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바보짓
‘가난’을 높이 섬기는, 이른바 찬양하는 책이 꽤 많다. 가난해야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울 수 있다고 외치는, 이른바 찬미하는 책이 참 많다. 그러나, 나는 이런 책이 하나도 안 옳다고 느꼈다. 이런 책에서 쓰는 ‘가난’이라는 낱말은 알맞지 않다고 느꼈다.
가난을 외치는 이들 가운데 누가 가난하게 사는가? 아무도 가난하게 안 산다. 가난을 외치는 이들은 무슨 생각일까? 이들은 우리가 참말 가난하기를 바라면서 글을 쓰고 소리 높여 외친다. 그러면, 가난을 높이 섬기거나 노래하는 이들은 어떤 뜻으로 우리한테 가난하라고 외칠까?
우리가 가난해야 저들이 부자나 권력자가 된다. 우리가 가난만 생각하면서 오직 가난이라는 수렁에 빠져야 저들이 부자와 권력자가 되어 우리를 종(노예)으로 부릴 수 있다.
가난은 바보짓이다. 왜 그런가 하면, 가난해서는 아무것도 못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손에 100원을 쥐어도 가난한 사람은, 손에 100억 원을 쥐어도 가난하다. 손에 100원을 쥐어도 넉넉한 사람은, 손에 100억 원을 쥐어도 넉넉하다. 가난하고 자시고는 대수롭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넉넉한 삶’을 짓고 누려서 나누어야 한다. 왜냐하면, 언제나 넉넉한 삶이면서 넉넉한 넋이 되고 넉넉한 말을 펼칠 수 있으면, 우리 주머니에 100억 원이 있든 100원이 있든 늘 넉넉하다.
우리가 ‘가난한 삶’이라는 굴레에 빠져들어 허덕인다면, 우리 주머니에 100원이 아닌 100억 원이 있어도 언제나 가난한 나머지, 이웃이나 동무 주머니에 있는 100원뿐 아니라 100억 원을 모두 훔치려 든다. 그런데, 이렇게 훔치고 빼앗아도 언제나 가난하니까 자꾸 빼앗고 또 빼앗으려 한다.
참말 제대로 생각하면서 보아야 한다. 사랑을 생각하는 사람이 사랑을 찾는다. 꿈을 생각하는 사람이 꿈을 찾는다. 넉넉함을 생각하는 사람이 넉넉함을 찾는다. 우리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길을 생각해야 한다. 아름다움을 찾고 싶다면 아름다움을 생각해야 한다. 왜 가난을 생각하는가? 가난을 생각하니 그저 가난이라는 굴레에 갇힌다. 사랑스러움을 찾고 싶다면 사랑스러움을 생각해야 한다. 왜 자꾸 가난을 생각하거나 찾는가? 가난만 생각하고 외치니까 우리는 늘 가난이라는 수렁에 발목이 잠겨서 빠져나올 수 없다.
우리가 가난하기를 바라는 이들은 돈과 권력을 모도 거머쥐면서 우리를 바보로 내몰려고 한다. 우리는 가난해야 할 까닭이 없다. 우리는 가난으로 갈 까닭이 없다. 우리는 100원을 쥐든 100억 원을 쥐든 늘 넉넉하면서 아름답고 사랑스레 살아야 한다. 우리는 100원을 쥐었어도 이웃과 100원을 나눌 줄 알며, 100억 원을 쥐었어도 동무와 100억 원을 나눌 줄 아는 착하고 참다운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어야 한다. 가난을 노래하는 책은 모두 거짓부렁이다. 거짓부렁 책은 모두 불살라서 재로 바꾸어 흙에 거름으로 뿌려 주어야 한다. 4348.3.25.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책 언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