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새 - 타카하시 루미코 걸작 단편집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4년 9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422



내 삶은 내가 짓는다

― 운명의 새

 타카하시 루미코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4.9.25.



  마당으로 멧새가 찾아와서 노래를 부를 적에, 마음을 기울여야 이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마당에서 자라는 나무에 멧새가 살포시 내려앉아서 짝을 부를 적에, 눈길을 두어야 이 몸짓을 알아봅니다. 마당에 있어도 새를 못 느낄 수 있고, 새가 코앞을 스치고 지나가도 못 알아챌 수 있습니다.


  잎이 모두 진 나무에 조그마한 겨울눈이 단단히 맺습니다. 나무 곁에 서서 찬찬히 바라보는 사람은 겨울눈을 알아봅니다. 추운 바람이 불면 풀이 죄 시들지만, 볕이 포근히 내리쬐는 날이 이어지면 어느새 조그마한 풀싹이 봉긋봉긋 고개를 내밉니다. 흙이 있는 곳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사람은 작은 가을풀이나 겨울풀을 알아봅니다.


  바라보려 할 적에 바라봅니다. 바라보려 하기에 눈앞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차립니다. 바라보려 하지 않을 적에는 바라보지 못합니다. 바라보려 하지 않기에 눈앞에 무엇이 있는지 도무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 “어멈은 굳이 안 배워도 음식 잘하잖니?” “정말요? 아버님. 고맙습니다. 하지만 어머님을 간병하던 동안, 음식에 통 신경을 못 쓰다 보니 솜씨가 많이 떨어진 것 같거든요.” (5∼6쪽)

-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엔 사랑이 없었다.’ (42쪽)



  타카하시 루미코 님이 그린 만화책 《운명의 새》(학산문화사,2014)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여느 자리에서 수수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면서 빚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둘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운명의 새》에 나오고, 이웃이나 동무를 《운명의 새》에 나오며,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나 같은 사람이 《운명의 새》에 나옵니다.


  곰곰이 읽고 다시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우리 가슴을 건드리거나 움직이거나 울리는 만화는 ‘어디 먼 데 있는 딴 나라 사람’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을 따스하게 보듬거나 어루만지거나 쓰다듬는 만화는 ‘뚱딴지 같거나 뜬금이 없다 싶은 별나라 사람’이 나오지 않습니다.


  곱게 피어나는 이야기는 우리 둘레 어디에나 있습니다. 우리 둘레 어디에 있든 나 스스로 이웃과 동무를 바라보고 마주하며 사랑할 수 있으면, 곱게 피어나는 이야기를 늘 누립니다. 살가이 흐르는 이야기는 나한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내 삶을 스스로 아끼고 돌보면서 가꿀 수 있으면, 살가이 흐르는 이야기를 누리면서 기쁘게 웃습니다.





- ‘사람의 운명이 보인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을 구하지 못했을 때. 자기의 무력함과 마주해야 한다는 쓰디쓴 기분을. 그래서 요즘은 아예 포기하고 산다. 그래. 최대한 보지 않으려고.’ (78쪽)

- ‘행복하게 살고 있었구나. 정말 다행이다. 분명 너는 자기 힘으로 운명의 새를 쫓아 보냈겠지. 어쩐지 구원을 받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나는 이제 망설이지 않고 내 힘을 남들을 위해 써야지. 후회하지 않도록.’ (98쪽)



  내 삶은 내가 짓습니다. 내 이야기는 내가 씁니다. 내 사랑은 내가 가꿉니다. 내 보금자리는 내가 돌보고, 내 아이는 내가 가르치며, 내 어버이는 내가 섬깁니다. 내 밥은 내가 챙겨서 먹고, 내 몸은 내가 스스로 보듬으면서 다스립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운명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 삶길은 스스로 열어서 스스로 걷습니다. 하늘이 시킨 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휩쓸리는 사람은 더러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갈 적에 웃음이 나올까 생각해 봅니다. 스스로 살고 싶은 대로 살 적에 웃음이 나올 테지요. 어떤 일이나 놀이를 할 적에 노래를 부를까 헤아려 봅니다. 스스로 즐겁게 일하거나 놀이를 하면 노래가 터져나옵니다.





- “처음에 우리 집의 불은 진짜 우연이었어요, 밤에 폐휴지를 내놓으려고 나가는데, 마을 회보의 우리 집 기사가 눈에 들어왔죠. 무척 행복해 보였어요. 하지만 사실 남편은 출장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매주 금요일이면 다른 여자한테 가서 자고 와요. 전, 그걸 알고 있었죠.” (128∼129쪽)

- “그 사람은 이제 날 떠날지도 몰라.” “저, 그렇게 걱정이 되면 집에 가 보셔야죠. 전 알 수가 없네요. 사랑하는 아내를 내버려두고 밤마다 술이나 마시다니.” (140쪽)



  만화책 《운명의 새》에 나오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이제껏 삶을 깊이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있고, 뒤늦게 삶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날마다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사람이 있고, 날마다 새로운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물결에 휩쓸리는 사람이 있으면, 물결을 헤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못 보는 모습을 보는 사람이 있고, 둘레에서 이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길을 걷습니다. 더 나은 길이나 덜 좋은 길은 없습니다. 그저 스스로 골라서 스스로 가는 길입니다.





- “부엌살림은 어멈에게 맡기기로 했으니까, 난 상관없다. 그래도 버섯된장국을 할 때는, 두부나 무 정도는 더 넣으면 좋겠다 싶지만.” (175쪽)



  지난해에 심은 복숭아나무 가운데 한 그루가 우리 집 뒤꼍에서 제법 크게 자랐습니다. 보름쯤 앞서 가을잎을 모두 떨구었고, 이제 겨울눈이 앙증맞게 납니다. 복숭아나무 앙상한 가지에 맺힌 겨울눈을 살며시 쓰다듬으면서 이듬해 봄을 살그마니 그립니다. 어떤 잎이 새로 날는지 설레고, 어떤 꽃이 새로 필는지 두근거립니다. 우리 집 복숭아꽃을 마주할 수 있으면, 우리 집 아이들은 날마다 복숭아꽃을 보러 뒤꼍으로 올 테며, 복숭아꽃이 나누어 주는 냄새를 맡으려고 뒤꼍에서 놀 테지요.


  무화과나무 둘레에는 어린 무화과나무가 조그맣게 싹을 틔워서 올라옵니다. 후박나무 둘레에는 어린 후박나무가 자그맣게 싹을 틔워서 올라옵니다. 커다란 나무 둘레에는 으레 어린나무가 자랍니다. 어린나무는 큰나무 둘레에서 포근하게 사랑을 받습니다. 다만, 이 어린나무가 모두 우람하게 크지는 못합니다.


  앞으로 백 해가 흐르고 삼백 해가 흐르면, 우리 집 나무는 모두 우람하게 자라리라 생각합니다. 집보다 훨씬 큰 나무가 될 테고, 어쩌면 삼백 해쯤 뒤에 이 집에서 살 아이들은 우람하게 자란 나무를 베어 새롭게 집 한 채 지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뒷날 아이들은 다시금 나무를 심어 삼백 해를 돌보면서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어요.


  나는 내 어버이한테서 나무나 숲이나 땅이나 집을 물려받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 아이들한테 나무와 숲과 땅과 집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손수 가꿀 수 있는 보금자리를 물려주고 싶고, 이 보금자리를 아이들이 다시 새 아이들한테 물려주면서 두고두고 아름답게 보듬을 수 있기를 빕니다. 까만 밤을 초롱초롱 빛내며 채우는 별을 올려다보면서 비손합니다. 내가 손구 일굴 삶을 찬찬히 그립니다. 4347.11.29.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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