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책사랑 도란도란
52. 책 하나로 삶을 빚다
바람을 마시면서 삽니다. 어른도 아이도 바람을 마시면서 삽니다. 부자도 가난뱅이도 바람을 마시면서 삽니다. 튼튼한 사람도 아픈 사람도 바람을 마시면서 삽니다. 몸을 고치려고 밥을 끊는 사람이든, 뜻을 이루려고 밥을 굶는 사람이든, 늘 바람을 마십니다. 사막에서 물 한 모금 못 마시면서 걷더라도 늘 바람을 마십니다.
사람과 짐승과 벌레 모두 바람을 마십니다. 풀과 꽃과 나무도 바람을 마십니다. 물을 며칠쯤 마시지 못해도 말라죽지 않으나, 바람 한 줄기를 못 마시면 곧바로 말라죽습니다.
지구별에서 사는 모든 목숨한테는 바람이 가장 대수롭습니다. 바람을 하루가 아닌 한 시간이 아닌 한 초조차 누리지 못하면, 모든 목숨은 바로 그 자리에서 죽고 맙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지구별에서 하는 일 가운데 가장 마음을 기울일 대목은 ‘바람’입니다. 내 보금자리는 내가 가장 맑으면서 싱그러운 바람을 마실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내가 하려는 일은 바람을 정갈하게 지키면서 푸르게 가꿀 수 있어야 합니다. 바람을 망가뜨리면 함께 죽습니다. 바람을 더럽히면 콜록거리다가 숨이 끊어집니다.
한자말로는 ‘생명’이라 하지만, 한국말로는 ‘목숨’이라 합니다. ‘목에 깃드는 숨’이고 ‘목으로 드나드는 숨’입니다. 목으로 숨을 쉬지 않으면 죽는 몸이 바로 ‘목숨’인 사람입니다. 또, 한자말로 ‘공기’라 하지만, 한국말로는 ‘바람’입니다. 늘 흐르는 바람결이고, 이 바람결을 몸으로 받아들일 적에 숨결이 됩니다. 숨결을 살려서 기운을 새로 얻고, 이 기운으로 몸을 움직여요.
신지아 님이 쓴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샨티,2014)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분은 처음 태어날 적에 살갗이 바알간 빛이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한여름에도 팔을 다 가리는 긴소매옷을 입어야 했고, 반바지나 치마는 엄두조차 못 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에서 따돌림을 받으셨구나 싶지만, 남들이 이분을 따돌리기 앞서 이분은 스스로 학교 울타리를 벗어납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으면서도 늘 인왕산을 오르내렸고, 홀로 풀밭이나 숲이나 멧자락에 깃들어 하늘바라기를 하면서 홀가분했다고 합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번개가 내리쳐도 무서운 줄 모르고 비를 고스란히 맞으면서 번개를 바라보았다고 해요. 이분 어버이가 어느 날 이분을 정신병원으로 데려갔는데, 정신병원에서 “선생님, 저는 그런 일에 관심 없어요. 설령 제 피부를 정상으로 바꿀 수 있다 해도 난 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이 색깔 있는 몸이 아주 신비하고 좋아요(86쪽).”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키가 작으면 키가 작을 뿐입니다. 키가 크면 키가 클 뿐입니다. 얼굴이 예쁘면 얼굴이 예쁠 뿐입니다. 얼굴이 못생겼다고 하면 얼굴이 못생겼을 뿐입니다. 그뿐입니다. 언제나 그뿐이고 다른 것이 없습니다.
눈을 감아 보셔요. 눈을 감으면, 내 키나 네 키는 하나도 안 대수롭습니다. 눈을 감으면, 내 얼굴이나 네 얼굴은 하나도 안 대수롭습니다. 귀를 닫아 보셔요. 귀를 닫으면, 내 목소리나 네 목소리는 하나도 안 대수롭습니다.
자, 이제 눈을 뜨고 귀를 열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셔요. 우리한테는 무엇이 대수로울까요? 겉모습일까요? 주머니에 든 돈일까요? 우리 어버이가 사회에서 어떤 이름값이나 재산이나 권력을 거머쥐었느냐 하는 대목이 대수로울까요?
우리한테 대수로운 대목은 오직 하나입니다. 바로 ‘마음’입니다. “나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였고 내가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유심히 관찰했다(34쪽).” 같은 말마디처럼, 내가 나 스스로 내 마음을 바라보면서 이를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 나다운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내가 나 스스로 내 마음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나는 내 길을 걷지 못합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찾아서 느끼고 알아야 합니다. 내가 어떤 일과 놀이를 누릴 만한지 내가 살펴서 깨닫고 누려야 합니다. 내가 나를 모르면, 나라고 하는 사람이 ‘바람을 마시는 목숨’인 줄 못 알아챕니다. 내가 나를 알 때에, 나라고 하는 사람이 ‘바람을 마시는 목숨’으로서, 풀과 나무하고 같으며, 벌레와 새하고 같고, 물고기와 꽃송이하고 같은 줄 알아봅니다. 모두 똑같은 목숨이면서 똑같이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숨결인지 알아보려면, 내가 나를 제대로 마주하면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지아 님은 “저는 오늘을 살고 있어요. 오늘만 생각해요. 그것도 벅차고 힘든데 어떻게 미래를 생각해요? 미래는 하늘의 뜻이에요. 무엇보다 자유를 잃고 싶지 않아요. 우리의 삶은 이상한 저울대 위에 있어요. 무엇을 얻으면 항상 무엇인가를 잃지요. 왜 얻으면 잃어야 하지요? 그래서 얻어도 잃지 않는 것을 찾아야 해요(184쪽).” 하고 말합니다. 이 말을 곱씹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오늘’을 삽니다. 모레나 어제를 살지 않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누구나 바로 오늘 이곳에서 ‘바람을 마시기’ 때문입니다. 바람을 못 마시는 사람은 바로 오늘 이곳에서 죽습니다. 내가 살아서 이곳에 있다면 내가 늘 바람을 마신다는 뜻입니다. 나 스스로 ‘오늘’을 살기에 바람결을 받아들여 숨결로 삭인다는 뜻입니다.
바람이란 무엇인가 하면, 하늘입니다. 바람은 모든 곳에 있습니다. 땅속에도 있고 바닷속에도 있습니다. 바람은 모습이 따로 없습니다. 바람은 그저 모든 곳에서 고요하게 흐릅니다. 땅속에도 바람이 흐르니 땅속에서 수많은 목숨이 살아갑니다. 바람은 드높은 하늘에도 있어서 새가 하늘을 날면서 바람을 마십니다.
책 하나로 삶을 빚습니다. 삶을 짓는 사람이 책을 짓습니다.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라고 하는 책은, 스스로 ‘삶을 짓는 길’을 걸으려고 했고 씩씩하게 걷는 사람이 차분한 마음으로 빚었습니다. 이 책을 빚은 분은 “잃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돼(312쪽).” 하고 스스로 말하면서 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잃는 것’을 따지거나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지거나 생각할 대목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이 없이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두려움이 없으면 ‘내 돈을 모두 잃’든, ‘내 이름값을 모두 잃’든, ‘내 힘을 모두 잃’든 아랑곳할 까닭이 없습니다. 내가 잃은 돈은 새로 벌거나 얻으면 됩니다. 내가 잃은 이름값은 다시 세우거나 드날리면 돼요. 내가 잃은 힘은 새로 길어올리면 됩니다.
숨을 한 번만 쉬기에 살지 않습니다. 숨은 꾸준하면서 고르게 쉬어야 삽니다. 숨은 시골자락 숨만 마셔야 몸에 좋지 않습니다. 스스로 너그럽고 사랑스러우며 따뜻한 마음일 적에 언제 어디에서나 기쁜 숨을 마십니다. 마음이 갑갑하면 시골에 있어도 푸른 숨을 마시지 못합니다. 마음에 기쁨이 넘치면 자동차 배기가스로 자욱한 곳에서도 활짝 웃으면서 푸른 숨을 마십니다.
책 하나로 삶을 어떻게 빚을까요? 바람 한 줄기로 내 목숨을 지키면서 가꾸듯이, 어떤 책이든 스스로 아름다운 마음이 되어서 읽으면, 이 책을 바탕으로 삶을 아름답게 빚습니다. 내 모습과 마음과 숨결을 먼저 바라봅니다. 차분히 바라보면서 고요한 숨결로 다스립니다. ‘고요마음’이 될 수 있으면 나뭇잎 하나를 손바닥에 얹고 바라볼 적에도 온누리를 읽습니다. 숨을 느끼고 하늘을 바라보아요. 4348.4.6.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청소년과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