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16 고맙다



  학자는 으레 책‘만’ 살핍니다. 책‘도’ 살필 수 있을 테지만, 책‘만’ 살피는 학자는 아주 조그마한 것만 아주 조그맣게 바라볼 뿐입니다. 이를테면, 훈민정음조차 없던 때까지 ‘한국사람이 쓰던 말’은 어떠한 책에도 거의 제대로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나마 훈민정음이라도 태어난 때부터 몇몇 지식인과 학자가 훈민정음을 빌어서 적은 한국말이 있으면, 이러한 ‘책’을 바탕으로 삼아서 말밑을 살핍니다.


  지난날 한국 사회에서 태어난 책은 거의 다 중국글인 한자를 빌어서 썼습니다. 정치를 하건 학문을 하건 문학을 하건, 지난날 사람들은 ‘한자’가 아니면 ‘글’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이들은 어떤 낱말로 “이녁이 나한테 넓게 베푼 마음을 흐뭇하게 여기는 뜻”을 나타냈을까요? 바로 ‘감사(感謝)’입니다. 그러면, 시골에서 흙을 만지면서 씨를 뿌리고 풀을 뜯으면서 아기한테 젖을 물리고 자장노래를 부르면서 베틀을 밟고 흙집에서 노래하던 사람도 ‘감사’ 같은 한자말(또는 중국말)을 썼을까요? 아니지요.


  아득히 먼 옛날부터 여느 시골마을 시골사람이 쓴 말은 ‘고맙다’입니다. ‘고마우이·고맙네·고마워·고맙소·고맙구마·고맙군·고맙습니다’처럼 ‘고마-’를 앞가지로 놓고 말끝을 달리하면서 내 뜻을 이녁한테 밝혔습니다.


  ‘고마-’는 “이녁이 나한테 넓게 베푼 마음을 흐뭇하게 여기는 뜻”을 나타내고, 이런 말을 할 적에는 어른도 아이한테 고개를 숙입니다. 잘 살펴야 하고, 잘 보아야 합니다. ‘고맙다’ 하고 말하는 사람은, 나이 여든 살이어도 여덟 살 아이한테 꾸벅 절을 합니다. 참말 ‘절’을 하지요. 절을 하는 까닭을 생각할 노릇입니다. 왜 절을 할까요? 이녁을 ‘섬기’거나 ‘모시’거나 ‘높이’려는 뜻으로 절을 합니다. 왜 이녁을 섬기거나 모시거나 높이려 할까요? 이녁이 나한테 ‘즐거움이나 기쁨이나 흐뭇함 같은 마음이 일어나도록 너른 사랑을 따스한 손길로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웃·동무)은 나한테 새로운 빛을 보여줍니다. 나는 새로운 빛에 눈을 뜨고, 새로운 빛에 눈을 뜨기에 기쁘거나 즐겁거나 흐뭇해요. 이리하여, 내 눈이 새롭게 뜨이도록 이끈 사람을 섬기거나 모시거나 높이려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저절로 일어나는 이 기운에 따라서 몸이 움직여 ‘절’을 합니다. ‘절’이라는 몸짓으로 나타나는 ‘이녁을 섬기거나 모시거나 높이려는 마음’을 바로 ‘고맙다’라는 말로 빙그레 웃으면서 보여줍니다.


  즐거움이나 기쁨이나 흐뭇함이 일어나도록 너른 사랑을 따스한 손길로 베푸는 사람은 어떠한 숨결일까요? 바로 ‘님’입니다. 이른바 ‘하느님’입니다. 내 앞에 있는 님(하느님)인 이녁한테 절을 하는 뜻은, 네가 바로 님(하느님)이기 때문이고, 네가 바로 님이기에 ‘고마-’라는 말을 빌어서 절을 합니다. 이리하여, ‘고맙다’와 같은 말마디로 절을 할 적에(인사를 할 적에)는, “너는 바로 하느님입니다” 하고 섬기거나 모시거나 높이는 뜻이 되지요.


  삶을 새롭게 보도록 이끌었기에 ‘나는 너를 섬길 만해’ 하고 느껴서 ‘고맙다’고 말합니다. 삶을 새롭게 짓는 길을 배웠기에 ‘나는 너를 모실 만해’ 하고 여겨서 ‘고맙다’고 말합니다. 삶을 새롭게 가꾸는 사랑을 알았기에 ‘나는 너를 높일 만해’ 하고 헤아려서 ‘고맙다’고 말합니다.


  ‘감사하다’ 같은 낱말을 쓰는 일이 잘못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한국사람은 중국말도 쓸 수 있고, 영어도 쓸 수 있으며, 일본말도 쓸 수 있어요. ‘아리가또(ありがとう)’나 ‘땡큐(thank you)’를 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외국말을 쓰듯이, ‘여러 외국말 가운데 하나’인 ‘感謝하다’를 쓸 수 있어요.


  다만, 한국말 ‘고마-(고맙다)’가 무엇을 뜻하고, 어떤 마음을 드러내려 하는가 하는 대목을 제대로 알면서 외국말을 함께 쓸 수 있어야, 비로소 내 넋이 제대로 열리면서 내 눈은 제대로 이웃을 바라보고, 나 스스로 나를 제대로 살필 수 있습니다. 내가 오늘 이곳에서 쓰는 말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제대로 쓰지 못한다면, 나는 오늘 이곳에서 어떤 넋을 키워서 어떤 삶을 지을 수 있을까요? 4348.2.12.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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