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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은 파는 것 - 어린이의 시선을 담은 재밌는 낱말 책 ㅣ 네버랜드 아기 그림책 128
루스 크라우스 글, 모리스 샌닥 그림, 홍연미 옮김 / 시공주니어 / 2013년 11월
평점 :
품절
.. 아름다운 그림책이지만, 번역이 엉터리라서 별점을 깎을 수밖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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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낱말놀이’가 되려면
― 구멍은 파는 것
루스 크라우스 글
모리스 샌닥 그림
홍연미 옮김
시공주니어 펴냄, 2013.11.25.
‘어린이의 시선을 담은 재밌는 낱말 책’이라는 이름이 붙은 《구멍은 파는 것》(시공주니어,2013)이라는 그림책을 읽습니다. 이 책은 미국에서 1952년에 처음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1950년대 미국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어 ‘말놀이’를 펼친 책인 셈입니다. 다만, 어린이 눈높이라면 미국이나 영국이 다르지 않고, 영국과 독일이 다르지 않으며, 독일과 헝가리가 다르지 않고, 헝가리와 인도가 다르지 않으며, 인도와 베트남이 다르지 않고, 베트남과 일본이 다르지 않으며, 일본과 한국이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책 《구멍은 파는 것》을 한국말로 옮긴 분은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나왔다고 합니다. 내가 이 그림책을 읽으면서 알 수 있는 대목은, ‘영어로 나온 책’을 한국말로 옮긴 분이 ‘영어를 잘 하는 분’이겠거니 하는 생각뿐입니다. 그러니까, ‘영어는 잘 할’는지 모르나 ‘한국말을 잘 할’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 간식은 모두모두 사이좋게 나눠 먹는 것
- 얼굴은 재미난 표정을 짓는 것
- 손은 서로 꼭 잡는 것
- 할 말이 있을 때 번쩍 드는 것
- 구멍은 파는 것
루스 크라우스 님이 글을 쓰고, 모리스 샌닥 님이 그림을 그린 《구멍은 파는 것》이라는 그림책에는 ‘것’이라는 말이 처음부터 끝까지 수없이 나옵니다. 이 그림책을 펼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도무지 한국말이 될 수 없는 말투로 처음부터 끝까지 나오기 때문입니다.
‘간식(間食)’이 한국말이 아닌 줄 아는 어른은 얼마나 될까요? 한국말사전을 찾아보아도 이를 아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한국말사전 낱말풀이를 보면 “ ‘곁두리’, ‘군음식’, ‘새참’으로 순화”로 나옵니다. ‘표정(表情)’이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아는 어른은 얼마나 될까요? 한국말사전 낱말풀이를 보면, “마음속에 품은 감정이나 정서 따위의 심리 상태가 겉으로 드러남”으로 나옵니다.
→ 주전부리는 모두모두 사이좋게 나눠 먹는 밥
→ 얼굴은 재미난 모습을 짓는다
→ 손은 서로 꼭 잡는다
→ 할 말이 있을 때 번쩍 들지
→ 구멍은 판다
‘곁두리’이든 ‘군것질’이든 ‘주전부리’이든 ‘밥’입니다. 밥을 먹어요. 얼굴빛은 얼굴에 드러나는 빛입니다. 그러니, ‘얼굴’과 ‘표정’을 나란히 쓰는 일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한자말 ‘표정’은 ‘얼굴빛’이나 ‘낯빛’을 가리킵니다. ‘손’이나 ‘구멍’을 ‘것’으로 가리킬 수 있을까요? 이렇게 가리킬 수 없습니다. 한국 말투가 아닙니다.
- 땅은 정원을 만드는 것
- 풀은 흙에서 자라 땅 위를 가득 덮는 것
- 길게 자라면 깎는 것
- 파티는 ‘안녕!’ 하고 서로 인사하고 악수하는 것
-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
‘정원(庭園)’은 어떤 곳일까요? 한국말사전을 보면 “집 안에 있는 뜰이나 꽃밭”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나, 한국말사전까지 찾아보지 않더라도, 한국에는 ‘정원’이 없는 줄 알아야 합니다. 한국말에서는 어디까지나 ‘뜰’이요 ‘마당’이며 ‘꽃밭’이거나 ‘잔디밭’입니다. ‘파티(party)’는 무엇일까요? 한국말사전을 보면 “‘모임’, ‘연회’, ‘잔치’로 순화”라 합니다. 그런데, ‘연회(宴會)’는 “축하, 위로, 환영, 석별 따위를 위하여 여러 사람이 모여 베푸는 잔치”라고 나와요. 다시 말하자면, ‘파티’와 ‘연회’는 한국말이 아니고, 한국에서 사는 어른은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한테 이 외국말을 쓸 까닭이 없습니다.
‘행복(幸福)’이라는 한자말을 어른들이 참 흔히 쓰는데, 이 낱말은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말 ‘기쁨’이나 ‘흐뭇함’이나 ‘즐거움’을 한자로 옮기니 ‘행복’입니다.
→ 땅으로 꽃밭을 가꾸지
→ 풀은 흙에서 자라 땅을 가득 덮어
→ 길게 자라면 깎는다
→ 잔치는 ‘반가워!’ 하고 서로 인사하고 손 잡는 자리
→ 우리들을 기쁘게 해 준다
그림책 《구멍은 파는 것》은 몹시 재미있습니다. 글이나 그림이 참으로 아기자기하면서 앙증맞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그림책입니다. 그러나, 이 그림책이 참다이 아름다우려면, 영어가 아닌 한국말로 옮길 적에 ‘한국말로 옳고 바르며 슬기롭고 아름답게’ 옮겨야 아름답습니다.
- 팔은 꼭 껴안는 것
- 발가락은 꼼지락거리는 것
- 귀는 쫑긋거리는 것
- 구멍은 쏙 들어가 앉는 것
- 꿈은 한밤중에 여러 가지를 만나는 것
우리 몸을 가리키면서 어느 누구도 ‘것’이라 하지 않습니다. 몸은 ‘몸’이라는 낱말로 가리킵니다. ‘한밤중(-中)’이라는 엉터리 낱말을 어른들이 자꾸 쓰는데, ‘한밤’이라고만 적어야 합니다. ‘밤중(-中)’이라는 낱말도 엉터리예요. “밤중에 일어나다”가 아니라 “밤에 일어나다”라 말해야 합니다. ‘밤중·아침중·낮중·새벽중’ 같은 한국말은 없습니다.
→ 팔은 꼭 껴안아
→ 발가락은 꼼지락거리지
→ 귀는 쫑긋거린다
→ 구덩이는 쏙 들어가 앉는 데
→ 꿈은 한밤에 여러 가지를 만나네
‘구멍’은 파인 자리를 가리키지만 “구멍에 앉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들어가서 앉는 “파인 곳”은 따로 ‘구덩이’라고 합니다. 영어가 되든 일본말이 되든 중국말이 되든, 바깥말(외국말)을 한국말로 옮길 적에는 한국말을 옳고 바르게 살펴야 합니다. 어린이책이라면 어린이 눈높이를 제대로 살펴야 할 뿐 아니라, 아이들이 슬기롭게 물려받아서 사랑스럽게 쓸 수 있는 말로 가다듬어야 합니다.
- 눈은 뒹굴면서 신나게 노는 것 → 눈밭에서 뒹굴면서 신나게 놀아
- 세상은 우리가 발 디디고 서는 것 → 온누리에 우리가 발 디디고 선다
- 해는 아침이 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 해는 아침이 왔다고 알려준다
- 산은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것 → 산은 꼭대기까지 올라가고
- 기슭까지 내려오는 것 → 기슭까지 내려오지
- 구멍은 꽃을 심는 것 → 구덩이는 꽃을 심는 자리
- 시계는 똑딱똑딱 소리 내는 것 → 시계는 똑딱똑딱 소리 내며 움직여
- 접시는 씻는 것 → 접시는 씻는다
- 손은 놀잇감을 만드는 것 → 손은 놀잇감을 만들 수 있어
- 책은 들여다보는 것 → 책은 들여다보는 이야기밭
《구멍은 파는 것》을 보면, 41쪽에 꼭 한 번 “구멍은 쥐가 사는 곳”처럼 나옵니다. 이 대목에서는 ‘것’이 아닌 ‘곳’으로 적습니다. 그러나, 다른 글월에서는 도무지 한국말이나 한국 말투라고 할 수 없이 옮겼습니다. 아무쪼록 이 그림책에 쓴 번역말을 제대로 고쳐쓰거나 똑바로 바로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국 어린이가 슬기롭고 즐겁게 읽으면서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말넋을 살찌울 수 있도록 이끌어 주기를 바랍니다. 이만 한 그림책이라 한다면, ‘한국말을 슬기롭게 쓰는 어른’한테 ‘글손질’을 받아야 하리라 느낍니다. 다른 여느 그림책도 한국말을 슬기롭게 쓰는 어른이 가다듬을 수 있어야 하는데, 출판사 편집부에서 이 몫을 먼저 잘 하기를 빌고, 슬기로운 어른들이 마음을 모아서 책 하나를 아름답게 가꾸어 주기를 빕니다. 4348.3.26.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