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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언젠가 만날 - 인연을 찾아 인도 라다크로 떠난 사진가 이해선 포토에세이
이해선 글.사진 / 꿈의지도 / 2011년 2월
평점 :
찾아 읽는 사진책 195
여기에 있으니 함께 만납니다
― 인연, 언젠가 만날
이해선 글·사진
꿈의지도 펴냄, 2011.2.25.
사진을 찍는 사람은 누구나 알거나 잘 모릅니다. 무엇을 잘 아느냐 하면, 사진을 찍으려면 ‘내가 바로 그곳에 있어’야 합니다. 내가 서지 않은 곳에서는 사진을 못 찍습니다. 보도사진이나 다큐사진이 아니더라도 ‘바로 그곳에 있을’ 때에 사진을 찍습니다. 모델을 찍는 패션사진도 모델과 한자리에 있어야 모델을 찍습니다. 패션사진에서 ‘바로 그곳’은 모델과 서는 무대입니다.
한편, 무엇을 잘 모르느냐 하면, 멀리 날아가야 ‘사진을 찍을 만한 바로 그곳’을 찾지 않는다는 대목을 잘 모릅니다. ‘사진을 찍을 만한 바로 그곳’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생각해 보셔요.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티벳이나 네팔이나 인도나 부탄으로 날아가면, 한국사람은 ‘두멧자락(오지)’으로 찾아가는 셈입니다. 이와 달리, 티벳이나 네팔이나 인도나 부탄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오면? 이때에 티벳사람이나 네팔사람이나 인도사람이나 부탄사람한테 한국이 바로 ‘두멧자락(오지)’입니다.
한국에서는 인도 라다크가 ‘두멧자락’일 테지만, 인도 라다크에서는 한국이 두멧자락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에서도 한국이 ‘두멧자락’이 되며, 인도에서도 인도가 ‘두멧자락’이 됩니다. 두멧자락이란 어디일까요? 내가 두 발로 디디지 않은 곳이 두멧자락입니다. 고작 100미터쯤 떨어진 한 동네라 하더라도 나 스스로 그곳에 발을 디딘 적이 없으면 내 집에서 고작 100미터쯤 떨어진 곳도 두멧자락입니다. 서울에 살며 부천이나 인천에 나들이를 간 적이 없이 마흔 해를 살거나 예순 해를 살았으면, 서울내기한테 부천이나 인천은 두멧자락입니다.
여행을 하면서 글을 쓰는 이해선 님이 빚은 사진책 《인연, 언젠가 만날》(꿈의지도,2011)을 읽습니다. 이해선 님은 “얼굴도 모르는 한 소년의 주소를 달랑 들고 이곳에 온 적이 있습니다. 벌써 십 년 전 일입니다. 대부분의 초보 여행자들처럼 지도에 그려져 있는 지명 모두를 두 발로,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안달이었던 시간이었지요(42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주소 하나’만 챙겨 스무 시간을 날아 이웃나라로 찾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소 하나’조차 없이 마흔 시간을 날아 이웃나라로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열 시간 넘게 버스를 달려야 찾아갈 데가 꽤 많습니다. 서울에서 길을 나서면 열 시간 넘게 버스를 달리는 곳은 거의 없지만, 시골에서 길을 나서면 열 시간 넘게 버스를 달려야 하는 곳이 아주 많습니다. 이를테면, 전남 고흥에서 강원 양양을 가려 한다면 얼마쯤 걸릴까요? 가장 빠르기로는, 고흥에서 서울을 거쳐 양양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무척 많이 돌아가야 하는 길입니다. 전남 강진에서 경북 울진으로 가려 한다면 얼마쯤 걸릴까요? 가장 빠르기로는, 강진에서 부산을 거쳐 울진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도 참으로 많이 돌아가야 하는 길입니다. 전북 임실에서 강원 태백으로는 어떻게 갈 수 있을까요? 강원 인제에서 경남 합천으로는 어떻게 갈 만할까요? 서울이나 부산에서는 그리 어렵잖이 찾아갈 만하지만, 막상 서울이나 부산에서 이러한 시골자락으로 나들이를 다니는 사람은 그리 안 많습니다. 그리고, 이 시골자락에서 저 시골자락으로 나들이를 다니는 사람도 아주 드물어요. 무슨 소리인가 하면, 한국에서 살며 한국 골골샅샅 두루 다니는 사람이 대단히 적습니다. 한국에서 인도 라다크를 찾아가는 길보다, 한국 서울에서 살며 영동이나 영주나 진천이나 장수를 찾아가는 일은 매우 드물어요. 한국에서 티벳이나 버마나 베트남이나 칠레나 브라질 같은 데를 찾아가서 사진을 찍는 사람을 곧잘 만날 테지만, 한국에서 청양이나 태안이나 곡성이나 칠곡을 찾아가서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어디에서 만날 만할까요. 밀양에서 송전탑 싸움이 불거지기 앞서 밀양을 찾은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해남이나 고흥에서 핵발전소 싸움이 불거질 적에 해남이나 고흥을 찾은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요.
이해선 님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처 없이 떠돌던 내 삶이 히말라야 오지에 붙박혀 살아온 한 여자의 삶 앞에서 갑자기 초라해졌습니다(48쪽).” 하고 말합니다. 그러고는 “한 곳에서 100년 가까이 살다 생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노인의 모습은 저녁노을처럼 조용했습니다(57쪽).” 하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한 곳에서 백 해 가까이 살다가 숨을 거두는 사람은 아주 고즈넉하면서 조용합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백 해 가까이 살다가 숨을 거두는 사람도 아주 고즈넉하면서 조용해요.
오늘날은 거의 모든 사람이 도시에 몰려서 살지만, 이런 사회 얼거리에도 ‘처음 태어난 시골자락’에서 그대로 눌러 지내는 할매와 할배가 아주 많습니다. 어쩌다 한두 차례 ‘도시에 있는 아들딸 만나러 나들이를 다닌 일’이 있는 할매와 할배도, 나이가 들면 더 도시마실을 못 다닙니다. 그저 이녁 고향 터전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다가 고즈넉하게 흙으로 돌아갑니다.
자유란 무엇일까요.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를 밟거나 독일을 밟을 적에 자유일까요? 비행기를 한 번도 탄 적이 없어도 마음이 홀가분하면 자유일까요? 온누리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면 자유일까요? 고향 삶터에서 흙을 가꾸고 나무를 심으면서 삶을 지으면서 마음이 아늑하면 자유일까요?
이해선 님은 “곰파에는 어린 여자아이들이 승려가 되겠다며 붉은 옷을 나풀거리며 뛰어다녔습니다. 붉은 치맛자락이 어릴 적 입었던 한복 같아서 친근하게 다가옵니다(300쪽).” 하고 말합니다. 그러고는 “세상과 격리된 채 사원에서 공부하는 어린 아이들은 책가방이 따로 없었습니다. 눈으로 고립되는 겨울, 헬기에서 떨어뜨려 주는 비상식량 마대자루가 아이들의 책가방이었습니다. 내가 여분으로 가져간 대형마트의 글씨가 새겨진 비닐봉지가 아이들에게는 훌륭한 책가방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내가 메고 간 카메라 가방을 만져 보고 또 만져 보며 부러워했습니다(349쪽).” 하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다만, 비닐봉지이든 사진기 가방이든 어느 쪽이 더 낫거나 덜 낫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 더 좋다고 할 수 없으며, 어느 쪽이 더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즐겁게 쓰면 즐겁습니다. 기쁘게 누리면 기쁩니다.
높다란 멧자락에 있는 절집에서 배우는 아이들은 비닐봉지 하나도 기쁘게 맞이하기에 기쁘게 웃으면서 가방으로 쓸 수 있습니다. 대형마트를 곁에 두고 지내는 한국사람은 비닐봉지가 너무 흔해빠지다 보니 비닐봉지를 한 장 얻어도 기쁘게 맞이할 줄 모르고 기쁘게 웃을 줄 모릅니다.
백만 원짜리 가방을 선물받아야 기쁘지 않습니다. 천만 원짜리 사진기를 손에 쥐어야 기쁘지 않습니다. 기쁘게 쓸 가방이 있을 때에 기쁩니다. 기쁘게 찍을 사진을 마음으로 그리면서 사진기를 쥐어야 기쁩니다.
평화를 찾으려면 평화를 찾으면 됩니다. 평화를 찾으려고 굳이 나들이를 다녀야 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찾으려면 사랑을 찾으면 됩니다. 사랑을 찾으려고 애써 온갖 사람을 만나야 하지 않습니다. 꿈을 찾으려면 꿈을 찾으면 됩니다. 이 일 저 일 붙잡는다고 해서 꿈을 찾지 않습니다.
이해선 님은 이 책 첫머리 즈음에서 “마음의 평화는 단순함으로부터 나오나 봅니다(50쪽).” 하고 말합니다. 이 말대로입니다. 마음이 평화로운 길은 아주 쉽습니다. 마음이 평화로울 자리는 아주 가까운 데에 있습니다. 바로 나한테서 샘솟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릴 평화는 바로 내가 스스로 길어올리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있으니 함께 만납니다. 내가 누군가를 찾아나설 수 있는 까닭은, ‘내가 만나고 싶은 그대’가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면서 삶을 기쁨으로 맞아들여 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는 그대가 나한테 찾아올 수 있는 까닭은, ‘내가 그리는 그대’가 찾아오는 내가 바로 이곳에서 한결같이 삶을 기쁨으로 맞이해서 살림을 여미기 때문입니다.
웃으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노래하면서 사진을 읽습니다. 4347.11.7.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