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19 그대로 있기



  ‘그대로 있기’는 쉽지도 어렵지도 않습니다.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고 할 적에, 참말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을 수 있을 텐데, 이때에 한번 생각할 노릇입니다. ‘쉬지 않고 움직이기’와 ‘그대로 있기’ 가운데 어느 쪽이 쉽거나 어려울까요? 쉬지 않고 움직이기가 어려울까요, 그대로 있기가 어려울까요?


  쉬지 않고 움직이는 까닭은 우리 몸은 ‘고인 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늘 새롭게 움직일 때에 새롭게 피어나면서 살아나기에 ‘움직여야’ 합니다. 이와 맞물려서 ‘그대로 있기’를 하는 까닭은, ‘내가 오늘 이곳에서 어떻게 있는가’를 제대로 바라보려 하기 때문입니다.


  내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면, 내가 어떻게 움직일 때에 즐겁거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지 알 수 없습니다. 내 참모습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면, 내가 지으려고 하는 삶이 어느 때에 어느 곳에서 즐겁거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나한테 말합니다. “그대로 있어. 그대로 가. 잘 되든 안 되든 그대로 해. 네 모습 그대로 다 괜찮아. 나를 스스로 봐. 내 모습을 그대로 바라봐. 내가 가는 이 길을 그대로 가. 내 삶을 그대로 바라봐. 그대로 있으면서 그대로 사랑해. 나는 나야. 내가 사랑하는 나를 그대로 바라보면서, 나한테 찾아오는 바람을 그대로 마시고, 그대로 뱉어.” 하고 말합니다.


  내가 나를 ‘그대로 있’도록 두면서 바라볼 수 있으면, 나는 너를 ‘그대로 있는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눈길이라면,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을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내가 나를 그대로 볼 적에 내 이웃을 그대로 바라볼 뿐 아니라, 내가 선 이 보금자리와 마을과 삶터를 그대로 바라보면서 헤아리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그대로 보지 못할 적에는 이 보금자리도 이 마을도 이 삶터도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니, 얼거리나 속내나 허물을 하나도 못 헤아리고 못 깨닫습니다.


  내가 나를 ‘그대로 있’도록 둘 때에, 비로소 철이 듭니다. 그대로 있는 모습을 바라볼 때에 바람을 느끼고 햇볕을 느끼며 물과 흙과 풀을 느낍니다. 그대로 있기에 그대로 보고, 그대로 보기에 그대로 알며, 그대로 알기에 그대로 철이 들 수 있습니다.


  언제나 그대로 갑니다. 잘 하거나 못 하거나 따지지 않고 그대로 갑니다. 호미질이나 낫질을 처음 하느라 서툰 사람더러 ‘이렇게 해야 잘 하지!’ 하고 다그칠 까닭이 없습니다. 그저 그대로 하면서 나아가도록 지켜볼 뿐입니다. 늘 그대로 삽니다. 어제는 어떻게 해야 했고 그제는 어찌저찌 해야 했다고 뉘우칠 까닭이 없습니다. 어제와 그제는 지나간 내 발자국이니, 나는 오늘 이곳에서 씩씩하게 걸어가면 됩니다. 옳거나 그르거나 가리지 않고 그대로 삽니다. 꼭 들어맞는 한 가지 길만 찾으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잘 들어맞지 않아도 스스로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스스로 해 보는 동안, 처음에는 어렴풋하던 그림이 비로소 환하게 트입니다. 노상 그대로 생각합니다. 좋거나 나쁘거나 금을 긋지 않습니다. 똑똑하거나 앞서가는 사람 꽁무니를 좇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내가 선 곳에서 바람을 마시고 햇볕을 쬐며 물을 먹습니다. 나는 내가 선 곳을 기쁘게 가꾸는 길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대로 가다 보면 가시밭길이 나올 수 있고, 벼랑길이나 막다른 곳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대로 가면 됩니다. 돌아가야 하면 돌아가면 됩니다. 그대로 돌아가면 됩니다. 잘못 짚었으면 잘못 짚은 대로 바라보고 느껴서 깨달은 뒤, 이제부터 잘못 안 짚으면 됩니다. 때로는 밥을 태울 수 있고, 때로는 꼬두밥이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넘어져서 무릎이 깨질 수 있고, 때로는 빈털털이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돈이 왕창 들어올 수 있으며, 때로는 곁님이 입맞춤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삶을 그대로 바라보고 맞아들입니다. 내가 겪어야 하고 치러야 하며 맞이해야 할 사랑을 날마다 새롭게 얼싸안습니다.


  처음부터 익숙하게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퍽 오랫동안 익숙하지 않아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대로 하면 됩니다. 공부도 훈련도 도무지 앞날이 안 보이거나 제자리걸음 같다 하더라도 그대로 하면 됩니다. 배운 그대로 하고, 본 그대로 하며, 안(깨달은) 그대로 하면 됩니다. 그대로 나아가면서 하나씩 새롭게 느낄 수 있고, 하나씩 새롭게 느끼기에, 시나브로 철이 듭니다.


  내가 나를 믿거나 안 믿거나 대수롭지 않습니다. 내가 스스로 못미더우면 나를 ‘못미더운 그대로’ 바라보셔요. 어느 대목이 못미더운지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바라보셔요. 내가 스스로 못미덥다고 해서 고개를 돌리면, 나는 내가 스스로 어느 대목에서 못미더운지 하나도 알 수 없고, 하나도 알 수 없으면 실타래를 하나도 풀 수 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믿음직하면 나를 ‘믿음직한 그대로’ 바라보셔요. 어느 대목이 믿음직한지 ‘하나부터 열까지 그대로’ 바라보셔요. 내가 스스로 믿음직하다고 해서 그냥 지나가면, 나는 내가 스스로 어떻게 믿음직한지 제대로 알 수 없고, 제대로 알 수 없으면 내가 나한테 새로운 수수께끼를 낼 수 없습니다.


  나를 생각하면서 그대로 갑니다. 내가 선 이곳을 생각하면서 그대로 갑니다. 내가 있는 이곳을 생각하면서 그대로 갑니다. 그대로 하면 됩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에서 한국말을 그대로 쓰면서 살면 됩니다. 미국사람은 미국에서 미국말을 그대로 쓰면서 살면 됩니다. 미국이 마음에 들면 미국에 가서 미국말을 하면 되고, 한국이 마음에 들면 한국에 그대로 뿌리를 내리면서 한국말을 하면 됩니다. 이도 저도 아닌 곳에서 헤매지 말고, 나를 그대로 보고 생각하고 살피고 받아들이고 마주하면서, 내 삶길을 그대로 두면 됩니다. 이렇게 할 때에 천천히 사랑꽃이 핍니다. 4348.2.15.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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