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ㄷ 책숲 느끼기

22. 책은 많이 읽어야 할까



  책을 한 해에 만 권쯤 읽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누군가는 한 해에 책 만 권쯤 거뜬히 읽습니다. 이와 달리, 누군가는 한 해에 책 한 권조차 손에 쥐지도 못합니다. 왜 두 사람은 이렇게 다를까요? 마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책을 한 해에 만 권쯤 읽는다고 한다면, ‘그저 빠르게 읽는’ 셈일까요? 아니에요. 어느 한 사람이 스스로 읽고 싶은 대로 손에 책을 쥐니 어느새 이만큼 읽을 뿐이에요. 빠르게 읽지도 느리게 읽지도 않습니다. 그저 이녁 결대로 읽을 뿐이지요. 한 해에 한 권조차 못 읽는 사람은 어떤 모습인가요? 이녁도 이녁 삶결대로 책을 손에 쥘 뿐이에요. 책 한 권을 읽으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억지로 손에 쥐기는 해도, 하루에 한 줄조차 못 읽고 지나가기 일쑤입니다.


  내가 책을 읽은 지난날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책 한 권을 놓고 한 해 동안 읽을 적에 더 깊거나 넓게 읽었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학교에서는 책 한 권을 놓고 한 해에 걸쳐서 야금야금 읽으면서 가르쳐요. 자, 그러면 생각해 보셔요. 한 해에 고작 교과서(책) 한 권 떼는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배우는 사람은 ‘교과서 한 권’을 샅샅이 꿰뚫거나 제대로 알아채는가요? 아닙니다. 거의 모든 아이들은 교과서 한 권에 깃든 줄거리를 제대로 모르기 일쑤입니다.


  500쪽짜리 소설책 한 권을 읽으려면 몇 분이 걸릴까요? 이야기에 빨려든 사람이라면, 500쪽짜리 소설책을 30분이면 넉넉히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읽을 수 있을까요? 이야기에 빨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열일곱 살이던 고등학교 1학년 때에, 동무와 함께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서 읽는데, 나는 두 시간쯤 걸려서 읽는데, 내 동무는 이만 한 두께를 30분 만에 읽은 뒤 다른 책을 잇달아 읽어내더군요. 나는 내 책을 읽다가 동무가 읽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습니다. 내 동무 눈알이 움직이는 흐름과 책종이를 넘기는 손길을 가만히 살펴보았습니다. 이 아이는 ‘그냥 막 넘기는 몸짓’이 아니었어요. 그래, 마음을 가다듬어 한껏 모으면, 500쪽짜리뿐 아니라 1000쪽짜리라 하더라도 30분이면 넉넉히 읽을 수 있구나 하고 느꼈어요. 더 빠르게 읽을 수도 있겠지요. 왜냐하면, 마음을 모으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보기를 더 든다면, 외국말을 열 몇 가지나 아주 훌륭히 잘 하는 외국사람을 압니다. 이녁은 ‘아주 다른 세계’에서 쓰는 말을 몇 달 만에 아주 빈틈없이 익힌다고 해요. 어떻게 그처럼 온갖 다른 세계 말을 잘 익히느냐 하고 누군가 물으면, ‘즐겁기’ 때문이라고 말한답니다. 아하, 그렇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어떤 사람은 영어 하나를 배우느라 열 몇 해나 스무 해가 들지만, 제대로 영어를 말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영어뿐 아니라 온갖 외국말을 아주 빨리 익히기도 해요. 왜 그럴까요? 서로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마음을 기울이거나 쏟는 크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책은 얼마나 읽어야 할까요? 읽고 싶은 만큼 읽어야 합니다. 책은 몇 권 읽어야 할까요? 읽고 싶은 만큼 읽어야 합니다.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읽고 싶은 만큼 읽어야 합니다.


  길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읽고 싶은 만큼’입니다. ‘읽고 싶은 만큼’이란 무엇인가 하면, 책 한 권에 깃든 이야기와 알맹이와 줄거리와 속살을, 이 책을 손에 쥔 사람 스스로 ‘받아먹어서 몸과 마음에 삭히고 싶은 만큼’입니다. 그리고, 읽고 싶은 만큼 읽는다는 말은 ‘즐겁게’ 읽는다는 뜻입니다.


  종이책을 한 해에 천 권 읽는 일은 어려울까요, 쉬울까요? 어렵다고 여기면 어렵고, 쉽다고 여기면 쉽습니다. 종이책을 한 해에 천 권 장만하는 일은 어려울까요, 쉬울까요? 어렵다고 여기면 어렵고, 쉽다고 여기면 쉽습니다. 즐겁게 읽으려 하면 즐겁게 읽을 수 있고, 즐겁게 장만하려면 즐겁게 장만할 수 있어요. 해 보면 다 돼요.


  내가 읽고 장만한 책을 돌아본다면, 나는 열여덟 살이던 고등학교 2학년 때에 책을 백 권 남짓 장만해서 읽었고, 학교도서관과 마을도서관에서 더 많은 책을 빌려서 읽었습니다. 열아홉 살이던 고등학교 3학년 때에는 책을 이백 권 남짓 장만해서 읽었고, 여러 도서관에서 더 많은 책을 빌려서 읽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친 스무 살에는 한 해에 400권이 넘는 책을 장만해서 읽었고, 대학도서관에서 훨씬 많은 책을 빌려서 읽었으며, 스물한 살에는 700권이 넘는 책을 장만해서 읽었을 뿐 아니라, 대학도서관과 구내서점에서 알바를 하면서 일손을 쉴 틈에 더 많은 책을 손에 쥐어 읽었어요. 책방마실을 하면서 ‘돈이 없기에 장만하지 못하는 책’은 눈에 불을 켜고 그야말로 책에 아주 빨려들어 읽었습니다. 그러니까, 책을 한 해에 700권 장만할 적에 내가 ‘돈이 없어 장만하지 못한 채 서서 읽은 책’은 7000권쯤 되지 싶습니다. 군대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와서 다시 신문배달을 하며 책을 장만하던 1998년부터는 한 해에 장만하는 책이 1000권을 넘어섰습니다. 이때부터 ‘하루에 장만하는 책’과 ‘한 해에 장만하는 책’이 몇 권인지 숫자를 세는 일을 그만두었어요. 이때까지 공책에 ‘산 책’과 ‘읽은 책’을 적었는데, 이 공책을 조용히 내다 버렸습니다. 그냥 책만 읽기로 했어요. 내 마음으로 들어오는 책만 바라보기로 했어요.


  어떻게 이렇게 읽을 수 있을까요? 마음을 모으면 됩니다. 그리고, 마음을 모으지 못하면 하루에 한 쪽조차 못 읽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어서 고요하면서 차분하고 사랑스러운 숨결이 흐르도록 가누면, 아침저녁으로 출퇴근을 하는 전철길에서도 책 너덧 권을 가볍게 읽을 만합니다. 내가 《보리 국어사전》을 만들던 2001∼2003년에는 전철로 일터에 출퇴근을 하는 길에 ‘두툼한 인문책’을 으레 두 권 읽고 ‘도톰한 동화책’도 으레 두 권 읽으면서 지냈습니다. 요즈막에는 볼일이 있어 서울마실이나 부산마실을 하면, 시외버스에서 너덧 시간을 보내는 동안 책을 대여섯 권씩 읽습니다. 다른 것에는 마음을 안 빼앗기고 책만 바라보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으면 훌륭한가요? 아닙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많이 읽었다’뿐입니다. 훌륭하거나 안 훌륭한 대목하고는 아무것도 안 이어집니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그저 읽고픈 책이 많기 때문에 많이 읽을 뿐이에요. 밥을 많이 먹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똑같이 살이 붙지 않습니다. 밥을 많이 먹어도 살이 안 붙는 사람이 있고 밥을 적게 먹어도 살이 잘 붙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래달리기뿐 아니라 마라톤도 잘하지만, 어떤 사람은 조금만 달려도 지쳐요. 그저 몸과 마음이 다를 뿐입니다.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앞서 말했듯이 책은 ‘읽고 싶은 만큼’ 읽으면 되고, 스스로 삶을 가꾸거나 짓는 길에 슬기롭게 삭히는 이야기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1000권 읽은 사람이 훌륭하고 999권 읽은 사람은 안 훌륭할 까닭이 없습니다. 999권 읽은 사람은 훌륭하고 998권 읽은 사람은 안 훌륭할 까닭이 없습니다. 998권 읽은 사람은 훌륭하고 997권 읽은 사람은 안 훌륭할 까닭이 없습니다. 이 숫자를 눈여겨보셔요. 997, 996, 995, 994, 993, …… 3, 2, 1, 0까지 이릅니다. 1000권 읽은 사람이나 0권 읽은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숫자는 부질없는 놀음놀이일 뿐입니다.


  0권을 읽든 1000권을 읽든 온마음을 기울여서 읽을 때에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책은 종이책에만 있지 않아요. 책은 꽃 한 송이와 나무 한 그루에도 있어요. ‘들꽃 도감’을 펼쳐야 꽃을 알까요? ‘나무 도감’을 100권쯤 읽으면 나무를 잘 알까요? 아니지요. 들꽃을 손수 바라보고, 나무를 손수 가꾸며 돌보아야 꽃과 나무를 잘 알아요. 꽃을 늘 마주하는 사람은 종이책 아닌 ‘꽃책’을 읽습니다. 나무를 늘 돌보는 사람은 종이책 아닌 ‘나무책’을 읽습니다.


  ‘종이책 읽은 숫자’를 드러내는 일은 그냥 그런 숫자일 뿐이에요. 훌륭한 숫자도 바보스러운 숫자도 아닙니다. 이를테면, 내 나이를 밝히는 일하고 같아요. 내 나이가 스물이면 젊고 마흔이면 늙을까요? 내 나이가 마흔이면 젊고 예순이면 늙을까요? 아니에요. 나이는 숫자로 치지 않습니다. 나이는 늘 마음으로 칩니다. 마음이 젊을 때에 젊고, 마음이 늙을 때에 늙지요. 책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마음을 기울이면 한 해에 천 권이 아니라, 하루에 천 권도 읽습니다. 해 보면 됩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해 보려 하지 않으니 못 할 뿐이에요. 그리고, 굳이 하루에 천 권을 읽을 까닭이 없겠지요. 하루 내내 책만 읽으면 삶이 재미없을 테니까요. 4347.11.2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청소년 책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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