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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결 오시듯 ㅣ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14
이봉환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12월
평점 :
시를 노래하는 시 91
내가 너를 바라보듯이
― 밀물결 오시듯
이봉환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13.12.30.
아침에 일어나면 맨 먼저 눈을 뜨지요. 눈을 뜨고 나면 오늘 할 여러 가지 일이 떠오릅니다. 어느 일부터 즐겁게 할까 하고 생각합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킵니다. 기지개를 켜면서 몸을 비트는데, 가만히 보면 이런 ‘몸 비틀기’는 춤사위입니다. 괜히 춤을 추고, 조용히 이부자리에서 벗어나 부엌으로 가면서 춤을 춥니다. 덩실덩실 춤을 추며 부엌에 와서 오늘 아침에 지을 밥을 생각합니다. 흐르는 물을 한 모금 입에 머금습니다. 마당으로 내려와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동이 텄으면 동 튼 하늘을 보고, 아직 어두우면 어두운 하늘을 봅니다.
이제 마당을 둘러싼 우리 집 나무를 바라보고, 뒤꼍에 가서 뒤꼍 나무한테 인사합니다. 나무한테 인사하러 마당과 뒤꼍을 거닐면서 어깨춤을 춥니다. 왜냐하면, 우리 집 나무한테 내 춤사위를 보여주면서 나 스스로 홀가분한 몸이 되려 하니까요.
.. 아버지 혼자 고향 흙집 골방에서 컥컥 울기도 하셨다는 것을 나는 안다. 아버지 속이 타고 얼굴 해쓱해지도록 서울 놈은 고향에 그늘 한 폭 드리워주지 않았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아버진 그 ‘큰 그늘 덕’을 톡톡히 보셨다 .. (서울놈들)
아침 낮 저녁으로 우리 집 나무를 돌아보면, 아침 낮 저녁으로 이 나무가 얼마나 야무지게 자라는가 하고 느낄 만합니다. 하루 내내 아이들을 마주하면서 이 아이들이 날마다 얼마나 튼튼하게 자라는가 하고 느낍니다. 늘 바라보니 ‘키가 얼마나 크’고 ‘몸이 얼마나 자라는가’를 못 느낀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이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한참 만에 보아야 ‘키가 부쩍 자란’ 줄 느끼지 않아요. 아이들이 아침저녁으로 옷을 갈아입는 모습만 보아도 키가 어느 만큼 자라는가 느낄 수 있고, 아이들을 씻기고 입히면서도 얼마든지 키와 몸을 헤아립니다. 아이들 손을 잡고 마실을 다니는 동안에도 이 아이들이 어느 만큼 자라는가를 깊이 깨닫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몸에 달린 눈’으로만 서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보는 눈’이 있기에 서로 사랑하고 헤아릴 수 있습니다. 서로 아끼고 섬기는 마음은 바로 ‘마음으로 보는 눈’으로 기릅니다. 몸으로 보는 눈으로는 그저 몸만 지켜볼 뿐입니다.
.. 청소 시간 비질에 열심이던 다영이가 또록이 묻는다. // 선생님, 누군가를 좋아하면 진짜 가슴이 두근거려요? / 왜? 너도 요새 누군가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냐? / 아니요, 책에서는 그러던데 진짜도 그러나 궁금해서요 .. (피어버린 꽃에는 안 보이는 떨림이)
이봉환 님이 빚은 시집 《밀물결 오시듯》(실천문학사,2013)을 읽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시골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이봉환 님입니다. 그러니, 이 작은 시집을 보면, 이봉환 님이 날마다 마주하는 ‘시골 아이’ 몸짓과 웃음과 눈물이 짙게 드러납니다. 시집 《밀물결 오시듯》에는 이봉환 님이 나고 자란 시골 삶터 이야기가 흐르는 한편, 이봉환 님이 맡아서 가르치는 시골 아이 이야기가 흐릅니다.
.. 바느질에 갇힌 어머니 한숨이 솜이불에 남아서 / 겨우내 우리 몸은 포근하였던 것 / 그 많은 날들을 잠들 수 있었던 것 .. (밀물결 오시듯)
내가 너를 바라보듯이 네가 나를 바라봅니다. 내가 너를 사랑으로 바라보듯이 네가 나를 사랑으로 바라봅니다. 가는 말이 고우니 오는 말이 곱다는 옛말은 참말입니다. 내가 너한테 사랑을 보내는데, 네가 나한테 미움을 보내지 못합니다. 더러, 네가 나한테 미움을 보낼 수 있을 테지요. 그러나, 나는 압니다. 네가 나한테 미움을 보내더라도, 이 미움은 ‘사랑이 깃든 미움’인 줄 압니다. 그래서, 네가 너한테 사랑을 보냈을 적에 네가 나한테 미움을 보내더라도 네가 밉지 않아요. 반가우면서 그예 사랑스럽습니다.
사랑을 심어서 사랑을 가꿉니다. 사랑을 가꾸어서 사랑을 거둡니다. 사랑을 거두어서 사랑을 갈무리합니다. 사랑을 갈무리한 뒤 겨울을 나고, 겨울을 다 나고 나면 새로운 봄에 사랑을 새롭게 심습니다.
씨앗을 심는 사람이기에, 볍씨도 심고 사랑도 심으며 꿈도 심습니다. 이야기도 심고, 노래도 심으며, 시(글)도 심습니다. 시집 한 권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철을 고루 누린 삶이 묻어나는 노랫가락입니다.
.. 지선이와 지은이는 복도를 지나 당당하게 집으로 갑니다. 맨날 거짓말하고 바른 행동 안 하는 쟤네들과는 앞으로 같이 놀아주지도 않을 작정입니다 .. (왕따)
너와 나는 지구사람입니다. 너와 나는 지구이웃입니다. 너와 나는 지구동무입니다. 너와 나는 지구사랑이고, 지구꿈이며, 지구노래입니다. 이 별에서 함께 어깨를 겯고 씩씩하게 걷습니다. 너와 나는 길동무요, 때때로 서로 길잡이가 되어 줍니다. 어느 때에는 서로 이슬떨이가 되고, 언제나 살가운 너나들이로 지냅니다.
네가 나한테 보내는 사랑을 받으니, 나도 너한테 사랑을 보냅니다. 아주 마땅해요. 사랑받은 사람은 사랑을 보냅니다. 사랑을 물려받은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어른이 되어 새로운 아이를 낳고는 새로운 사랑을 물려줍니다. 싯말 한 마디는 언제나 사랑으로 씨앗을 심는 손길로 씁니다. 4348.2.4.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