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과 ‘헐다’



  헌책방이라는 곳에서는 헌책을 다룬다. 헌책이란 ‘헌(헐다) + 책’으로 엮은 낱말이다. 그러니, 헌책을 헤아릴 적에는 ‘헐다’라는 낱말이 어떤 뜻인지 살펴야 한다. 한국말사전을 살펴본다.



 헌책 : 이미 사용한 책

 헐다(헌)

 1. 몸에 부스럼이나 상처 따위가 나서 짓무르다

  - 피곤하면 입 안이 금방 헌다

 2. 물건이 오래되거나 많이 써서 낡아지다

  - 그 천막은 너무 헐어서 쓸 수가 없다



  한국말사전에서는 ‘헌책’을 “예전에 일찌감치 쓴 책”으로 풀이한다. 이 뜻풀이는 나쁘지 않다. 그러나 올바르다고까지 하기는 어렵다. ‘헌책’이란 무엇인가를 살핀다면 제대로 풀이하지 못했기에 올바르지 못하다. 다만, 예전에 일찌감치 썼다는 대목을 건드렸으니 틀린 말풀이는 아니다.


  그런데, ‘헐다’라는 낱말을 살피면 “오래되거나 많이 써서 낡아지다”로 풀이한다. 다시 ‘낡다’라는 낱말을 살펴야 할 텐데, ‘낡다’는 “(1) 물건 따위가 오래되어 헐고 너절하다 (2) 생각이나 제도, 문물 따위가 시대에 뒤떨어져 새롭지 못하다”를 뜻한다고 한다. ‘낡다 (1)’에 ‘헐다’라는 낱말이 다시 들어가지만 ‘너절하다’라는 낱말이 새로 있다. ‘너절하다’를 다시 살피면, “(1) 허름하고 지저분하다 (2) 하찮고 시시하다”를 뜻한다고 한다.


  한국말사전 뜻풀이를 헤아린다면, ‘헐다’는 “오래되거나 많이 써서 지저분하거나 하찮거나 시시하거나 새롭지 않다”를 가리킨다고 할 만하다. 한국말사전 뜻풀이대로만 헤아리면 ‘헌책’은 “지저분하거나 하찮거나 시시하거나 새롭지 않은 책”이 되고 만다. 비록 한국말사전에서 ‘헌책’을 따로 올림말로 삼아 “이미 사용한 책(예전에 일찌감치 쓴 책)”으로 풀이하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말풀이는 옳을까? 옳지 않다. 한국말사전에서 ‘헐다’를 제대로 풀이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헐다’라는 낱말을 “지저분하거나 하찮거나 시시하거나 새롭지 않은” 뜻이나 느낌으로만 받아들이고 만다.


  그런데, 정작 헌책이란 어떤 책인가. 새책방에서 다루는 책을 누군가 장만하면, 이 책은 이때부터 ‘새책’이 아닌 ‘헌책’이다. 누군가 한 번 손을 대면, 다시 말하자면 사람 손을 한 번 타면 ‘헌책’이다. 옷집에서 다루는 옷도 누군가 한 번 손을 대어 입으면 ‘헌옷’이다. ‘헌책’이나 ‘헌옷’은 달리 ‘헌-’을 붙이지 않는다.



 중고(中古)

 1. 이미 사용하였거나 오래됨

 2. = 중고품

 3. 그리 오래지 아니한 옛날

 중고품(中古品) : 좀 오래되거나 낡은 물건



  헌책방지기 가운데 ‘헌책방’이라는 이름을 썩 못마땅해 하거나 달가이 여기지 않는 분이 있다. 이분들은 ‘중고서적’이라는 이름을 쓰시곤 한다. 헌책방을 ‘헌책방 문화’나 ‘책 문화’처럼 바라보거나 이야기하지 않던 지난날에는 더더욱 ‘헌책방’이라는 이름을 안 쓰려 했고, 거의 모두 ‘중고서적’이라는 이름을 쓰려 했다.


  헌책방지기라고 해서 책을 안 읽거나 사전을 안 뒤지지 않는다. 헌책방 일을 하면서 으레 한국말사전을 뒤적였을 텐데, 말풀이를 보고 얼마나 골이 나거나 마음이 다쳤을까. 한국말 ‘헌책·헌책방’을 버리고 굳이 ‘중고도서·중고서적’ 따위 한자말을 쓰려고 한 뜻을 알 만하다. 한국말사전에서는 한자말 ‘중고(中古)’를 “이미 사용하였거나 오래됨”으로만 풀이한다. ‘중고품’은 “좀 오래되거나 낡은 물건”으로 풀이하니, 여기에는 ‘낡은’이라는 말이 깃들지만, ‘-거나’로 잇는다. ‘중고도서’라 하면 “한 번 쓴 책”이나 “좀 오래된 책”을 가리키는 셈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한국말을 다루는 학자뿐 아니라, 책을 다루는 학자까지도, ‘헐다(헌)’와 ‘헌책’ 말풀이를 올바르게 다루거나 바로잡으려고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깝다고 할 텐데, 한국말 학자와 책을 다루는 학자는 ‘새책’이라는 낱말조차 한국말사전에 안 싣는다. ‘헌책’은 올림말이지만 ‘새책’은 올림말이 아닌 모양새는 참 얄궂지 않은가? 말이 될까? 그런데, ‘새집’은 한 낱말로 한국말사전에 나오는데, ‘헌집’은 따로 올림말이 아니다. 아이들이 두꺼비집 노래를 부를 적에 “헌 집 줄게 새집 다오”처럼 띄어쓰기를 해야 한다는 소리이다. 책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는 “새 책방에 있는 새 책을 장만해서 즐겁게 읽은 뒤에, 헌책방에 팔아서 새로운 헌책을 한 권 장만했어요.”처럼 띄어쓰기를 해야 하는 셈이다.


  한국말을 제대로 모르고, 책을 제대로 모르는 어떤 사람은 ‘헌 책방’처럼 띄어쓰기를 잘못 하기도 하는데, ‘헌 책방’처럼 띄어서 쓰면 “책방이 헌 곳”이라는 소리가 되고 만다. 헌책방은 헌책을 다루는 곳이지 “책방이 지저분하거나 하찮거나 시시하다”고 할 수 없다. ‘헌 책방’처럼 띄어서 쓰는 사람은 아주 크나크게 잘못하는 셈이다. 그래서 ‘헐다(헌)’라는 낱말을 내 나름대로 새롭게 풀이를 해 본다. 앞으로 여러 한국말사전이 이렇게 바로잡으면서 고쳐야 한다고 본다.



헐다(헌)

1. 많이 썼기에 앞으로 오래 쓸 만하지 않다

 - 너무 헌 것이라 다른 사람한테 그냥 주지도 못하겠어

2. 살갗이 다치거나 덧나서 진물이나 부스럼이 나다

 - 다친 자리를 자꾸 건드리니까 아물지 않고 허는 듯해

3. 한 번 쓰거나 다른 사람 손을 거치다

 - 헌책방에는 오래된 헌책도 있고 얼마 안 된 헌책도 있다

4. 오랫동안 쓰거나 오랜 나날이 흐르다 (처음으로 만든 지 오래되다)

 - 우리 집에 헌 재봉틀이 한 대 있어



  한국말사전은 ‘헐다(헌)’라는 낱말을 제대로 풀이해야 한다. 오늘날 여러 한국말사전은 ‘헐다’를 두 가지로만 풀이하지만, 뜻과 쓰임새와 느낌에 따라 네 가지로 나누어야 옳다고 느낀다. 첫째, “많이 써서 오래 쓸 만하지 않다”로 또렷하게 한 가지 쓰임새가 있다. 그리고, “한 번 쓰거나 다른 사람 손을 거치다”로도 널리 쓰는 대목을 헤아려서 담아야 한다. 여기에, “오랫동안 쓰거나 오랜 나날이 흐르다”나 “처음으로 만든 지 오래되다”와 같은 뜻을 따로 갈라야 한다.


  헌 재봉틀은 어떤 물건일까. 헌 책상이나 헌 자전거는 어떤 물건일까. 많이 써서 앞으로 쓸 만하지 않을 수 있으나, 그저 오래된 것일 수 있으며, 한 번 쓰고 묵힌 것일 수 있다. 한 번 손을 탔기에 새것으로 팔 수 없을 수 있다. ‘헌-(헐다)’이라는 낱말이 이런 여러 가지 뜻으로 쓰는 줄 제대로 담도록 말풀이를 바로잡으면서 고쳐야 한다고 느낀다. “오래된 헌책”과 “얼마 안 된 헌책”이 헌책방에 나란히 있는 줄 알고 느끼면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4347.12.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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