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무엇인가



  이제 사라졌지만,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에 있는 어느 헌책방에서 “‘책’은 인증용 소품이 아닙니다.”라고 적은 쪽종이를 바깥에 살그마니 내놓은 적 있다. 무슨 소리일까? 무슨 뜻일까? 쪽종이에 적은 말 그대로이다. 책은 ‘책’일 뿐, ‘소품’이 아니다. 보수동 책방골목에 ‘사진만 찍으러 오는 나그네’를 겨냥해서 하는 말이다.


  제주섬 억새밭에 사진을 찍으러 가는 일은 나쁘지 않다. 좋거나 나쁘다고 가를 수 없다. 그저 억새를 누리려 가는 길이니까. 억새밭에 가면 억새를 바라보고 만지고 누리다가 사진을 찍는다. 억새밭을 마음껏 달리다가 사진을 찍고, 억새밭에 드러누워서 사진을 찍기도 할 테지.


  책방골목이나 헌책방에 가면 무엇을 할 만할까? 사진을 찍을 만할까? 책을 ‘소품’으로 삼아서 멋들어진 모습을 훌륭히 찍을 만할까?


  책을 소품으로 삼고 싶다면 도서관에 갈 노릇이다. 도서관에 가서 ‘소품인 책’을 늘어놓고 찍을 노릇이다. 책을 소품으로 여기고 싶으면 커다란 새책방에 갈 노릇이다. 수십만 권에 이르는 책이 꽂힌 커다란 새책방에서 신나게 사진을 찍을 노릇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할 노릇이다. 도서관이나 큰 새책방 가운데 ‘사진 마음껏 찍으시오’ 하고 밝히는 데가 있을까? 없다. 도서관이나 큰 새책방에서는 ‘사진을 못 찍게 가로막’는다. 왜 그러할까? 왜 도서관이나 큰 새책방에서는 사진을 찍지 말라고 할까? 도서관과 큰 새책방에 찾아온 책손한테 거슬리기 때문이다. 책을 누리는 다른 사람한테 성가시거나 귀찮기 때문이다.


  책을 소품으로 삼는 일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다. 소품으로 삼으려면 얼마든지 삼을 만하다. 다만, 책을 책으로 바라보지 않고 소품으로만 여긴다면, 책을 눈앞에 두고도 책을 펼칠 줄 모른다면, 수박이나 능금이나 딸기를 수박이나 능금이나 딸기로 여기지 않고 소품으로만 삼는다면, 무슨 재미나 보람이 있을까.


  수박이나 능금이나 딸기를 소품으로 삼아 멋있게 사진으로 찍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여러 날 소품으로만 삼으면, 어느새 이 열매는 흐물흐물 늘어진다. 일본사람 기무라 아키노리 님이 숲을 가꾸며 거둔 ‘기적 사과’가 아니고서야, ‘소품이 되는 열매’는 모두 못 먹어서 버려야 한다.


  책은 열매처럼 쉬 곯거나 썩지는 않는다. 그러나, 책을 소품으로만 여기면, 책은 종이라서 바스라진다. 먼지가 더께로 바뀐다. 무엇보다, 책에 깃든 아름다운 알맹이를 못 받아먹는 사람 스스로 아름다움하고 동떨어진다.


  책은 무엇인가? 책은 책이다. 참말, 책은 책이다. 책을 책으로 여길 수 있을 때에 책이 빛난다. 밥을 밥으로 여기고, 숲을 숲으로 여기며,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고, 아이를 아이로 여기며, 이웃을 이웃으로 여기는 마음결을 살려서, 책을 책으로 여길 줄 아는 마음을 가꿀 때에 사랑이 자란다. 4347.11.1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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