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많이 컸죠
이정록 지음, 김대규 그림 / 창비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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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42



아이와 함께 크는 어른

― 저 많이 컸죠

 이정록 글

 창비 펴냄, 2013.8.30.



  안 입고 묵힌 옷을 마당에 널어 말립니다. 아침에는 바람이 없더니 낮이 되면서 바람이 조금 세게 붑니다. 빨랫줄에 넌 옷가지가 팔랑거리다가 바닥에 떨어집니다. 마당에서 놀던 일곱 살 큰아이가 옷가지를 주워 다시 널면서 부릅니다. “아버지, 바람이 불어서 옷이 떨어져요. 아버지는 그냥 계시고, 내가 빨래집게로 집을게요.” 씩씩한 살림순이는 동생 세발자전거를 디딤판으로 삼아 올라섭니다. 동생더러 빨래집게를 하나씩 달라고 이르면서 빨랫줄에 넌 옷가지를 척척 집습니다. 다만, 옷가지에 하나씩 집어도 될 텐데 서넛씩 넉넉히 집습니다.


  살림순이는 네 살 적에도 빨래널기를 거들었습니다. 살림순이가 네 살 적에 동생이 태어났고, 동생 기저귀를 날마다 쉴새없이 빨아 쉴새없이 널었어요. 이때마다 살림순이는 한손에 젖은 기저귀를 걸친 뒤 아버지한테 한 장씩 건넸습니다. 때로는 걸상을 가지고 와서 까치발을 하며 손수 빨래집게로 집겠다고 나서기도 했습니다.


  햇볕에 기저귀가 잘 마르면 살림순이는 또 쪼르르 따라오지요. 잘 마른 기저귀를 걷을 때마다 두 팔을 벌려 받습니다. 두 팔 가득 수북하게 받은 기저귀를 집으로 갖고 들어가서 아버지하고 마주앉아서 척척 갰어요.



.. 풋고추 따러 갈 땐 고추밭 / 지푸라기 깔러 갈 땐 참외밭 / 오이순 집으러 갈 땐 오이밭 / 다 돌보러 갈 땐 텃밭 ..  (텃밭)



  아이와 함께 크는 어른입니다. 아이가 크면서 어른도 큽니다. 어른은 아이를 돌보고 먹이고 입히고 키우면서 찬찬히 자랍니다. 아이는 젖을 물고 밥을 씹으며 물과 바람을 싱그러이 맞아들이면서 무럭무럭 자랍니다. 어버이는 기저귀를 빨고 널고 개고 새로 샅에 대면서 보드라운 손길과 따사로운 숨결을 배웁니다. 아이는 어버이 손길과 숨결을 물려받으면서 목숨을 살리는 사랑을 배웁니다.



.. 청둥오리들이 / 먼 하늘로 날아갑니다 ..  (청둥오리)



  아이를 낳는 사랑은 책에 나오지 않습니다. 아이를 돌보는 사랑은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이와 어깨동무하면서 누리는 놀이는 교과서에 없습니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 새로운 아이를 낳는 꿈은 학문에도 철학에도 종교에도 과학에도 없습니다.


  먼 옛날부터 조곤조곤 속삭이는 이야기로 사랑을 물려주고 물려받습니다. 먼 옛날부터 나긋나긋 주고받는 말마디로 사랑을 이어주고 이어받습니다. 먼 옛날부터 삶에서 우러나온 노래를 함께 부르면서 꿈을 키우고 놀이를 즐깁니다.


  기쁘게 일하면서 노래가 샘솟고, 기쁘게 놀면서 노래가 흐릅니다. 땀흘려 일하면서 노래가 자라고, 땀흘려 뛰놀면서 노래가 거듭납니다. 어른도 노래하는 삶이고, 아이도 노래하는 삶입니다. 어른도 삶과 함께 노래를 짓는 하루이고, 아이도 삶과 함께 노래를 빚는 하루예요.



.. 일기장 / 첫 장이다. // 오늘 일기는 / 건너뛰고 / 내일부터 써야지 ..  (첫사랑)



  이정록 님이 빚은 동시집 《저 많이 컸죠》(창비,2013)를 읽습니다. 이정록 님은 재미나게 말을 엮어서 동시를 빚습니다. 말솜씨를 한껏 살려서 동시를 찬찬히 꾸밉니다.



.. 엄마가 설거지하는 사이 / 로또 복권 맞춰 보는 아빠 ..  (꼴등 아빠)



  이정록 님은 이정록 님이 아이를 곁에 두고 지내는 삶에 맞추어 동시를 씁니다. 아버지 자리이기도 하고 아저씨 자리이기도 한 눈길로 동시를 씁니다.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과 동무하는 마음으로 동시를 씁니다. 《저 많이 컸죠》를 읽으면, 이 동시와 걸맞는 아이가 몇 살 즈음인지 알 길은 없지만, 아이도 어른도 하루하루 새롭게 크는 삶을 이야기 하나로 갈무리합니다.


  다만, 말놀이는 재미있고, 말치레는 웃음이 묻어나는데, 말놀이와 말치레를 빼면 무엇이 있을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말놀이를 살찌우는 숨결을 돌아보면서, 아이들한테 삶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눈으로 스치듯이 보이는 모습이 아닌, 아이가 앞으로 즐겁게 가꾸면서 착한 넋으로 새롭게 새울 터전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치레가 튼튼하게 서도록 사랑을 알차게 보듬는 이야기가 노래마다 깃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입으로 외치는 사랑이 아니라, 사람이 참답게 서면서 지구별에 푸른 바람이 불도록 이끄는 사랑을 노래에 살포시 담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숯불갈비집에서 / 생일잔치를 했다. // 양념 갈비에 / 물냉면도 먹었다 ..  (숯불갈비)



  언제나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을 읽는다면 마음을 차분히 다스리면서 아름다운 길로 나아갈 수 있구나 싶어요. 언제나 우리가 먹어야 할 밥을 먹는다면 마음을 따스히 돌보면서 사랑스러운 삶을 꾸릴 수 있구나 싶어요. 언제나 우리가 꾸어야 할 꿈을 꾼다면 마음을 넉넉히 북돋우면서 즐거운 삶을 이룰 수 있구나 싶어요.


  아이는 몸뚱이만 크지 않습니다. 어른은 더 안 자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이는 마음이 함께 자랄 때에 비로소 씩씩하게 웃습니다. 어른도 아이처럼 언제나 새롭게 자라고 생각을 키우는 숨결입니다.


  말 한 마디에서 바람이 포근히 부는 동시가 그립습니다. 글 한 줄에서 햇살 한 조각 내리쪼이는 동시가 보고 싶습니다. 이야기 한 자락에서 시냇물이 흐르는 동시가 만나고 싶습니다. 4347.11.9.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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