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47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거움’과 ‘기쁨’은 거의 같은 마음을 나타냅니다. 즐거움은 마음이 가벼우면서 좋은 느낌을 ‘내 몸으로 품는’ 모습이고, 기쁨은 마음이 가벼우면서 좋은 느낌을 ‘내 몸 바깥으로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즐거움은 남한테 드러내지 않으면서 가벼운 모습이라면, 기쁨은 남한테 드러나도록 가벼운 모습입니다.


  ‘괴로움’은 마음이 가볍지 못하면서 이곳저곳에 마구 휩쓸리는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즐거움·기쁨’은 마음이 가벼운 모습이요, ‘괴로움’은 마음이 무거운 모습입니다. 마음이 가볍기에 ‘홀가분한’ 삶이 되어 즐겁거나 기쁩니다. 마음이 무겁기에 내가 마음을 기울여야 할 곳을 모르는 채 그저 짓눌리기만 하면서 삶이 메마르거나 주눅이 듭니다.


  즐겁거나 기쁠 적에는 몸과 마음이 모두 홀가분하기에, 마치 나비나 새처럼 하늘을 신나게 가르면서 바람을 타고 훨훨 날 수 있습니다. 괴로울 적에는 어느 일이나 놀이를 하든 그저 무거우니까, 힘이 들고 쉽게 지칩니다. 나른하거나 찌뿌둥하면서 짜증이나 골이나 성이 자꾸 찾아들기 마련입니다. 괴로우면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하고 바람을 느끼지 못합니다.


  즐거운 사람은 늘 하늘을 새롭게 올려다봅니다. 기쁜 사람은 언제나 바람을 새롭게 마십니다. 하늘을 새롭게 올려다보면서 늘 하늘빛으로 물듭니다. 바람을 새롭게 마시면서 언제나 고운 숨결로 젖어듭니다. 하늘바람으로 몸을 다스릴 적에는 한결같이 하늘바람으로 지냅니다. 이와 달리,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까지나 하늘을 그예 올려다보지 못할 뿐 아니라, 새로움이란 없다고 여깁니다. 새로움은 남이 나한테 주는 선물이 아니라, 스스로 마음속에서 길어올려야 하지만, 이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괴로운 나머지 ‘늘 마시는 바람(숨)’을 느끼지 못해, 바람결도 숨결도 내 것으로 가누지 못해요. 이때에는 내 ‘마음결’이 제대로 설 자리를 잃습니다. 아무것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눈길(눈결)이 됩니다.


  그런데, 즐거움과 괴로움은 ‘한 사람한테 함께 있는 앞모습과 뒷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실마리 때문에 즐겁고, 아주 조그마한 실타래 때문에 괴롭습니다. 아주 작은 눈짓 하나로 즐거우면서, 아주 작은 몸짓 하나 때문에 괴롭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왜 어느 일을 놓고는 즐겁게 받아들이고, 어느 일을 놓고는 괴롭게 여길까요?


  기쁨은 기쁨을 끌어들입니다. 괴로움은 괴로움을 끌어들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시샘은 시샘으로 이어집니다. 걸음마다 새로우니 자꾸 새걸음을 걷고, 걸음마다 무거우니 자꾸 제자리걸음입니다.


  ‘즐겁고 싶다’고 생각한대서 즐거운 삶이 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안 즐거운’ 사람은 없습니다. 즐거운 줄 모를 뿐입니다. 즐거움을 바라보지 않기에 즐거운 줄 모릅니다. 즐거움을 바라볼 수 있거나 기쁨을 마주할 수 있으면, 사랑과 꿈을 그대로 바라보면서 마주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괴로움이 나한테 끔찍하거나 싫은 것이 아니라, ‘괴로움’은 내가 이 삶에서 누리거나 겪는 여러 가지 징검돌 가운데 하나로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이러면서, ‘즐거움·기쁨’도 내가 이 삶에서 찾거나 만나는 여러 가지 징검돌 가운데 하나인 줄 알아차립니다.


  사랑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나중에 ‘즐거움’이나 ‘괴로움’이 따로 없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사랑 그대로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기에 사랑은 늘 아무런 토(조건)를 달지 않’습니다. 아무것에 얽매이지 않는 사랑일 때에 삶을 제대로 바라봅니다. 어느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사랑일 때에 삶을 제대로 마주하면서, 내가 나답게 섭니다. 다시 말하자면, 즐거움이라서 더 좋거나 낫지 않고, 괴로움이라서 더 나쁘거나 덜떨어지지 않습니다. 두 가지는 모두 삶을 이루는 조각입니다. 이 조각을 곱게 여겨 녹일 수 있으면, 우리는 찬찬히 가없는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4348.3.4.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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