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숟가락 7
오자와 마리 지음 / 삼양출판사(만화)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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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449



언제나 이곳에서 함께

― 은빛 숟가락 7

 오자와 마리 글·그림

 노미영 옮김

 삼양출판사 펴냄, 2014.12.8.



  해가 바뀌어 여덟 살로 접어든 큰아이가 문득 묻습니다. “아버지, 벼리 이제 여덟 살이야?” “응, 여덟 살이야.” 지난해 이맘때를 떠올립니다. 그러께 이맘때도 떠올립니다. 다섯 살에서 여섯 살로 접어들 무렵에는, ‘여섯 살’이 아니고 ‘다섯 살’이라고 박박 우겼습니다. 여섯 살에서 일곱 살로 접어들 무렵에는 박박 우기지는 않았으나, 살짝 못마땅하다는 느낌이면서도 이내 새로운 숫자를 받아들였습니다.


  여덟 살로 접어든 큰아이한테 숫자읽기나 한글읽기를 따로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큰아이가 궁금해 하면 비로소 살짝 알려줍니다. 요즈막에 시곗바늘에 퍽 눈길을 두기에 굵고 짧은 바늘과 가늘고 긴 바늘이 어떻게 다른가를 알려주고, 두 바늘이 지나가는 숫자판은 똑같지만, 똑같은 숫자판을 다르게 읽는다고 알려줍니다. 다만, 여느 어른들이 으레 말하듯이 “여섯 시 육 분”처럼 알려주지는 않고, “여섯하고 여섯이야.” 하고만 알려줍니다.


  어느덧 큰아이와 여덟 해째 맞이하며 누리는 나날을 돌아보니, 어버이는 참말 아이한테 꼬치꼬치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고 가르칠 일이 없습니다. 어버이 스스로 내 삶을 슬기롭게 가꾸면 아이도 아이 나름대로 제 삶을 슬기롭게 가꿉니다. 어버이 스스로 내 삶을 엉성하게 팽개치면 아이도 아이 나름대로 아무렇게나 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버이가 제 삶을 팽개치더라도, 아이는 어버이와 달라 아이 나름대로 기운을 내어 새로우면서 즐겁게 삶을 지으려 하기도 합니다.





- “오늘은 ‘형아 유치원’에서 뭐 해?” “그림책 가져왔어. ‘크리스마스 전날 밤’.” (13쪽)

- “나, 나는, 나 있잖아, 정말은 산타 할아버지가 어쩌면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끔 생각했어!” “그럼, 오늘은 산타 할아버지께 편지를 쓰자.” (15∼16쪽)

- ‘세상에서는 크리스마스이브지만 나한테는 생일이기도 해서, 차마 내가 먼저 만나자고 할 수는 없어. 다만, 지금 뭐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것만이라도 좋으니까 알려줬으면 좋겠어.’ (18쪽)



  일거리가 많은 날에는 아이만 먼저 재운 뒤, 늦도록 일손을 붙잡습니다. 아이들은 저희끼리 먼저 잠들고 싶지 않아, 자꾸 아버지를 부릅니다. 어버이로서 아이를 바라보자니, 아이끼리 재우고 싶지 않기도 합니다. 일은 일이되 나중에 하자고 생각하면서, 먼저 오늘 이곳에서는 아이와 잠자리를 누리자고 생각합니다. 열이면 열 언제나 아이 쪽으로 움직입니다.


  두 아이 사이에 누워서 이불깃을 여미고 조잘조잘 떠들다가 노래를 부릅니다. 잠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생각에 잠깁니다. 이렇게 아이들 사이에 안겨 노래를 부르는 삶이란 대단히 기쁘며 놀랍구나.


  테이프나 시디나 인터넷으로 노래를 틀면 한 시간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이쁘장하거나 듣기 좋다는 어린이노래라 하더라도 기곗소리를 한 시간 넘게 듣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아마 웬만한 기곗소리 노래물결은 사람 귀에 썩 내키지 않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내가 입으로 소리를 내어 아이와 함께 노래를 부르면, 한 시간이 아닌 서너 시간 노래를 불러도 따분하거나 힘들지 않습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너덧 시간이나 대여섯 시간 기차나 버스를 타야 할 적에, 이 아이들이 기차나 버스에서 따분해 하거나 멀미가 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러니까 그저 즐겁게 먼먼 마실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참말 그치지 않고 노래를 부르곤 합니다. 작은아이는 자동차를 좋아해서 자동차 바퀴나 기차 바퀴 구르는 소리를 딱히 거슬려 하지 않지만, 큰아이는 이런 소리를 꽤 거슬려 합니다. “버스 소리 시끄러워”라든지 “기차 소리 시끄러워” 하고 말하는데, 큰아이가 이런 말을 하면 이런 소리를 한귀로 흘립니다. 못 들은 척해요. 이러면서 나즈막하게 노래를 부릅니다. 이런 소리가 나건 저런 소리가 시끄럽건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하고 자꾸 읊으면 우리한테는 ‘시끄러워’만 찾아오더군요. 조잘조잘 떠들거나 놀이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면 우리한테는 이야기와 놀이와 노래가 찾아와요.





- “그나저나 두 사람은 언제나 맛있어 보이는 도시락을 먹더군요.” “이거요? 형이 만들어 주는 거예요.” (25쪽)

- “배고프지? 밥 먹을까? 오므라이스야.” “오므라이스?” “응. 리츠가 너만 할 때에 무척 좋아하던 음식이란다. 넌?” “좋아해요!” (121쪽)

- “하지만 말이다. 어른이 되는 건 기쁘지만, 곤란할 때에 아무것도 의논하지 않는 건 쓸쓸해.” “떳떳하지 못해서 얘기하지 못했어요.” “바보구나. 엄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네 편이야.” (125∼126쪽)



  오자와 마리 님이 빚은 만화책 《은빛 숟가락》(삼양출판사,2014) 일곱째 권을 읽습니다. 일본에서는 열째 권이 진작에 나왔으니, 번역이 퍽 더딥니다. 일본말로 된 책을 ‘일본 아마존’에서 살까 하다가 그만두었는데, 일본에서 나온 여덟째 권 겉그림이나 아홉째 권 겉그림을 보면,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흐를는지 헤아릴 만합니다.


  그러니까, 만화책 《은빛 숟가락》에 나올 이야기는 앞이 모두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서로 어떻게 얽혀서 어떤 사랑을 길어올리는가 하는 대목이 또렷합니다.


  그러면, 앞으로 나올 이야기가 알 만하니, 이 만화책은 안 보아도 될 만할까요? 흔한 말로 ‘뻔한 줄거리’라 할 만하니, 이 만화책은 대수롭지 않을까요?


  《은빛 숟가락》을 천천히 두 차례 읽고 나서 가만히 생각합니다. 우리가 함께 짓는 사랑은 어느 하루도 뻔하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아이를 아끼는 마음이나, 아이가 어버이를 섬기는 마음은 뻔하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아이한테 밥을 지어서 먹이는 마음이나, 아이가 어버이와 함께 밥을 즐기고 싶은 마음은 뻔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뻔한 이야기는 있습니다. 이를테면, 정치와 경제와 스포츠와 문학과 예술은 뻔합니다. 교육과 학문과 철학과 종교는 뻔합니다. 전쟁무기를 건사하는 군부대 이야기라든지, 대통령이나 정치꾼이나 시장이나 군수 같은 사람이 기자를 불러모아 읊는 이야기는 모두 뻔합니다. 신문에 나오고 방송에 나오는 이야기는 참말 뻔합니다.





- ‘기쁜 듯이 돕는 루카와 내 어린 시절이 겹쳐졌다.’ (127쪽)

- ‘형제끼리 둘러앉은 식탁은 활기차고 북적였으며 즐거웠다. 돌아갈 때는 이미, 집을 뛰쳐나왔을 때의 기분 따위는 잊어버렸다.’ (155쪽)

- “나, 아빠랑 엄마가 매일 밤 심각하게 얘기하시기에 신경 쓰여서 몰래 엿들었더니 아빠가 진 빚 갚는 얘기였어. 진심으로 안 듣는 게 좋았다고 생각했지.” (156쪽)



  아이들 사이에 누워서 노래를 부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잠듭니다. 이제껏 여덟 해를 이렇게 삽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살리라 생각합니다. 자다가 문득 잠에서 깰 때에는 아이들이 이불을 걷어찬 때입니다. 두 아이가 훨씬 어릴 적에는 기저귀를 갈거나 밤오줌을 누이려고 삼십 분마다 잠에서 깼습니다. 두 아이 모두 밤오줌을 잘 가려 주니 밤마다 한시름을 덜되, 요새는 이불깃 여미느라 부산합니다.


  아이들은 자다가 잠꼬대를 하더라도 바로 옆에 어버이가 있는 줄 알기에 다시 깊이 잠듭니다. 꿈에서 무슨 놀이를 하다가 놀라더라도 바로 옆에 어버이가 가슴을 토닥이면 다시 새근새근 꿈나라로 돌아갑니다.


  어제 낮에 큰아이를 씻길 적에 큰아이가 아버지한테 묻습니다. “아버지도 어릴 적에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씻겨 주었어? 몇 살 적에 씻겨 주었어?” 머지않아 큰아이는 혼자 씻을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큰아이는 이제 혼자 씻고 싶기 때문입니다. 어버이 손길을 받지 않더라도 혼자 씻고 싶으니 늘 이러한 생각을 하고, 이러한 생각대로 몸이 무럭무럭 튼튼하게 자랍니다. 큰아이가 혼자 씻을 수 있을 때라면, 아마 큰아이가 도마질도 하고 다른 부엌일도 야무지게 거들 수 있을 때가 되리라 느낍니다. 큰아이가 혼자 두발자전거를 탈 무렵 혼자 씻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큰아이가 혼자 시골버스를 타고 읍내를 다녀올 수 있다면, 아마 그즈음 혼자 씻을는지 모릅니다.





- “무슨 사정인데요?” “그만둬.” “뭐?” “오빠를 낳아 준 사람을 나쁘게 말하지 마.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아. 오빠 부모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어. 왜냐면 나한테 오빠는 앞으로도 쭉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변함없이 오빠인걸.” (177∼178쪽)

-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식탁 풍경이었다. 형이 핏줄이 이어지든 이어지지 않았든, 그런 일이 있든 없든, 밥은 맛있고 딸기는 새콤달콤하고, 역시 가족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83쪽)



  언제나 이곳에서 함께 사는 곁님입니다. 두 어버이는 서로 곁님이고, 아이와 어버이도 서로 곁님입니다. 우리 집을 둘러싼 나무도 곁님이고, 작은 들풀과 들꽃도 곁님입니다. 우리 집 처마에서 겨울나기를 하는 참새와 딱새도 곁님이요, 구름과 냇물과 바람도 곁님입니다.


  밤이 깊으면서 별빛은 더욱 밝고, 밤이 깊으니 아이들 숨소리는 한결 고릅니다. 하루는 기쁘게 저문 뒤, 다시금 기쁘게 찾아옵니다. 날이 밝으면 온갖 작은 새들이 우리 집 마당에서 재잘거리듯이 큰아이가 먼저 깨고 작은아이가 곧바로 깰 테지요. 두 아이는 ‘오늘은 무엇을 하며 놀까?’ 하는 생각으로 하루를 열 테지요. 언제나 이곳에서 함께. 4347.1.13.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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