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가는 책읽기



  음성에 계신 아이들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서 사흘을 지낸 뒤 고흥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갔다가 ‘집’에 돌아온다. 두 집 사이를 오가면서 ‘집’을 곰곰이 생각한다. 나는 스무 살에 제금을 났으니, 이제는 ‘내 어버이 집’에서 살던 나날보다 ‘내 집’에서 사는 나날이 더 길다. 앞으로는 ‘내 집’에서 보내는 나날이 훨씬 길어지리라.


  지난날에는 한 집안에서 제금을 날 적에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더 생각해 보면, 제금을 나더라도 굳이 멀리 갈 까닭이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아이를 낳는 어버이는 ‘어버이 스스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여기는 터전’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두고두고 물려받아 두고두고 물려줄 만한 ‘숲집’을 가꿀 적에는 굳이 멀리 떨어진 데에 살 까닭이 없다.


  오늘날에는 아이들이 제금을 나면서 한 집안에 그대로 머무는 일이 드물다. 요즈음 어버이는 아이들이 제금을 날 수 있도록 몇 억 원에 이르는 돈을 아파트나 자가용을 장만하는 돈으로 쓰려고 허리띠를 졸라맨다. 이리하여, 이 나라에서는 아파트 산업과 자동차 산업이 끝없이 내달린다.


  곰곰이 생각할 노릇이다. 도시에서 산다면,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어서 산다면, 굳이 어버이와 아이가 제금을 날 까닭이 있을까? 한 집안을 이루면서 자가용을 함께 쓴다면, 돈을 훨씬 아낄 뿐 아니라, 아낀 돈으로 훨씬 기쁜 나날을 누리지 않을까? 어버이와 아이가 한 집안을 이루면, ‘어른이 된 아이’가 새로운 아이를 낳을 적에, 아주 홀가분하면서 부드럽고 따스하게 ‘할머니 할아버지’가 ‘새 아이’를 맡아서 돌보리라.


  ‘새로 태어나는 아이’는 어버이 사랑뿐 아니라 할머니 할아버지 사랑을 받아야 한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는 어버이 슬기에다가 할머니 할아버지 슬기를 배워야 한다. 여러 어른이 한 집안에서 지내는 일은 서로서로 즐거우면서 아름다운 살림이 된다. 오늘날 도시 문명사회가 왜 ‘한 집안을 뿔뿔이 가르려 하는가’를 제대로 바라보면서 읽어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 슬기로움을 스스로 길어올리지 못하면서 인터넷이나 책이나 전문가나 학교 따위에서 얻으려 한다. 그러나 슬기로움은 스스로 길어올릴 수 있을 뿐, 다른 데에서는 찾을 수 없다. 어버이가 아이한테 물려주면서, 아이가 스스로 깨닫는 슬기이지, 책이나 지식이나 철학이나 종교나 학교에서는 아무런 슬기가 없다.


  우리가 돌아가는 ‘집’은 어디인가. 우리는 어느 집에서 무슨 살림을 가꾸는가. 우리는 우리 집을 어떤 보금자리로 가꾸는가. 4348.2.20.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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