ㄴ 책삶 헤아리기

11. 어떤 길 걸으며 책을 쓰는가



  책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하루를 보내면, 온통 책내음을 맡으면서 책빛을 바라보고 책노래를 부르기 마련입니다. 나무로 둘러싸인 곳에서 하루를 보내면, 온통 나무내음을 맡으면서 나무빛을 바라보고 나무노래를 부르기 마련입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뿐 아니라 중학교나 고등학교에서도 갖가지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어 입시시험을 치르는 얼거리에 젖어듭니다. ‘학교’라는 이름이 붙는 교육시설은 대학바라기일 뿐이고, 대학교에 들어가면 취업바라기일 뿐입니다. 학교에서는 으레 책으로 공부를 시킨다고 하지만, 아이들이 손수 삶을 짓거나 가꾸거나 일구는 길을 보여주거나 밝히지는 않습니다. 책에 담긴 지식을 더 많이 외워서 시험문제를 더 잘 푸는 길만 보여줍니다.


  오늘날 어른이 된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책읽기’가 아니라 ‘책에 담긴 지식 외우기’만 했습니다. 책을 놓고 즐겁게 삶을 배우는 보람을 누리지 못하면서 하루하루 보냈기에, 학교를 벗어나면 책을 손에 안 쥐고 싶다고 여길 만합니다. 책을 참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학교에 있을 때이든 학교에서 벗어난 뒤이든 스스로 즐겁게 책을 사귀어요. 그러니까, 거의 모든 여느 사람들은 책이 짐스럽거나 고단합니다. 즐거움이나 기쁨이나 보람이나 재미하고는 동떨어진 채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를 보내야 하거나 대학교까지 쳐서 열여섯 해를 보내야 했으니까요.


  4대강사업을 엄청난 돈을 퍼부어 밀어붙이고 말았습니다. 지난날 이 일을 놓고 아주 훌륭하며 뜻있다고 목소리를 내던 사람들조차, 이제는 22조 원이 어쩌느니 하고 나무랍니다만, 이런 일은 앞으로도 다시 되풀이될 듯합니다. 왜냐하면, 대학교를 마치거나 나라밖에서 배우고 온 지식인이나 학자나 벼슬아치(공무원)는 많지만, 정작 숲이나 들이나 멧골이나 시골이나 바닷가에서 지내면서 삶을 누린 지식인이나 학자나 벼슬아치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서 벼슬아치가 되었어도 언제나 학교 울타리에서만 맴돌았을 뿐, 들일이나 바닷일을 거들면서 학교를 다닌 뒤 벼슬아치가 된 사람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이런 몸과 마음인 터라, 삶을 헤아리는 정책을 키우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 몸과 마음이 아닌 터라, 삶을 북돋우거나 살찌우는 정책을 펼치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요? 어떤 책을 읽어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떤 책을 읽든 스스로 삶을 세우지 못했다면 그리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훌륭하거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럽다 하는 책을 손에 쥐더라도, 아직 삶부터 스스로 튼튼히 세우지 않았으면, 어떤 책이든 부질없거나 덧없기 마련입니다.


  ‘좋은 책’이나 ‘훌륭한 책’을 많이 읽어야 좋은 사람이나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삶을 손수 알차게 가꿀 수 있을 때에 좋은 사람이나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생각을 스스로 지어서 삶을 스스로 지을 만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때에 좋은 사람이나 훌륭한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책을 읽기 앞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되지 않은 채 손에 책을 쥐기만 하기 때문에, 나중에 학자나 벼슬아치가 되고 나서 바보스럽거나 엉성한 짓을 저지르고 맙니다.


  《한국 원전 잔혹사》(철수와영희 펴냄,2014)라는 책을 보면, “원자력의 경제성에 핵연료 폐기물 처리 비용, 폐로 비용 등 ‘드러나지 않는 비용’이 적절히 반영돼 있지 않다는 문제도 있다. 원전의 전기를 실어 나를 대규모 송전선·송전탑이 번번이 지역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히며 막대한 사회적 갈등 비용이 발생하고 있다(170쪽).”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원자력발전소는 큰도시 가까이에 안 짓습니다. 원자력발전소는 큰도시하고 멀리 떨어진 시골에 짓습니다. 원자력발전소를 세우려는 계획은 정부에서 마련합니다. 내로라할 만큼 많이 배우고 똑똑하다는 이들이 계획과 정책을 짭니다. 원자력발전소를 큰도시 가까이에 안 짓는 까닭은 오직 하나입니다. 사람들한테 안 좋기 때문입니다. 원자력발전소는 매우 위험한 시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잘 생각해야 합니다. 시골에는 사람이 없을까요? 시골에 원자력발전소를 지으면, 이 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누가 쓸까요? 시골에서 쓸 일은 없을 테지요? 큰도시에서 전기를 많이 쓰니까, 시골부터 큰도시까지 송전탑을 엄청나게 세워서 송전선을 엄청나게 이어야겠지요? 큰도시에서 사는 사람은 전기를 걱정없이 쓰지만, 시골에서 사는 사람은 원자력발전소 때문에 방사능 피해를 입을 뿐 아니라, 송전탑과 송전선 피해까지 받아요. 원자력발전소를 지으려는 땅에서 살던 사람은 보상금을 조금 받지만, 원자력발전소하고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사는 사람은 피해가 너무 커서 고향을 등지고 다른 데로 삶터를 옮겨야 해요. 게다가 보상금조차 못 받아요.


  학자나 지식인이나 벼슬아치가 된 사람은 책을 꽤 많이 읽었어요. 그렇지만, 삶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채 학자나 지식인이나 벼슬아치가 된 탓에 원자력발전소를 함부로 짓고, 게다가 시골에 짓지요. 큰도시에는 피해가 적다지만 시골에는 피해가 큰 짓을 저질러요. 시골사람은 하나도 생각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시골 숲과 들과 냇물과 바다를 모두 망가뜨려요. 여기에서 더 생각을 이어 봐요. 시골이 망가질 적에 도시도 망가질 수밖에 없어요. 도시에는 논밭이 없어요. 쌀을 비롯한 곡식과 모든 남새와 열매를 시골에서 얻어요. 시골이 망가지면, 쌀뿐 아니라 모든 먹을거리가 다 망가져요. 큰도시에 피해를 입히지 않겠다면서 위해시설이나 위험시설을 시골에 지으면, 겉보기로는 큰도시가 피해를 안 입는 듯하지만 막상 큰도시가 더없이 크게 피해를 입는 셈일 뿐 아니라, 시골까지 덩달아 피해를 입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생각을 어떻게 지어야 할까요?


  원자력발전소뿐 아니라, 모든 위해시설과 위험시설은 큰도시에 있어야 해요. 큰도시에서 쓸 모든 전기와 물건은 큰도시에서 손수 만들어서 써야 해요. 왜냐하면, 큰도시에 원자력발전소를 짓도록 생각을 기울여야 비로소 ‘안전한 원자력발전소’를 지을 수 있어요. 큰도시에 쓰레기소각장과 쓰레기매립지를 짓도록 생각을 기울여야 ‘더럽지 않고 안전한 쓰레기소각장과 쓰레기매립지’를 지을 수 있어요.


  큰도시에서 벗어나 시골에 위험시설과 위해시설을 지으려고 하니 ‘더 안전하지 않게’ 아무렇게나 하고 맙니다. 게다가, 사람이 적은 시골에 위험시설과 위해시설을 지으려고 하니 ‘반대하는 사람이 매우 적’어요. 큰도시에서는 피해를 모르고, 시골에는 사람이 워낙 적으니, 반대하는 목소리가 거의 불거지지 않을 뿐 아니라, 언론에서도 이를 거의 안 다루어요.


  책읽기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신문사와 방송사와 출판사는 거의 다 큰도시에 있습니다. 대학교도 거의 다 큰도시에 있습니다. 모든 지식과 학문은 큰도시에서 이루어지고, 우리가 읽는 거의 모든 책은 ‘도시에 사는 작가’가 글을 써서 ‘도시에 있는 출판사’에서 책을 만든 뒤, ‘도시에 있는 책방’에서 책을 팔아요. 책을 사서 읽는 사람도 거의 모두 도시에서 살아요.


  우리가 스스로 삶을 짓거나 살피지 않고 책만 읽는다면, 지식이나 정보는 무척 많이 머릿속에 담을 수 있더라도, 막상 삶은 모르기 일쑤입니다. 우리 둘레에 숲이나 들이나 바다가 없다면, 자연도감이나 생태도감이나 환경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정작 4대강사업뿐 아니라 온갖 일이 어떻게 터지고 흐르는가를 제대로 못 짚기 마련입니다.


  어떤 길을 걸으면서 책을 읽거나 쓰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떤 곳에서 삶을 가꾸면서 책을 읽거나 쓰는지 헤아려야 합니다. 나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되려는지 생각하면서 책을 손에 쥐어야 합니다. 4347.11.2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청소년 책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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