찍었든 안 찍었든 베트남에는 어엿하게 ‘한국군 증오비’가 있습니다. ‘한국군 증오비’를 찍은 사진을 한국에서 전시를 할 수 있든 없든(개막식은 제대로 못 치렀다고 하지만, 사진전시는 잘 마쳤다고 합니다), 베트남에는 어엿하게 ‘한국군 증오비’가 쉰 해 가까이 서서 비와 바람과 햇볕을 맞았습니다. 베트남사람 가슴에는 한국군이 뿌린 ‘미움’이라는 씨앗이 자랐습니다.




  “과거 서울의 모습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사진들이 꼭 설명이 필요할 정도로 난해하거나 어려운 작업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대체 ‘왜?’ 이런 캡션을 달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한미사진미술관 전시를 비롯해 이전 전시에서 그랬던 것처럼, 촬영 장소와 시기처럼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했더라도 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인데, 마치 답안지를 펼쳐놓고 문제지를 푸는 것처럼 전시를 보는 것이 과연 ‘감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67쪽/이기원)?”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얼핏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답답한 일이 곧잘 터지는 한국 사회입니다. 사진 한 장을 한결 너르고 기쁘게 누리는 길이 생각과 달리 잘 안 열리기도 하는 한국 사회입니다.


  “일하면서 여성성을 버려야 하는 슬픈 현실을 자주 직면한다. 나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지, 연애를 하려는 사람이 아니다. ‘보리’는 코미디언처럼 까부는 행동으로 보호막을 쳤고, 나는 문신을 하고 옆머리를 삭발하면서 까칠하게 벽을 쳤다(101쪽/김태은).” 같은 이야기를 읽고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패션사진을 찍는 ‘여자’ 사진가는 사진가라기보다 ‘여자’ 대접(?)을 받아야 했다고 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면 누구나 사진가인데, 왜 사진가 아닌 ‘여자’ 대접을 받아야 했을까 궁금합니다. 어떤 사진가들이 ‘내 이웃’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고 ‘여자’로만 바라보려 했을까요.




  가만히 보면, 지난날 어느 대통령 한 분도 베트남사람을 ‘이웃나라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았고, 베트남으로 날아가서 사람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면서 돈을 벌려고 했던 사람들(거의 모두 사내)도 베트남사람을 ‘이웃나라 동무’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소위 예술사진을 생산한다는 작가, 혹은 이러한 사진들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은 사진의 이러한 본질적 측면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럴싸한 장면들을 그럴싸하게 프린트해 전시장에 걸어 놓고 예술의 작위를 수여한다고 다 같은 예술사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행위들은 어떤 사진도 예술이 될 가능성이 있음을 남용한 것뿐이다. 사진은 우선 사진으로 존재할 뿐이다(111쪽/장정민).” 같은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어떤 사진이든 모두 문화가 되고 예술이 됩니다. 이 사진만 문화나 예술이 되지 않습니다. 저 사진만 패션이나 빈티지가 되지 않습니다. 그 사진만 다큐나 리얼리즘이 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담은 사진이라면, 어떤 사진이든 문화가 되고 예술이 되며, 패션이나 다큐도 됩니다. 이야기를 담지 못한 사진이라면, 아무리 이름난 작가가 빚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작품’으로 그칠 뿐, ‘사진’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합니다.


  “사진을 사진답게 찍을 때에 비로소 사진답다고 합니다. 그럴듯한 모습을 찍으면 그저 ‘그럴듯할’ 뿐입니다. 멋있어 보이게 찍는다면 그저 ‘멋있어 보일’ 뿐이지요. 이렇게 만지작거리거나 저렇게 꾸민다고 해서 사진이 빛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붙이거나 저렇게 자른다고 해서 사진이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사진 한 장에 담을 이야기를 제대로 바라보아야 비로소 사진이 됩니다. 내가 걷는 길을 나 스스로 제대로 바라보고 느껴서 가슴에 담을 때에 비로소 ‘방랑(떠돌기)’이 되고, 이 방랑길에 사진 한 장 찍어서 이웃과 나누는 삶을 짓습니다(127쪽/최종규).” 같은 이야기처럼, 그럴듯하게 찍는 사진은 그럴듯하게 보일 뿐입니다. 멋들어지게 찍는 사진은 멋들어지게 보일 뿐입니다.


  누군가는 그럴듯하거나 멋들어지게 보이려는 사진을 찍습니다. 이런 사진을 찍는다고 나쁘지 않습니다. 그저 이런 사진을 찍었을 뿐입니다. 이야기를 엮어 사진을 찍는다면, 이야기를 엮어 사진을 찍은 셈입니다. 이런 사진을 찍는다고 좋지 않습니다. 그저, 사진에 이야기를 담았을 뿐입니다.


  멋들어지게 불러도 노래가 될 테고, 멋들어지게 써도 글이 될 테지요. 멋들어지게 지어도 밥이 될 테며, 멋들어지게 빨아도 깨끗한 옷이 되겠지요.


  그런데 말이지요, 삶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으면 삶을 사진으로 못 찍습니다. 삶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기에 겉모습이나 겉치레에 휘둘립니다. 이른바 ‘멋져 보이는’ 작품이나 ‘그림 같은’ 작품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이웃과 함께 나누려고 하는 사진 이야기가 아니라, 이웃한테 자랑하고 싶은 ‘그럴듯한 솜씨자랑’으로 나아가고 맙니다.


  삶을 바라보려고 할 때에는 이웃과 동무가 지내는 하루를 차분하게 바라보면서 한솥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이웃을 아끼고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이 될 때에 비로소 서로 마음을 열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어야 바야흐로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사진을 찍든 합니다. 이야기를 나누어야 ‘사진으로 담을 삶’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베트남 참전군인은 지난날 삶을 바라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지난날에는 돈(달러)만 바라보았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름값(명예)만 바라보고 맙니다. 예나 이제나 삶과 사랑과 사람을 바라보려 하지 않습니다. 베트남에 조용히 선 ‘한국군 증오비’는 한국사람한테 넌지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국사람이 베트남에 심은 미움을 제대로 바라보고 제대로 받아들여서 제대로 삭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일본더러 한국에 고개숙여 뉘우치라고 아무리 외친들 일본 정치권력은 한국에 고개숙여 뉘우치지 않습니다. 마음을 열지 않는 이들은 그저 등을 돌릴 뿐입니다. 베트남 참전군인이 아무리 사진전시장 앞에서 무력시위를 하더라도 ‘역사는 바뀌’지 않습니다. 베트남 참전군인이 군홧발로 짓이긴 발자국은 압력행사를 벌이더라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증오비’가 ‘평화비’로 거듭나려면, 주먹과 총칼을 휘두른 사람이 스스로 주먹도 총칼도 내려놓고 따순 가슴이 되어야 합니다. 사진 한 장은 언제나 따순 가슴인 사람들이 찍고 읽으며 나눕니다. 4348.5.11.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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