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슬란 전기 1 - 만화
아라카와 히로무 지음, 다나카 요시키 원작 / 학산문화사(만화)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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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464



바보스러운 칼부림 이야기

― 아르슬란 전기 1

 다나카 요시키 글

 아라카와 히로무 그림

 김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4.11.25.



  싸움은 언제나 다른 싸움으로 이어집니다. 작은 하나를 놓고 다투는 아이는 이내 다른 것을 놓고도 으레 다툽니다. 작은 다툼은 큰 다툼이 되고, 언제나 다투는 하루로 나아갑니다.


  사랑은 언제나 새로운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작은 하나를 놓고 나누는 사랑은 이내 새로운 사랑이 싹트도록 이끕니다. 작은 사랑은 큰 사랑이 되고, 언제나 사랑하는 하루로 빛납니다.


  이리하여, 싸움은 늘 다른 싸움을 찾기 마련입니다. 이쪽에서 싸움이 끝날 듯하면, 다른 쪽에서 싸움을 할 빌미나 구실을 찾지요. 싸움을 붙잡으면 싸움이 끝나지 않고, 지겹도록 이어지는 싸움에 지칠 무렵이면 어느새 힘을 잃고 죽음길로 접어듭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늘 새로운 사랑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이곳에서 나누는 사랑은 천천히 저곳으로 퍼집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랑이 자꾸 샘솟습니다. 이리하여 자그마한 사랑 씨앗 한 톨은 온누리를 그득그득 따뜻하게 채워서 다 함께 아름다운 이야기꽃으로 피어납니다.



- “허허허! 이 정도는 기술이라고도 할 수 없사옵니다! 그저 검의 기본동작일 뿐. 다만 그 기본을 단련하지 않고선 기술도 위력을 잃는 법. 기본을 갈고닦으시옵소서.” (11쪽)

- “하하하! 자네를 얕잡아보는 게 아닌가, 카슈바드?” “무슨 말씀을. 저를 얕잡아보는 게 아니라 이 녀석들이 전하를 진심으로 흠모해서입니다. 짐승이나 새는 상대하는 인물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 전하의 마음이 견실함을 이 녀석들도 잘 아는 게지요.” (17쪽)






  싸움처럼 바보스러운 짓은 없습니다. 서로 구렁텅이로 나아가는 짓이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으레 싸움에 휩싸입니다. 가만히 보면, 학교는 늘 싸움터입니다. 숫자를 놓고 싸우는 곳이 학교예요. 시험점수로 싸우고, 내신등급으로 싸우며, 더 높은 학교 이름값으로 싸웁니다.


  오늘날 사회를 놓고 본다면, 학교는 아이들한테 아무것도 안 가르치거나 못 가르칩니다. 아이들을 싸움터로 내모는 지식과 숫자는 보여주되, 삶을 가르치지 못하고 사랑을 가르치지 않아요.


  숫자싸움과 등수싸움과 성적싸움만 하던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경제싸움과 정치싸움과 문화싸움은 하겠지요. 사랑을 배운 적이 없으니 사랑을 나누지 못하고, 사랑을 가르치는 어른을 만나지 못했으니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도 사랑을 물려줄 줄 모릅니다.



- “이알다바오트 신께 충성을 다하고 이교도의 씨를 말려야 해!” “왜 그렇게까지 이교도를 증오하나?” “우리의 이알다바오트 신은 인간을 평등하게 대하셔! 하지만 너희는 어떻지? 사람 밑에 사람을 두는 이 노예 제도는 뭐지? 이알다바오트 신은 그러한 일을 용서하지 않으셔! 인간은 모두 평등해! 따라서 우리 신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너희 이교도들은 차별하고 죽여도 돼!” ‘앞뒤가 안 맞잖아!’ (35∼37쪽)




  다나카 요시키 님이 쓴 글에 아라카와 히로무 님이 만화라는 옷을 입힌 《아르슬란 전기》(학산문화사,2014) 첫째 권을 읽습니다. 책겉을 보면 퍽 조그마한 글씨로 ‘열다섯 살’이 안 되면 볼 수 없는 책이라고 적힙니다.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책을 펼치니, 열다섯 살이 안 된 아이가 보기에는 걸맞지 않다 싶도록 ‘죽이고 죽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중동을 무대로 삼은 ‘전쟁 대서사시’라고도 하는 “아르슬란 전기”라 하는데, ‘서사시(敍事詩)’는 “역사적 사실이나 신화, 전설, 영웅의 사적 따위를 서사적 형태로 쓴 시”라고 합니다. 그러면 ‘서사(敍事)’는 무엇일까요? 한국말사전을 뒤적이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음”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쟁 영웅과 얽힌 이야기를 꾸미지 않고 그대로 적은 시’가 ‘전쟁 서사시’인 셈입니다. 《아르슬란 전기》라 한다면, ‘아르슬란’이라는 사람과 얽혀서 싸움터에서 누가 영웅으로 남아서 이야기를 남겼느냐 하는 대목을 밝힌다고 할 테지요.



- “전하께 큰 폐를 끼쳤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상관없네. 그대는 옳은 소리를 한 것 아닌가?” “예. 칼란 장군도 저와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78쪽)

- “칼란! 왜 이러는가?” “까닭이 있거든. 슬프고 가엾은 왕자여. 너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만, 여기서 죽어 줘야겠다.” (124쪽)




  만화책 《아르슬란 전기》 첫째 권을 보면, 어느 날 싸움에서 이쪽과 저쪽 모두 몇 만에 이르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죽었다고 합니다. 한쪽은 12만 7천에 이르는 사람이 죽고, 다른 한쪽은 5만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고 해요.


  이날 죽은 사람은 왜 죽어야 했을까요. 이날 죽은 사람은 총알받이, 아니 칼받이나 창받이가 되어서 어떤 삶을 마감했을까요. 몇 만에 이르는 사람은 이제껏 무엇을 보람으로 여기면서 살다가, 하루아침에 칼이나 창을 맞아서 이슬처럼 사라져야 했을까요?


  전쟁을 일으키는 우두머리는 흔히 말하지요. 저쪽 나라에서 우리 비위를 거슬린다든지, 저쪽 나라는 못된 짓을 일삼으니 군대를 몰아서 다스려야 한다고 말해요. 저쪽 나라에서는 이쪽 나라를 보면서 거짓스럽거나 바보스러운 짓을 일삼는다고 말하고, 이쪽 나라가 하는 멍청한 짓은 따끔한 맛을 보여주어 다스려야 한다고 말해요.


  이쪽이나 저쪽은 서로 아끼거나 믿는 슬기로운 길을 걸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서로 죽이고 죽으면서 피를 흘리려 합니다. 함께 땅을 기름지게 일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서로 힘을 모아 아름다운 숲과 마을이 되도록 하지 않습니다.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즐겁고 아늑한 삶이 되도록 가꾸지 않습니다.



- 파르스 력 320년 10월 16일. 이날 아트로파테네 평원에서 기병 5만 3000명과 보병 7만 4000명이 전사하여 파르스는 국군 총 병력의 반을 잃었다. 승자가 된 루시타니아 군도 기병과 보병을 합쳐 5만 이상을 잃었다. (167∼168쪽)

- “그때의 비명이 아직도 귀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네. 이교도라고 해서 갓난아기를 죽인 자들에게 신은 축복을 내려 주시려 할까?” (170쪽)




  ‘전쟁 영웅’ 이야기를 그리는 책을 볼 때면 으레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죽이고 죽는 이야기’를 좋아할까요? 스스로 싸움터에서 총이나 칼이나 창에 맞지 않았으니, 이런 이야기를 좋아할까요? 팔다리가 잘려 보아야 이런 이야기를 도리질을 할 수 있을까요?


  이웃나라와 어깨동무를 할 생각은 왜 안 하거나 못 할까요? 전쟁무기를 만들거나 군대를 거느리려고 하는 일이 아닌, 삶을 가꾸고 사랑하는 데에 슬기와 힘과 겨를을 모으려고 하는 마음은 왜 못 품을까요?


  죽이려는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를 죽이려 하면서 끝내 스스로 죽는 길로 갑니다. 총이나 칼을 드는 사람은 스스로 총이나 칼에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젊은 날에는 다른 사람을 총이나 칼로 억누를는지 모르나, 나이가 들어 몸에서 힘이 빠지면 다른 사람이 휘두르는 총이나 칼에 맞아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느 때에 사랑으로 이웃을 보살피거나 아낀 사람은, 나중에 늙어도 이웃이 따사로운 사랑으로 아끼거나 보살펴 주기 마련입니다. 사랑을 심었으니 사랑이 돌아오지요. 전쟁과 미움을 심는 사람은 언제까지나 전쟁과 미움을 돌려받습니다. 전쟁에는 아군과 적군이 없습니다. 전쟁에서는 모두 바보스러운 칼부림만 있습니다. 4348.2.12.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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