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기 무네요시 새로읽기
나는 한국사람이기에 한국사람을 바라본다. 내가 일본사람이나 미국사람이라면 일본사람이나 미국사람을 바라보았을 테지. 한국사람 가운데 ‘일본에서 한국을 더 깊이 아끼거나 돌보려고 하는 몸짓이나 마음’을 보여줄 적에 괜히 시샘을 하거나 까탈을 부리려는 사람을 곧잘 본다. 왜 그럴까? 참 웃기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 시샘이나 까탈을 가만히 보면, 다른 나라나 겨레에서 한국 문화와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면서 “한국은 참 좋아!”나 “한국은 아주 훌륭해!” 하고만 말하면 시샘이나 까탈을 부리지 않는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걸어온 길을 찬찬히 살피면서 모든 문화와 역사와 사회를 깊고 넓게 건드리거나 헤아리는 이야기를 말하면 어김없이 시샘이나 까탈을 부린다. 이러면서 으레 말 한 마디를 붙잡고 늘어지려 한다.
야나기 무네요시라고 하는 일본사람이 있고, 이녁은 ‘조선(한국이 아닌 조선)’이라는 나라를 처음 찾아올 수 있던 때에 몹시 놀라면서 안타까운 마음이었다고 한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권력은 쓸쓸하지만, 정치권력이 어떠하든 조선이라는 나라를 이루어 살림을 가꾸는 여느 수수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삶이 몹시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웠다고 하는 이야기를 글로도 쓰고, ‘조선사람 스스로 아끼지 않아서 그대로 버려지는 조선 문화재(민속문화재)’를 온돈을 들여서 그러모았으며, 이렇게 그러모은 조선 문화재(민속문화재)를 아낌없이 조선 사회에 돌려주었다. 조선 사회에는 전형필이라는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이런 사람 몇몇이 있어도 거의 모든 사람은 조선 문화재(민속문화재)를 들여다보지 않았고 깎아내리거나 아예 쳐다보지 않았다. 이를 처음으로 짚으면서 밝힌 사람이 야나기 무네요시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본에서도 전쟁을 끔찍하게 싫어할 뿐 아니라, ‘반전론’을 대놓고 글로 밝히기도 한 사람이다. 이러면서 ‘유행에 따르기를 거스르’고, ‘겉치레로 겉모습을 꾸미기를 하지 않’으며, ‘삶을 사랑으로 가꿀 때에 비로소 참답게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이녁 다짐(좌우명)으로 삼으면서, 이를 ‘문화를 읽는 눈길’로 드러낸 사람이다.
조선 백자이든 조선 막사발이든, 이러한 질그릇을 야나기 무네요시가 눈여겨본 까닭도 ‘유행에 따르지 않’으면서 ‘겉치레를 하지 않’는데다가 ‘조선 서민(백성)이 여느 삶자리에서 수수하게 쓰는’ 그릇이었기 때문이다.
석굴암을 놓고 야나기 무네요시가 한 말을 아주 뒤트는 사람들이 많기도 한데, 여러모로 안쓰러운 ‘내 이웃인 한국사람’이다. 참말 석굴암을 뭘로 생각하기에 그런 안쓰러운 말을 일삼을까? 석굴암이건 팔만대장경을 모신 건물이건 아주 마땅히 ‘과학’이다. 그러나, 석굴암과 팔만대장경 모신 건물은 ‘자연(숲)을 거스르지 않은 과학’일 뿐 아니라, ‘자연(숲)을 그대로 살린 과학’이다. 한국사람은 스스로 바보인가? 아니, 오늘날 한국사람은 ‘한국 문화와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는 일본사람을 그저 깎아내리거나 못마땅하게 여겨야 ‘한국사람이 일본사람보다 높아져서 우쭐할 수 있다’고 멍청한 생각을 하는가? 석굴암에는 ‘아무런 전기 시설’을 하지 않고도 물방울이 생기지 않고 저절로 바람이 드나들면서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그런데, 이를 어설피 건드리는 바람에 다 망가뜨렸다. 팔만대장경 모신 건물에 무슨 에어컨이나 환풍기나 백열전구나 이런저런 것이 있는가? 이런 것들 하나조차 없어도 나무글판이 썩지 않고 언제까지나 그대로 건사할 수 있도록 지은 바탕은 ‘자연(숲)을 제대로 읽어서 자연(숲)을 그대로 살리는 손길’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한국미(아름다운 한국)’란 바로 ‘자연미(숲내음)’라고 할 수 있고, 이 말이 맞으며,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를 제대로 읽어서 말했다. 조선 민화가 ‘자연미’가 아니면 무엇인가? 그리고, 이런 자연미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아니더라도, 〈에밀레 박물관〉을 손수 연 조자용 님이 밝히기도 했다. 야나기 무네요시를 깎아내리거나 비아냥거리고 싶다면, 조자용 님도 똑같이 깎아내리거나 비아냥거릴 노릇이다. 두 사람이 한국 문화와 역사와 사회를 보는 눈은 ‘한동아리’라고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한(恨)’이나 ‘정(情)’이란 무엇인가? 한겨레는 정치권력 때문에 여느 사람들(백성, 옛날에는 백성이 모두 시골사람이었다)이 몹시 괴로웠다. 정치권력자와 지주와 양반이 여느 사람(백성, 시골사람)을 얼마나 모질게 짓누르거나 짓밟았는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토지수탈을 한 까닭은 ‘조선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소작료가 비싼 나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작쟁의는 일제강점기에만 불거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아닌 조선 사회에서도 끝없이 일어난 일이 소작쟁의이다. 한겨레 시골사람은 임금·권력자·지식인·양반한테 끝없이 짓눌리는 아픔(한)을 삭여서 눈물을 흘리다가도 웃음으로 녹여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정)으로 드러내는 수많은 노래(민요)와 이야기(민담, 설화, 옛이야기)와 춤(농악, 굿)과 두레와 품앗이와 울력과 놀이(마을잔치, 전통놀이) 들로 새롭게 나타냈다. ‘아픔을 달래어 이를 사랑으로 끌어올린 마음’이 바로 조선 사회를 이룬 이 나라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사람들, ‘백성’이 보여준 삶이고, 이러한 삶이 조선 막사발이나 소반 같은 데에서 애틋하게 나타났다.
야나기 무네요시를 한국사람이 깎아내리든 비아냥거리든 그리 대수롭지 않다. 그러나, 우리한테 ‘마음’과 ‘생각’이 있다면, 우리 문화와 역사와 사회가 무엇인지 우리 스스로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란다. 다른 나라에서, 또 이 나라 전문가나 학자라는 이들이, 이러쿵저러쿵 읊는 말에 기대지 말고, 우리 스스로 우리 문화와 역사와 사회를 ‘정치집권자 입맛에 맞추어 뒤바꾸거나 뒤튼 이야기’도 쳐다보지 않으면서, 가만히 우리 삶을 돌아보기를 바란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어떤 삶을 일구었는지 되새기기를 바란다. 이렇게 하고 나서 야나기 무네요시를 읽어 보라. 그리고, 조자용과 예용해와 진성기와 한창기를 읽어 보라. 이러면서 송건호와 이오덕과 인병선을 읽어 보라. 이들이 쓴 책을 한 권도 빼놓지 말고 모두 읽어 보라. ‘시골에서 흙을 만지면서 손수 삶을 지은 사람들이 이룬 이야기’를 아끼는 마음을 읽어 보라. ‘시골에서 숲을 지으면서 아이들한테 사랑을 물려준 사람들이 빚은 이야기’하고 어깨동무하는 마음을 읽어 보라. 4348.2.23.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사람과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