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착한 마음으로 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어른들은 아이들더러 ‘착하’게 살면 돈이나 이름이나 힘을 얻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착하게 살면서 돈을 얻는 길이나, 착하게 일하면서 이름을 펴는 길이나, 착하게 어깨동무하면서 힘을 쓰는 길은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어른들 스스로 착한 삶을 모르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착하게 살기에 돈을 못 벌지 않습니다. 돈을 벌 뜻이 없을 때에 돈을 못 벌 뿐입니다. 그러니까, 착하게 살면서 돈을 벌고 싶다면, 마음과 몸과 넋과 삶이 모두 착한 숨결이 되도록 다스리면서 돈을 벌면 됩니다.


  ‘싼값’을 흔히 ‘착한 값’으로 잘못 생각하곤 합니다. 다른 가게보다 눅은 값으로 팔아야 ‘착한 값’이 아닙니다. 에누리를 더 한다면, 그저 에누리를 더 할 뿐이요, 값을 후려칠 뿐입니다. 남보다 싸게 물건을 판다면 착한 일이 될까요?


  남보다 싸게 물건을 팔면 아마 남보다 물건을 잘 팔는지 모릅니다. 제값을 깨고 싼값으로 후려치면 남보다 장사가 잘되거나 벌이가 나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제값을 깨는 짓이 착하다고 할 만할까요? 다른 사람은 장사가 안 되도록 제값을 깨는 짓은 참말 착하다고 할 만할까요? 다른 사람은 돈을 못 벌도록 하면서 싼값을 내세우는 일이 그야말로 ‘착한 값’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한국말사전을 보면 ‘착하다’를 “말씨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로 풀이합니다. 그러니까, 싸게 후려치는 값은 ‘착한 값’이 될 수 없습니다. 장사를 하는 모든 사람이 서로 살림을 북돋울 수 있도록 이끄는 제값이 될 때에 비로소 ‘착한 값’이 됩니다. 과자 한 봉지이든 능금 한 알이든 책 한 권이든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올바른 길을 아름답게 걸을 때에 비로소 ‘착하다’고 합니다. 이른바 ‘공정무역’은 ‘착한 무역’이 될 텐데, 왜 착한 무역이 되느냐 하면, 땀흘려 일하는 사람한테 제몫을 찾아 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옳고 바르면서 아름다울 때에 비로소 착합니다. 옳고 바르기만 해서는 착하지 않고, 옳고 바름에 아름다움이 더해야 착하다고 할 수 있어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이 빚은 어린이문학 《마디타》(문학과지성사,2005)를 읽으면, “마디타도 자기가 착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착한 마음일 때의 느낌이 참 좋았다(99쪽).”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아이는 언제 스스로 착하다고 느꼈을까요. 아이는 착하다고 느낄 적에 어떤 마음이 되었을까요. 스스로 착하구나 하고 말하면서 어떤 얼굴을 지었을까요.


  회사에서 일하거나 학교에서 가르치는 우리 어른들은 날마다 어떤 몸짓과 얼굴짓으로 이웃을 마주하는지 궁금합니다. 다달이 받는 일삯을 제대로 챙길 수 있으면 된다는 마음일까요, 아니면 언제나 환하게 웃는 마음일까요. ‘감정노동’이라고 하는 고된 일에 짓눌리는 삶일까요, 아니면 스스럼없이 노래하며 일하는 삶일까요.


  내 삶은 남이 지어 주지 않습니다. 내 삶은 늘 내가 스스로 짓습니다. 내 일은 남이 시켜야 하지 않습니다. 내 일은 늘 내가 스스로 찾아서 합니다. 배고픔은 내가 스스로 느끼지, 시계가 알려주지 않습니다. 배고파서 차리는 밥은 손수 지어서 손수 수저를 들어 입에 넣어 먹지, 기계가 모든 얼거리를 맡아 주지 않습니다. 남이 내 입에 밥술을 떠넣어 준다 하더라도, 내 몸이 스스로 움직여서 밥을 삭여야 기운을 얻습니다.


  다른 사람이 책을 읽어 줄 수 있을 테지요. 그렇지만, 언제나 내가 스스로 귀여겨들어 마음으로 삭여야 합니다. 나 스스로 삭이지 않으면 어느 책을 골라서 읽거나 듣더라도 내 것이 안 됩니다. 추천도서나 명작도서를 읽어야 내 마음이 살찌지 않아요. 어느 책을 읽든 나 스스로 마음을 움직여서 삭여야 합니다. 어느 책을 손에 쥐어 읽더라도 내 마음을 내가 스스로 움직여서 이야기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붕 위에서 보니 강물이 저 멀리 굽이를 도는 데까지 보이고, 물 위로 가지를 축 늘어뜨린 수양버들도 보였다. 또 강기슭을 따라 죽 늘어선 집들과 정원들이 다 보였다. 울긋불긋 물든 가을 나뭇잎들이 참 아름답고, 가을 하늘은 한없이 맑고 푸르렀다(71∼72쪽).” 같은 대목을 가만히 되새깁니다. 냇물을 바라보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수양버들을 보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가을 나뭇잎과 이웃집과 뜰을 바라보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내가 내 눈으로 바라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내가 내 살갗으로 가을바람을 느끼고 겨울바람을 느낍니다. 겨울에는 차가움을 느끼고, 봄에는 따스함을 느끼며, 여름에는 시원함을 느끼고, 가을에는 푸근함을 느낍니다. 달력이나 시계가 알려주는 철이 아니라, 해가 흐르고 달이 흐르면서 바뀌는 날을 우리가 몸소 느끼면서 헤아립니다.


  그러니까, 착한 삶이 되자면 내가 오늘 하루를 착하게 가꾸어야 합니다. 고운 마음이 되고 고운 말을 들려줍니다. 바른 몸짓을 하고 바른 눈짓과 손짓을 합니다. 상냥한 몸가짐이 되면서 상냥한 목소리가 됩니다. 이쁘장하다는 아가씨를 뽑는다고 하는 자리에서 흔히 ‘참(진)·착함(선)·고움(미)’ 세 가지를 살핀다고 하는데, 참답고 착하며 고운 숨결일 때에 비로소 사람다운 모습입니다. 얼굴이나 몸매가 이쁘장할 때에 사람다운 모습이 아니라, 삶을 참답고 착하면서 곱게 가꿀 때에 사람다운 모습입니다.


  어린이와 푸름이가 학교를 다닐 적에도 참과 착함과 고움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어른이 일터에서 일을 할 적에도 참과 착함과 고움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교사는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참과 착함과 고움을 가르치면서 몸소 보여주어야 합니다. 공공기관이든 공장이든 회사이든 어디이든, 우리 어른은 저마다 참과 착함과 고움을 몸으로 맞아들이고 마음으로 삭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이문학 《마디타》에 나오는 마디타라는 아이는 “오늘 날씨가 참 아름답다고, 꼭 노래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런 날씨에는 누구나 아주 착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될 것 같았다(196쪽).” 하고 혼잣말을 하고 혼잣생각을 합니다. 스스로 느낀 착함과 사랑스러움이 밑거름이 되어 스스로 노래를 부릅니다. 학교에서 음악 시간이 되기에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저절로 샘솟는 노래입니다. 길을 가면서 노래를 하고, 밥을 짓거나 심부름을 하면서 노래를 합니다. 동생이나 언니와 놀면서 노래를 하고, 소꿉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노래를 합니다. 편지를 쓰면서 노래를 하고, 잠자리에 들면서 노래를 합니다. 삶이 온통 노래일 적에는 삶이 온통 사랑입니다. 삶이 온통 사랑이라면 서로 아끼고 보살피는 마음일 테지요. 내 이웃들 누구나 오늘 하루를 착한 마음으로 맞이하면서 가꿀 수 있기를 빕니다. 4347.12.2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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