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희 9
강경옥 글.그림 / 팝툰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책 즐겨읽기 471



너를 만나기까지

― 설희 9

 강경옥 글·그림

 팝툰 펴냄, 2013.3.4.



  순천에서 고흥으로 나들이를 오신 이웃님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뱀과 개구리와 들딸기가 얽힌 이야기를 듣다가 빙그레 웃음이 터집니다. 참말 그렇지 하면서 절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들딸기가 돋는 곳에는 으레 뱀이 나옵니다. 뱀이 나오는 곳에는 으레 개구리가 삽니다. 들딸기가 넝쿨줄기를 뻗는 데는 사람들이 가시에 긁히거나 찔리니 딸기를 훑을 때가 아니면 좀처럼 다가가지 않는 자리이고, 이런 곳에는 개구리가 깃들기 일쑤예요. 들딸기는 물기 적은 데에서도 줄기를 뻗지만, 물기 많은 곳이나 도랑 둘레에 아주 흐드러집니다. 이래저래 들딸기와 개구리와 뱀은 함께 어우러집니다.


  그나저나 왜 웃음이 터졌느냐 하면, 이웃님이 뱀과 개구리를 이야기했기에 웃음이 터졌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뱀과 개구리는 ‘시골’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오늘날이요, 나는 오늘 시골자락에서 사니까 으레 뱀과 개구리를 만나는데, 고흥으로 나들이를 오신 순천 이웃님도 ‘순천 시골자락’에서 지내시니까, ‘시골내음’이 흐르는 이야기를 나누는구나 하고 느껴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 ‘거침없이 애정을 표현하는 리카 앞에서 난 왠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건 마치 내 애정을 표현하면 안 된다는 압박이랄까.’ (38쪽)

- “하지만 그럼 너는 전생의 꿈에서 연인이어서 사귀자는 거지. 지금 내가 진짜로 좋아서 사귀자는 건 아니라는 거야?” “진짜로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가 중요해졌어?” “당연하잖아! 네가 말한 내 전생이야 어쨌건 나는 나거든. 난 과거의 사람이 아니야! 다른 사람으로 생각해서 사귀자는데 기분 좋을 리 없잖아!” “알아. 알고 있어. 넌 너야. 그럼 넌 내가 좋다는 거야?” (45∼46쪽)




  내가 시골에서 살기에 시골 이야기를 나눌 적에 즐거울 수 있습니다. 내가 도시에서 산다면 시골 이야기를 나누다가 웃음이 터질 일은 드물리라 느낍니다. 내가 아파트에서 산다면 아마 이웃들과 아파트 이야기를 나눌 테지요. 내가 운동경기를 좋아한다면 이웃들과 운동경기 이야기를 나눌 테고, 내가 사진을 좋아한다면 이웃들과 사진 이야기를 나눌 테며, 내가 정치에 눈길을 둔다면 이웃들과 정치 이야기를 나눌 테지요.


  아이들과 시골에서 삶을 짓는 하루에 눈길을 둔다면, 나는 내 이웃님하고 기쁘게 ‘시골에서 삶짓기’란 무엇인가를 놓고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아이들과 곁님하고 시골에서 삶을 노래하는 하루에 마음을 기울인다면, 나는 내 모든 이웃님하고 언제나 즐거이 ‘시골에서 노래하는 삶’은 얼마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가를 놓고 이야기잔치를 벌입니다.


  내 마음이 가는 흐름에 따라 내 삶을 손수 짓습니다. 내 이웃도 이녁 마음이 가는 흐름에 따라 이녁 삶을 손수 짓습니다. 이리하여, 나와 이웃(나와 너)은 마음과 마음으로 만납니다. 나와 너(나와 이웃)는 나이나 재산이나 권력이나 학력이나 이런저런 겉모습이 아닌 마음으로 만납니다. 나와 이웃(나와 너)은 성별도 지역도 신분도 계급도 아닌, 오롯한 사람으로서 만납니다.



- ‘애정이란 게 누가 더 많이 좋아한다고 해서 그 사람 것인 건가?’ (56쪽)

- ‘만약 가능하다면 나와 함께 세상을 구원한다는 연애를 하면 어때요?’ (65쪽)





  강경옥 님 만화책 《설희》(팝툰,2013) 아홉째 권을 곰곰이 되새깁니다. 열한째 권까지 나온 《설희》를 모두 읽고 나서 아홉째 권을 다시 넘기니, 이야기 얼거리가 살짝 성기거나 조금 늘어지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조금 더 단단하게 틀을 짜서, 한결 더 빠르면서 야무지게 엮을 수 있을 텐데, 어딘가 아무래도 끈이 풀린 듯합니다. 이를테면, 만화에 나오는 스물 갓 넘은 젊은이들이 차라리 더 가볍게 말을 섞고 어우러지다가 차츰 삶을 깊이 들여다보려 하면서 차근차근 철이 드는 얼거리를 보여준다든지, 나이를 떠나 모든 주인공이 더 꼼꼼하고 야무지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더 깊고 너른 마음읽기를 보여준다든지, 어느 한쪽으로 또렷하게 만화 얼거리를 짜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무심코 튀어나와 버렸지만, 사실 난 계속 그걸 생각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90쪽)

- ‘그럼 도대체 설희는 어떤 마음으로 세이를 보는 걸까? 스물한 살의 나는 이런데, 도대체 얼마를 살았을지 모를 설희가 세이에게 가진 감정은 무엇일까? 전생의 감정?’ (117쪽)



  만화책 《설희》에 나오는 ‘눈아이(설희)’는 사백 해나 오백 해쯤 죽음이 없이 살아왔다고 할 만합니다. 이동안 눈아이는 다른 사람이 죽고 나면서 ‘되살이(윤회)’하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그런데, 되살이로 새롭게 사는 이들은 예전 삶을 좀처럼 떠올리지 못합니다. 틀림없이 되살이로 이 땅에 다시 왔으나 예전 삶을 도무지 떠올리지 못해요.


  예전 삶을 떠올리지 못하는 이들이 예전 삶을 떠올릴 수 있다면, 이들은 이제껏 몇 차례에 걸쳐서 몇 해쯤 되살이를 했을까요? 설희도 ‘죽음 없는 삶’을 사오백 해를 누리기는 했으나, 이러한 ‘죽음 없는 삶’에 앞서 얼마나 기나긴 나날에 걸쳐서 되살이를 했을까요?


  우리한테 나이란 무엇일까요? 나이가 쉰 살이면 많을까요? 나이가 여든 살이면 많을까요? 고작 열 살이나 스무 살이라 하더라도, 그동안 지나온 되살이를 치면 오천 살이나 오만 살쯤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스스로 떠올리지 못할 뿐, 우리는 그동안 온갖 삶을 죄다 누리면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지난날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으로서 무슨 일이나 짓을 했을까요?




- ‘밖에는 눈이 오고, 여기엔 희망이 있는 것 같은, 왠지 따스한 분위기.’ (178쪽)



  우리는 지난날에 몹시 바보스럽거나 멍청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곳에서 매우 사랑스럽거나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제만 돌아보면서 ‘예전이 좋았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곳을 또렷하게 바라보면서 ‘오늘 이곳에 내 삶을 새롭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게 짓겠어’ 하고 다짐할 수 있습니다.


  만화책 《설희》에 나오는 ‘눈아이’는 ‘너’를 만나려고 이곳에서 새롭게 살려 합니다. 눈아이하고 만난 ‘나’는 어제와 오늘과 모레를 잇는 삶에서 무엇이 참이고 거짓이며,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는지 아직 갈팡질팡합니다. 오늘 이곳에서 새롭게 살면 어제를 바꿀 수 있을까요? 오늘 이곳에서 새롭게 살아도 모레에 죽고 다시 태어나면 또 바보스러운 짓을 할까요? 오늘부터 앞으로 언제까지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럽게 삶을 짓는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이제부터 아름답거나 사랑스럽게 삶을 짓는 길을 걸으면, 어제까지 내가 보여준 모든 바보스럽거나 멍청한 발자국을 돌이키거나 새롭게 추스를 수 있을까요? 만화책 《설희》는 이러한 실타래와 수수께끼를 앞으로 어느 만큼 풀거나 맺을 수 있을까요? 4348.2.22.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