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원의 가을 문학과지성 시인선 70
복거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8년 10월
평점 :
품절


시를 말하는 시 92



시와 싸움터

― 五丈原의 가을

 복거일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1988.4.15.



  봄이 무르익으면서 동이 일찍 틉니다. 이제 새벽 다섯 시 반 무렵이면 어슴푸레한 빛이 드러나고, 곧 따스한 기운이 퍼지면서 붉은 해님이 떠오릅니다. 다시 아침입니다. 어제에도 찾아온 아침이고 오늘도 찾아오는 아침입니다. 이 아침은 모레에도 새롭게 찾아오겠지요.


  아침볕을 쬐고 아침바람을 마시려고 마당에 서면,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는 새들이 푸르륵 날갯짓 소리를 내면서 날아오릅니다. 처마에서 우듬지로 옮기고, 마당에 선 나무에 있다가 지붕으로 옮기며, 지붕에 있다가 지붕 너머 전깃줄로 옮깁니다.



.. 떨어지는 것은 으레 / 맨 아래 단추다. / 원래 공평하지 못한 게 삶이다. / 마음에 걸리면서도 며칠을 미적거리다, 눈 감고 찬물에 뛰어드는 심정으로 / 바늘을 찾는다 ..  (하숙 2)



  감나무를 바라봅니다. 새봄을 맞이한 감나무는 매화꽃이 모두 지고 매화잎이 푸르게 돋아서 짙게 퍼질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움이 틉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늑장을 부리는 나무라 할 테지만, 감나무보다 무화과나무는 잎이 더 늦게 돋습니다. 감나무는 새봄 사월에 이르러 비로소 조그맣게 잎사귀를 내밀면서 보들보들한 옅노랑빛을 보여주는데, 무화과나무는 아직 겨울눈이 터지지 않습니다. 대추나무를 보면 대추나무는 훨씬 늦어요.


  가만히 나무를 바라봅니다. 지난해에도 보고 지지난해에도 보던 나무를 바라봅니다. 해마다 맞이하는 봄이니 해마다 똑같은 모습을 본다고 할 텐데, 해마다 새로 피어나는 꽃은 그야말로 새롭게, 해마다 새로 돋는 잎도 그야말로 새롭습니다. 봄이 새롭고, 하루가 새로우며, 꽃과 잎과 나무가 모두 새롭습니다.



.. 겨울엔 / 겨울 마음으로 설 일이다 ..  (눈사람)



  나뭇줄기를 어루만집니다. 어느 나무이든 지난해와 대면 줄기가 굵고 가지가 넓게 퍼졌습니다. 나무는 해마다 차츰차츰 자랍니다. 봄이 저물고 여름이 되면, 나뭇가지가 드리우는 그늘도 한결 넓어지겠지요.


  나무를 어루만지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나무처럼 아이들도 해마다 무럭무럭 자랍니다. 지난해에 입던 옷이 올해에 안 맞기 일쑤이고, 봄에 입던 옷이 가을에 안 맞기 마련이에요.


  그러면, 어른은 얼마나 자랄까요. 어른도 몸이 자랄까요. 아니면, 어른은 뱃살이 늘까요. 아니면, 어른은 늘 똑같은 몸으로 나이만 먹을까요. 아마, 어른도 아이처럼 해마다 새로운 철이 찾아온다고 느끼면서 기쁘게 웃으면 한결 튼튼하면서 씩씩한 몸으로 거듭나리라 생각합니다.



.. 퇴직금 봉투를 품에 넣어도, / 서른여덟 나이를 덮기엔 / 옷이 얇아라 ..  (사표 2)



  복거일 님이 쓴 시집 《五丈原의 가을》(문학과지성사,1988)을 읽습니다. 복거일 님이 처음 내놓은 시집이라고 합니다. 한글이 아닌 한자로 ‘五丈原’이라 적는 복거일 님은 서울대 상대를 마치고 은행과 기업체와 연구소에서 일하다가 1983년에 사표를 내고 ‘오직 글만 쓰겠노라’ 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회사원을 그만두고 글쟁이가 되는 삶을 놓고 복거일 님은 ‘자유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면, 복거일 님이 쓰는 글에 ‘자유’나 ‘자유인’이나 ‘자유주의’ 같은 낱말이 자주 나옵니다.


  ‘자유(自由)’는 한자말입니다. 이 낱말은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고 합니다. 얽매이지 않는 모습이요,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모습을 ‘자유’라고 한답니다. 그러니까, 글만 쓰며 살든 회사원으로 살든, 또 시골에서 흙을 일구며 살든 학교에서 교사 노릇을 하든, 우리 스스로 ‘다른 것에 얽매이지 않고 내 뜻을 살리면서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자유’입니다. 글만 쓰고 살더라도 ‘얽매이는 것’이 있다면 자유가 아닙니다.



.. 빈 책상들을 치우고 / 새 자리를 잡으면, / 삼차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던 入社同期도 / 추억이다 ..  (감원)



  시집 《오장원의 가을》은 자유를 노래한 글일까 궁금합니다. 사표를 내고 회사를 뛰쳐나온 이야기가 흐르는 시, 회사에서 겪은 여러 이야기가 흐르는 시, 추상과 비유가 흐르는 시, 오직 글만 쓰겠노라 외치는 이야기가 흐르는 시, 이러한 시는 ‘어떤 자유’일까 궁금합니다.


  한자말로는 ‘자유’인데, 한국말로는 ‘홀가분’입니다. 한겨레도 예부터 ‘얽매이지 않으면서 제 마음대로 일구는 삶’을 가리키는 낱말이 있고, 이러한 삶을 ‘홀가분’으로 나타냅니다.


  ‘홀가분’은 “홀로 가벼움”입니다. 홀로 날갯짓을 하며 날듯이, 홀로 삶을 일굴 수 있는 모습이고, 홀로 삶을 일구기에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아, 스스로 옥죄는 짐덩이 같은 무게가 없는 모습이기에 ‘홀가분’입니다.


  홀가분한 사람은 싸우지 않습니다. 참다이 홀가분한 사람은 사랑을 합니다. 내가 홀가분하니 너를 홀가분하게 맞이합니다. 내가 홀가분하기에, 이 아름다운 홀가분함으로 너와 어깨동무를 합니다. 내가 홀가분하니까, 다 함께 홀가분하게 꿈을 꾸고 노래를 할 수 있는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 “우리 고향에 있는 얘긴데, 능금을 먹으려면, 삼대가 걸린답니다. 능금나물 심는 사람, 가꾸는 사람, 능금을 따 먹는 사람.” 내 얼굴을 흘긋 살피고서, 박형은 말을 이었다. “지금 능금나물 심어서 따 먹잔 얘긴데…….” 말끝을 흐리면서, 그는 밖을 내다보았다. 나도 따라 내다보았다 ..  (능금나무)



  나는 우리 시골집에 나무를 심습니다. 내가 이듬해나 몇 해 뒤에 따먹을 열매를 얻으려는 마음으로 심는 나무가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이 물려받을 나무를 심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새롭게 돌보면서 저희 아이를 새롭게 낳아서 새롭게 물려줄 나무를 심습니다. 나무는 언제나 똑같이 ‘한 그루’이지만, 나부터 새롭게 마주하고, 우리 아이들이 새롭게 마주하며, 우리 아이들이 낳을 아이들도 새롭게 마주할 나무입니다. 같은 나무 한 그루를 마주하는 사람마다 다 다르면서 모두 새로운 숨결이 됩니다.


  나부터 홀가분하고 너도 함께 홀가분한 노래라 한다면, 바로 나무를 심는 노래이리라 느낍니다. ‘나는 자유야!’ 하고 외치는 노래가 아니라, ‘나는 사랑이야!’ 하고 노래하면서, ‘너도 나도 우리도 모두 사랑이야!’ 하고 외치는 노래일 때에 비로소 참다이 홀가분하면서 아름답게 퍼질 수 있는 씨앗 한 톨이라고 느낍니다.


  복거일 님은 요즈음도 시를 쓸까요? 부디 조용히 시를 쓸 수 있는 넋이 되기를 빕니다. 싸움터에서 조용히 벗어나서, 아름다이 꿈을 꾸는 삶노래꾼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4348.4.16.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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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4-16 10:22   좋아요 0 | URL
아..지난 시간 88년 이면 호돌이 굴렁쇠.
늦은 4학년.먼지나는 신작로.무궁화꺽꽂이.
또..내 기억폴더에..뭐가있더라....

숲노래 2015-04-16 11:22   좋아요 1 | URL
88년에 전두환이 권좌에서 내려왔지만
다른 독재자가 들어서면서
나라는 그대로 얼어붙고
어디에서나 최루탄 냄새가 자욱했지요...

[그장소] 2015-04-16 11:50   좋아요 0 | URL
그들은 그저 바톤 터치만 할 뿐 이란걸..새삼스럽게...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 구나 .
를 읽다..웃다 울다..그랬어요.
복거일시인의 시선 번호가88년이면 몇번이 붙는지 몰라도 황시인은 32번 째 문지 시선 입니다.
개정도 있고 재판인쇄도 있으나..그건 그렇다 치고 83년9월
자서를 시작으로 열죠.만
웃어요.그저..시간의 흐름을 막론하고 어쩌면 지금 현대를 그대로 읊나..
싶어서. 이런 시간차 공격을 뭐라 표현하는가 싶어서..서늘해지죠.

숲노래 2015-04-16 17:23   좋아요 1 | URL
먼 옛날도 없이
오늘도 없이
늘 흐르는 하루라고 느낍니다.

이 시집을 새삼스레 읽는 동안
`1980년대 첫무렵에 회사에 사표를 쓰고 당차게 나온` 그분이
오늘은 어떤 일을 하는가를
곰곰이 돌아보았습니다.

[그장소] 2015-04-16 17:45   좋아요 0 | URL
아..모든 글을 업으로 사는 이들은..시대를 타고 난다 아니 산다..던가?요.. 그것이 저항이든 순응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