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작 애지시선 34
김나영 지음 / 애지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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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87



삶을 지으면서 시를 짓는다

― 수작

 김나영 글

 애지 펴냄, 2010.10.30.



  마당에서 마을고양이가 웁니다. 마을고양이는 저마다 우리 집을 저희 터로 삼으려고 용을 씁니다. 우리 마을에서뿐 아니라 둘레 여러 마을을 아울러 ‘겨울에도 먹이를 얻을 만한 곳’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마을고양이가 조금만 운다든지 서로 먹이를 나누어 먹는다면 시끄러울 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마을고양이는 서로 툭탁거립니다. 덩치가 크거나 힘이 센 녀석이 꼭 덩치가 작거나 힘이 여린 녀석을 윽박지르거나 때립니다.


  덩치 큰 녀석은 어째서 그 덩치로 아름다운 짓을 하지 못할까요. 힘이 센 녀석은 어찌하여 그 힘으로 어여쁜 일을 하지 않을까요.



.. 아들 녀석의 방바닥 / 여기저기 박혀 있는 얼룩들 / 닦아도 닦아도 잘 지워지질 않는다 / 몇 번 힘주어 닦아내자 그제서야 ..  (유월)



  밤에 마당에 서면 별을 볼 수 있습니다. 바깥이 깜깜하고 등불이 거의 없는 시골이기에 별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별을 보고 싶으니 별을 봅니다. 고개를 들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맴을 돕니다. 얼마나 많은 별빛이 쏟아지는지 바라봅니다. 어떤 별빛이 우리 집으로 스며드는지 헤아립니다.


  별은 별을 보려는 사람한테 찾아갑니다. 별을 보려는 사람은 별을 볼 수 있을 만한 터전을 찾아갑니다. 나무는 나무를 사귀려는 사람 곁에서 자랍니다. 나무를 사귀려는 사람은 나무를 곁에 둘 수 있는 터전에서 기쁘게 삶을 꾸립니다.


  마음이 흐르는 대로 삶이 흐릅니다. 마음이 가는 대로 삶길을 걷습니다. 마음이 자라는 대로 삶이 자라고, 마음이 웃고 우는 자리가 사랑이 피어나는 자리입니다.



.. 교과서에서만 배우던 가내수공업을 / 어느 날 아버지가 방안 가득 부려놓았다 / 삼십 촉 전등 아래 고무판화처럼 박혀서 / 온 식구들이 너덜너덜한 삶을 풀칠하기 시작했다 ..  (사춘기)



  김나영 님이 쓴 시를 그러모은 《수작》(애지,2010)을 읽습니다. ‘나영’은 이녁이 어버이한테서 받은 이름이 아니라고 합니다. 시를 쓴 분한테는 어버이가 붙인 이름이 따로 있고, 이녁이 새롭게 누리는 이름이 따로 있다고 합니다.


  나한테도 이름이 여럿 있습니다. 내 어버이가 나한테 지어서 준 이름이 있고, 내가 나한테 선물한 이름이 있습니다. 나는 어느 한쪽 이름만 좋아하거나 즐기지 않습니다. 내 어버이는 이녁 사랑을 담아서 나한테 이름을 주었고, 나는 내 사랑을 실어서 나한테 새로운 이름을 선물했습니다. 두 가지 이름에는 저마다 다른 사랑과 숨결이 흐릅니다.



.. 나는 문명이 디자인한 딸이다 / 내 가슴둘레엔 그 흔적이 문신처럼 박혀있다 / 세상 수많은 딸들의 브래지어 봉제선 뒤편 / 늙지 않는 빅브라더가 있다 ..  (브래지어를 풀고)



  아이한테 ‘개구쟁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아이는 개구쟁이로 자랍니다. 아이한테 ‘말썽쟁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아이는 말썽쟁이로 자랍니다. 아이한테 ‘놀이순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아이는 놀이순이로 자랍니다. 아이한테 ‘책돌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아이는 책돌이로 자랍니다. 아이한테 ‘사랑둥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아이는 사랑둥이로 자랍니다.


  그리고, 아이한테 붙이는 이름은 고스란히 내 이름입니다. 아이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는 고스란히 내가 받아먹는 이야기입니다.


  조금만 생각할 수 있으면 모두 알아챕니다. 아이한테 차려서 주는 밥은 바로 어버이 스스로 먹는 밥입니다. 아이가 지내는 보금자리는 바로 어버이인 내가 지내는 보금자리입니다. 아이한테 베푸는 사랑은 바로 어버이인 내가 나 스스로한테 베푸는 사랑입니다.



.. 그때 만일 교과서가 더 재미있었더라면 때론 별책부록 안에 더 재미있는 페이지가 숨어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  (그때 만일 교과서가 더 재미있었더라면)



  시집 《수작》은 곱다라니 빛나다가도 어두컴컴한 굴로 들어갑니다. 가만히 웃으며 노래를 하다가도 노래를 뚝 그치고 길게 한숨을 내쉽니다.


  김나영 님이 ‘밥을 안 해도 되는 사내’라면 어떤 시를 썼을까요? 김나영 님이 ‘집안 청소를 도맡지 않아도 되는 사내’라면 어떤 시를 쓸까요?


  삶을 지으면서 시를 짓습니다. 삶을 노래하면서 시를 노래합니다. 삶을 꿈꾸면서 시를 꿈꿉니다.



.. 시 쓰는 내가 책상 하나 없다 / 나는 바닥에, 거리에, 꽃잎 위에 엎드려 시를 쓴다 ..  (극빈)



  더 낫거나 덜떨어지는 삶은 없습니다. 더 나은 시라든지 덜떨어지는 시는 없습니다. 더 나은 노래나 덜떨어지는 노래도 없습니다. 사랑을 놓고도 더 나은 사랑이나 덜떨어지는 사랑을 가르지 않습니다. 오직 삶이고, 시이며, 노래요, 사랑입니다.


  스스로 찾는 즐거움입니다. 스스로 부르는 고단함입니다. 스스로 쓰는 글입니다. 스스로 짓는 하루입니다.


  누군가는 스스로 따분하면서 지겹게 하루를 보내면서 따분함과 지겨움으로 얼룩진 시를 씁니다. 누군가는 스스로 슬프면서 아프게 하루를 보내면서 슬픔과 아픔으로 어우러진 시를 씁니다. 누군가는 스스로 꽃이 되고 들풀이 되면서 꽃내음과 풀빛으로 환한 시를 씁니다. 4347.12.1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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