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46. ‘익숙한 한자말’이기에 고친다
― 한자말을 왜 바로잡아야 하는가
책을 읽을 적에 ‘맞춤법 살피기’나 ‘띄어쓰기 바로잡기’를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일을 하자면 ‘책읽기’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책읽기는 ‘이야기나 줄거리 읽기’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다루는지 찬찬히 읽고, 어떤 줄거리를 들려주려는지 가만히 읽으려면 그예 이야기와 줄거리에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생각하면 맞춤법이나 띄어쓰기에 얽매여 다른 대목을 놓치기 일쑤입니다.
이웃이나 동무와 이야기를 나눌 적에 무엇을 듣습니까? ‘이야기’를 듣겠지요? 말투가 거친 사람이 있고, 어느 고장에서는 사람들이 으레 거칠다 싶은 말씨로 이야기를 합니다. 서울에서만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경상도나 전라도에 가서 깜짝 놀라거나 어리둥절할 수 있어요. 말씨와 말투가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울내기라 하더라도 말씨와 말투로 ‘사람을 따지거나 재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이야기와 줄거리’에 마음을 기울인다면, 서로 오붓하고 즐겁게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아이와 어른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도 돌아볼 노릇입니다. 아직 많이 어린 아이들, 이를테면 서너 살이나 예닐곱 살 아이는 ‘틀린 말’을 곧잘 씁니다. 아직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몇 차례 바로잡아 주더라도 아이는 아직 익숙하지 않으니 자꾸 틀려요. 그런데, 아이가 자꾸 틀린 말을 할 적에 ‘틀린 말 바로잡기’만 끝없이 시키면 어찌 될까요? 둘 사이에 이야기가 될까요? 아이는 그만 입을 앙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할 테지요. 더더구나, 두어 살이나 서너 살 아이가 ‘틀린 말’을 쓰더라도 어버이라면 이 아이가 ‘어떤 이야기를 밝히려는 말’을 하는지 이내 알아차립니다. 어버이는 ‘틀린 말 바로잡기’가 아니라 ‘이야기 나누기’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읽든 이야기를 나누든, 옆사람이 ‘한자말을 섞어서 지식을 자랑하든’ 말든 아랑곳할 일이 없습니다. ‘온갖 영어를 섞어서 쓰든’, 아니면 ‘일제강점기 제국주의 일본 말투를 아무렇지 않게 쓰든’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서로 주고받을 이야기를 헤아린다면 모두 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마친 뒤에는 몇 가지 알려줄 수 있어요. 글을 다 읽고 나서 이야기와 줄거리를 찬찬히 곰삭힌 뒤 몇 가지 짚을 수 있어요.
《아델과 사이먼》(베틀북 펴냄,2007)이라는 예쁜 그림책이 있습니다. 그림도 예쁘고 이야기도 예쁩니다. 이 그림책을 찬찬히 읽다가 “둘은 그림 찾기를 포기하고 공원으로 갔어요(7쪽)”라는 대목에서 ‘포기(抛棄)하고’라는 한자말을 ‘그만두고’나 ‘그치고’로 고칩니다. “너 당장 내려오지 못해(8쪽)”라는 대목에서 ‘당장(當場)’이라는 한자말을 ‘어서’나 ‘바로’로 고칩니다. “하루 종일(15쪽)”이라는 대목에서 ‘종일(終日)’이라는 한자말을 ‘내내’로 고칩니다. “제발 조심해(15쪽)”라는 대목에서 ‘조심(操心)해’라는 한자말을 ‘잘 살펴’로 고칩니다. “결국 찾지 못했어요(19쪽)”라는 대목에서 ‘결국(結局)’이라는 한자말을 ‘끝내’나 ‘그예’로 고칩니다.
예쁜 그림책에 나오는 번역글입니다. 이 그림책은 우리 집 아이들과 함께 읽는 그림책이기에 연필로 죽죽 금을 그은 뒤 바로잡습니다. 아이들이 그림책을 혼자 읽을 적에 한국말을 옳고 바르게 익혀서 곱고 사랑스레 쓰기를 바라면서 바로잡습니다. 그런데, 책에 적힌 이런 한자말은 사람들한테 꽤 익숙한 낱말입니다. 어린이책에까지 쓰는 이런 한자말은 사람들한테 무척 익숙하다고까지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람들이 ‘오늘날 익숙하게 쓰는 한자말’이기 때문에 바로잡습니다. ‘사람들이 익숙하게 안 쓰는 한자말’이라면 구태여 바로잡을 까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익숙하게 안 쓰는 한자말’은 구태여 바로잡지 않아도 곧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언제나 이어집니다. 모든 것은 늘 똑같습니다. 익숙하게 널리 쓰는 한자말이기에 안 고쳐도 된다는 생각은, 일제강점기가 서른다섯 해쯤 되었으니 그대로 살아도 된다는 생각하고 똑같이 이어집니다. 참말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식민지 종살이가 오래 이어지다 보니 아주 많은 분들이 ‘종으로 지내는 삶’을 익숙하게 받아들여 일본말을 쓰고 일본 이름을 지으면서 살았어요. 해방된 지 일흔 해가 되도록 ‘일제강점기 찌꺼기 말투’가 사회 곳곳에 아주 깊이 뿌리내린 채 안 뽑힙니다. 어른들 스스로 ‘익숙하게 쓴다’는 핑계를 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쓸 말은 ‘익숙한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쓸 말은 ‘써야 할 말’입니다. 우리가 쓸 말은 ‘생각을 나타내고 마음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우리가 쓸 말은 ‘삶을 가꾸는 말’과 ‘삶을 짓는 말’과 ‘삶을 사랑하는 말’입니다.
한국말은 ‘파랑’이고 한자말은 ‘靑色’이며 영어는 ‘blue’입니다. ‘블루’나 ‘청색’ 같은 바깥말을 쓰고 싶다면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말은 ‘파랑’입니다. 한국말은 ‘하늘’이고 한자말은 ‘蒼空’이며 영어는 ‘sky’입니다. ‘스카이’나 ‘창공’ 같은 바깥말을 쓰려 한다면 쓸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국말은 ‘하늘’입니다.
오늘날 꽤 많은 어른들은 ‘청색’이나 ‘창공’ 같은 한자말이 익숙합니다. ‘블루’나 ‘스카이’ 같은 영어도 익숙합니다. 익숙하니까 이런 바깥말을 아무렇지 않게 읊습니다.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을 떠나, 익숙한 말투가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그런데, 아이들한테는 아직 익숙하지 않습니다. 어른들한테는 익숙하더라도 아이들한테는 안 익숙한 낱말입니다. 아이들은 말다운 말을 배워서 생각다운 생각을 키울 노릇이고, 아이들은 말다운 말을 가꾸어서 삶다운 삶을 지을 노릇입니다. 어른들은 이녁한테 익숙한 말로 늘 똑같은 생각과 삶을 되풀이하는 굴레에서 벗어날 노릇입니다. 어른들은 ‘나한테 익숙한 말’이 아니라 ‘삶을 가꾸고 사랑을 북돋우며 생각을 키우는 말’을 슬기롭게 찾아서 새롭게 배울 노릇입니다. 아이들은 날마다 새롭게 자라면서 받아들일 즐겁고 기쁜 말을 배울 노릇이요, 어른들은 날마다 새롭게 생각하면서 꿈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말을 다시 배울 노릇입니다. 4347.11.1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