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의 노래 문학.판 시 12
김정환 지음 / 열림원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시를 말하는 시 86



시와 발길질

― 레닌의 노래

 김정환 글

 열림원 펴냄, 2006.9.18.



  바람을 쐬면서 자전거를 달립니다. 들길을 가로질러 면소재지로 나옵니다. 아이들은 면소재지 초등학교에 있는 놀이터로 나와서 놀고 싶습니다. 이곳에 있는 몇 가지 놀이기구를 타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토요일과 일요일이 되기를 손가락을 빨면서 기다렸습니다. 여덟 살이 된 큰아이도 다섯 살인 작은아이도,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를 안 다니기 때문에, 월요일부터 금요일 사이에는 초등학교 놀이터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토요일이 되어 학교를 쉬고, 일요일이 되어 학교가 조용할 때에라야 드디어 놀이터 나들이를 합니다.



.. 2011년 4월 어느 날 봉천동 밤거리 / 인파가 자동차에 지워진다 / 사람이 사는 집도, 건물뿐이다 / 현실사회주의의 영광과 좌절, 그리고 / 멸망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 노래는 그렇게 한국형 천민자본주의의 / 변두리 밤풍경 위로 부유하다가 ..  (레닌의 노래)



  두 아이는 놀이터에서 아주 개구지게 놉니다. 두 시간쯤 씩씩하게 놉니다. 우리 집 마당이나 뒤꼍에도 이런 놀이기구를 세울 수 있으면 재미있겠다고 느낍니다. 우리 집 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아이들이 타고 놀 만큼 우람하면 재미있겠다고 느낍니다. 그때에는 나뭇가지에 줄을 달아 그네를 밀 수 있겠지요.


  이러구러 노는 아이들을 곁에서 지켜보다가, 초등학교 가장자리에 선 커다란 나무 앞으로 옵니다. 나무그늘이 얼마나 넓은지 헤아립니다. 나무 밑에서 춤을 추어 봅니다. 바람이 살랑 붑니다. 나무 앞에 쪼그려앉습니다. 내 새끼손톱 길이만 한 큰 개미가 기어다닙니다. 내 냄새를 맡았는지 꽤 많이 몰려듭니다.


  개미를 가만히 쳐다봅니다. 개미 꽁지가 맑습니다. 꽁지 속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잘 살펴보면 개미 주둥이에 있는 톱니가 무척 날카롭습니다. 개미가 물 적에 그렇게 따끔한 까닭을 알 만합니다. 개미 눈을 바라보고, 여섯 발을 어떻게 놀리는지 지켜봅니다. 문득 고개를 듭니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하염없이 재미있고, 나는 개미를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재미있습니다.



.. KBS 강원도 속초라나 지방 방송국 여자 아나운서가 / 청년 떠난 마을 노인네들을 서울 식으로도 / 시골 식으로도 다루지 못하고 어정쩡한 방청석 / 아줌마 다루듯 아니면 학예회 부추기듯 / 시장, 도지사, 국회의원과 원로 문인들이 한데 모인 / 공식석상으로는 아무래도 얼렁뚱땅하는 / 애교도 흐드러졌다. / 관광객들은 대만족이다 ..  (산 너머 새)



  김정환 님 시집 《레닌의 노래》(열림원,2006)를 읽습니다. 김정환 님은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진 이 나라에 천민자본주의가 자꾸 판쳐서 재미없어 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그래요, 옳은 말씀입니다. 이 바보스러운 나라와 정치꾼과 신문사와 이런저런 곳에 발길질을 할 만합니다.


  그런데, 시인이 발길질을 해 본들, 이 발길에 걷어차이는 재벌 우두머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시인이 아무리 발길질을 하더라도 정치 우두머리나 문화 우두머리나 교육 우두머리는 멀쩡합니다. 마치 하늘에 대고 하는 발길질 같습니다. 마치 바닷물을 첨벙이는 발길질 같습니다.



.. 역사 따지는 사람 턱없다 그곳에는 / 농게 참게 노랑조개 모시조개도 있지만 / 그보다 생명이 태어나는 수천만 년의 광경이 있다 ..  (갯벌 새만금)



  하늘에라도 대고 발길질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헤아려 보면, 발길질을 할 까닭도, 발길질을 안 할 까닭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 스스로 아름답게 살면 됩니다. 예쁜 사람들은 서로 예쁘게 어우러지면서 예쁜 마을을 일구면 됩니다.


  다른 사람을 나무라거나 탓할 일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꾸짖거나 손가락질할 일이 없습니다. 나무는 어느 누구도 나무라지 않아요. 풀은 어떤 사람도 꾸짖지 않습니다. 꽃은 어느 누구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 한 해가 진다 인간은 왜 사는가 보이지 않는 해가 / 소리도 없이 저무는데 목숨은 어떻게 이렇게 / 이어지는가 집단적인 질문이다 거룩함이다 / 인간의 불야성이 끝끝내 가닿지 못하는 어둔 밤 ..  (종로통 망년-사랑노래 8)



  우리 모두 커다란 나무 같은 마음이 되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우리 모두 커다란 나무 같은 사랑으로 서로 아끼고 노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우리 모두 커다란 나무 같은 품으로 얼싸안고 껴안으며 쓰다듬으면 다 같이 어깨동무를 할 만하리라 느낍니다.


  손에 호미를 쥐고 텃밭을 일구어요. 손에 삽을 쥐고 밭을 갈아요. 손에 호미를 쥐고 씨앗을 심어요. 손에 삽을 쥐고 나무를 심어요.


  나무 한 그루가 우리한테도 푸른 숨결을 나누어 주고, 저 바보스러운 정치 우두머리한테도 푸른 숨결을 베풀도록 나무를 심어요. 풀씨 한 톨이 우리한테도 고운 풀꽃을 베풀고, 저 우악스러운 문화 우두머리한테도 고운 풀꽃을 베풀도록 풀씨를 심어요.



.. 그리운 사람 이리 많은 나는 행복한가 늙었는가 / 뒤늦은 누님과 누이 사이 / 온기와 쇠 사이 / 이어짐과 채워짐 사이 / 망년 중이므로 술에 취해 결국 상투적으로 / 옛날과 오늘 사이..  (쉰 살, 망년 중)



  진딧물을 사로잡은 개미가 내 앞에서 지나갑니다. 개미는 진딧물을 꽉 물고 어디론가 갑니다. 어디를 갈까요? 혼자 먹을 곳으로 갈까요, 아니면 개미집으로 갈까요?


  우리 집 아이들은 이제 제비꽃을 잘 알아봅니다. 지난해까지 우리 집 제비꽃과 우리 마을 제비꽃을 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 보렴, 얘가 제비꽃이야.” 하고 알려주었거든요. 해마다 봄이 되면 “자 보렴, 이 아이는 봄까지꽃이야, 이 아이는 별꽃이야, 이 아이는 코딱지나물꽃이야, 이 아이는 냉이꽃이야, 이 아이는 갯기름나물이야, 이 아이는 갈퀴덩굴이야, 이 아이는 비름나물이야, 이 아이는 괭이밥이야 …….” 하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이들은 즈믄 번쯤 들어도 잊습니다. 아이들한테 다시 즈믄 번쯤 노래해도 또 잊습니다. 그러면, 나는 다시 노래하고 거듭 이야기합니다. 언제나 새롭게 풀과 꽃과 나무를 마주하면서 가슴 가득 껴안기를 꿈꾸면서, 우리 풀과 꽃과 나무를 사랑하는 길을 생각합니다. 4348.3.29.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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