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군포에서 내는 <책이 열리는 나무>에 싣는 우리 말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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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48. 이야기꽃 피우는 겨울에

― 말꽃을 피우는 바탕인 한국말사전



  봄에 피기에 봄꽃입니다. 겨울에 피는 꽃은 겨울꽃일 테지요. 그런데,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봄꽃·가을꽃’은 올림말로 나오지만, ‘여름꽃·겨울꽃’은 올림말로 안 나옵니다. 요즈음 한글맞춤법에서는 한국말사전에 안 나오는 낱말은 띄어서 적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봄꽃·여름 꽃·가을꽃·겨울 꽃’처럼 달리 적어야 할까 궁금합니다.


  한국말사전에 ‘놀이노래’라는 낱말은 나오지만 ‘어린이노래’라는 낱말은 안 나옵니다. ‘일노래’와 ‘들노래’라는 낱말을 한국말사전에서 찾을 수 있지만 ‘숲노래’나 ‘바다노래’라는 낱말은 한국말사전에서 찾을 수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들과 숲과 바다에서 부르는 노래를 ‘들노래·숲 노래·바다 노래’처럼 적어야 할까요?


  한국에도 ‘노숙자(露宿者)’가 무척 많이 늘었습니다. 그런데, 이 낱말은 깎아내리는 낱말이라 하면서 ‘노숙인(露宿人)’으로 고쳐서 써야 한다고도 합니다. 한자 ‘者’를 ‘人’으로 바꾸면 사람 대접도 달라진다고 여기는 셈입니다. 그런데, 한국사람은 예부터 ‘노숙’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집이 아닌 길바닥에서 자거나 쉬거나 지낼 적에는 ‘한데’라는 낱말을 썼으며, 집에서 잠을 못 자고 길바닥에서 잠을 자면 ‘한뎃잠’을 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추운 겨울에 집이 없이 길에서 오들오들 떨며 지내는 이웃은 ‘한뎃잠이’입니다. 조금 더 살피면, 집이 없는 이는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외로운 이들입니다. 사회에서 쫓겨났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떨꺼둥이’라는 낱말을 씁니다.


  가을이 저물 무렵, 그러니까 겨울 문턱에 시골에서는 고구마를 캡니다. 따뜻한 아랫목에 고구마 상자나 푸대를 놓고 겨우내 고구마를 삶아서 먹어요. 요새는 시골에서 비닐농사를 짓는 분이 매우 많기에 감자는 ‘비닐농사 감자’가 있고, ‘비닐을 안 쓰고 맨땅에 심어서 거둔 감자’가 있습니다. 고구마는 으레 ‘비닐 안 씌운 땅에서 키우는 고구마’인데, 땅바닥에 아무것도 씌우지 않으면 ‘맨땅’이라 합니다. 그렇지만, 농협이나 생협 같은 데에서는 한국말 ‘맨땅’을 안 씁니다. 일본에서 농사짓는 이들이 쓰는 한자말 ‘노지(露地)’를 빌어 ‘노지 감자’라고 해요. 왜 ‘맨땅 감자’라고는 말하지 않을까요? 왜 농협과 생협은 한국말을 알맞고 바르게 쓰려고 마음을 기울이지 못할까요?


  곰곰이 살피면, 농협이나 생협에서 일하는 분 가운데 책상맡에 한국말사전 한 권쯤 올려놓고 낱말을 알맞게 살피면서 쓰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여느 공공기관과 일터뿐 아니라, 동사무소나 학교에서도 책상맡에 한국말사전 한 권 살포시 놓고서 즐겁게 한국말을 꾸준히 익히고 배우면서 서류를 꾸미거나 글을 쓰는 분이 드물어요. 시나 소설을 쓰는 이가 아니라면 한국말사전을 거의 안 봅니다. 대학입시를 바라보는 수험생도 영어사전은 들추지만 한국말사전은 안 들춥니다.


  그런데, 한국말사전을 들추어도 뜻을 알 수 없기 일쑤예요. 이를테면 ‘파종’과 ‘씨뿌리기’를 들 수 있어요.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스한 봄이 오면 시골에서는 모두 씨를 뿌리려고 연장을 손질하고 땅을 고릅니다. 이러한 일을 가리키는 한자말 ‘파종(播種)’을 한국말사전에서 찾으면, “곡식이나 채소 따위를 키우기 위하여 논밭에 씨를 뿌림. ‘씨뿌리기’, ‘씨 뿌림’으로 순화”로 풀이하는데, ‘씨뿌리기’라는 낱말을 찾으면 “= 파종”으로 풀이해요. ‘씨뿌리기’로 고쳐써야 한다는 한자말 ‘파종’인데, 막상 ‘씨뿌리기’라는 낱말을 찾아보면 뜻풀이는 없이 ‘파종’이라는 낱말만 덩그러니 적어요. 그리고, ‘외롭다’를 찾으면 “홀로 되거나 의지할 곳이 없어 쓸쓸하다”로 풀이하고, ‘쓸쓸하다’를 찾으면 “외롭고 적적하다”로 풀이합니다. 낱말풀이가 돌림풀이입니다. 이래서야 한국말사전을 책상맡에 놓아도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기는 어렵습니다.


  ‘창피하다’와 ‘부끄럽다’와 ‘수줍다’가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려고 한국말사전을 살펴도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창피하다’는 “체면이 깎이는 일이나 아니꼬운 일을 당하여 부끄럽다”로 풀이하고, ‘부끄럽다’는 “(1) 일을 잘 못하거나 양심에 거리끼어 볼 낯이 없거나 매우 떳떳하지 못하다 (2) 스스러움을 느끼어 매우 수줍다”로 풀이하며, ‘수줍다’는 “숫기가 없어 다른 사람 앞에서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이 어렵거나 부끄럽다”로 풀이합니다. 말풀이가 이리저리 오락가락입니다. 더군다나, ‘창피하다’라는 한국말하고 소리값이 같다면서 ‘猖披’라는 한자에서 이 낱말이 생겼다고 적기까지 하는데, ‘猖披’라는 한자말은 “미쳐 날뛰다”를 가리킵니다. 옛사람이 한문으로 적은 글에서 ‘猖披’를 “옷고름이나 치마끈을 풀어놓고 죄어 매지 않은 것”을 가리키면서 쓴 적이 있다고 하지만, 입으로 읊는 소리가 같다고 해서 함부로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창피하다’는 얼굴이 깎여 고개를 들지 못하거나 숨고 싶은 마음을 나타냅니다. ‘부끄럽다’는 거리끼거나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일이 있거나 잘못을 했기에 다른 사람 앞에서 고개를 들기 떳떳하지 않거나 숨고 싶은 마음을 나타냅니다. ‘수줍다’는 다른 사람 앞에서 말을 하거나 몸짓을 보이기 어려운 마음을 나타냅니다.


  한국말사전은 한국말을 한국사람이 슬기롭게 살펴서 제대로 알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는 한국말사전을 옆에 즐겁게 놓으면서 말과 넋과 삶을 새롭게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부터 한겨레는 가을일을 모두 마치고 겨울이 되면, 집집마다 아궁이에 불을 때어 방바닥을 따숩게 하면서 온 식구가 이불을 함께 뒤집어쓰고 모여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어요. 겨울은 이야기꽃이 피는 철입니다. 겨울에 들과 숲에서는 동백꽃이나 복수초가 피기도 하는데, 무엇보다 겨울에는 이야기꽃이 핍니다. 봄은 들에 들꽃이 흐드러지는 철이요, 겨울은 우리 스스로 이야기를 짓고 가꾸면서 이야기꽃과 생각꽃과 사랑꽃과 꿈꽃을 아름다이 일구는 철이에요.


  말꽃을 피울 수 있는 겨울을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스스로 이야기 씨앗 한 톨을 곱게 심어서 이야기 열매를 알차게 맺는 겨울이 되기를 바랍니다. 겨우내 노래꽃, 춤꽃, 글꽃, 그림꽃, 사진꽃 모두 곱게 피울 수 있기를 바라요. 4347.11.25.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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