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예가의 열두 달
까렐 차뻭 지음, 홍유선 옮김, 요제프 차뻭 그림 / 맑은소리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숲책 읽기 41



시골에서 지내는 열두 달

― 원예가의 열두 달

 카렐 차페크 글

 홍유선 옮김

 맑은소리 펴냄, 2002.7.15.



  나는 카렐 차페크라는 사람을 잘 모릅니다. ‘로봇’이라는 말을 지었다 하고, 숱한 문학을 낳았다 하는데, 이도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이녁이 쓴 《원예가의 열두 달》이라는 책을 아주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장르 문학’을 하고, 1900년대 첫무렵에 체코에서 민주와 평화를 지키려고 온힘을 다해 싸웠다고 하는 카렐 차페크라는 분이 쓴 《원예가의 열두 달》은 그리 안 알려진 책이지 싶습니다. 새책방에서 아주 쉽게 사라졌거든요.  



.. 최상품의 잔디씨에서 어떻게 이런 가시투성이의 잡초가 자라는 것일까. 바로 이 점이 자연의 신비다 … 1월의 식물이라면,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창유리에 피는 얼음꽃이 있다 … 얼음꽃은 부잣집보다 가난한 집에서 더욱 화려하고 아름답게 피어난다. 부잣집의 창문에는 빈틈이 없기 때문이다 … 사나운 소리를 내며 세차게 퍼붓던 비가 그물을 끌어당기듯 갑자기 멈추면, 대지는 은빛으로 화려하며 쾌활해지고, 덤불 속에서 개똥지빠귀 한 마리가 신나게 노래한다 ..  (10, 23, 104쪽)



  《원예가의 열두 달》은 열두 달로 한 해를 나누어 ‘원예가’라는 사람이 겪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책은 ‘원예가’라는 사람을 내세워 이야기를 엮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글쓴이’가 몸소 겪은 이야기에 살을 입혀 들려주는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카렐 차페크 님이 텃밭이나 앞뜰이나 꽃밭을 일구면서 겪은 일에 ‘웃음’을 살포시 얹어서 지은 이야기로구나 싶어요.


  처음에는 신나게 밭을 일구어 온갖 남새를 얻는다고 해요. 그런데, 밭에서 얻은 남새에 이내 다들 시들해진다고 합니다. 날마다 똑같은 풀만 먹어야 하니 식구들이 진저리를 친다고 합니다. 이웃들도 똑같은 밭에서 똑같은 남새만 거두니 둘레에 선물할 곳도 없다고 합니다.


  밭을 일구면서 풀과 싸우는 이야기를 살짝 우스꽝스럽게 그리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습니다. 풀과 싸우더라도 이동안 새가 들려주는 노래를 들을 수 있고, 여름이 무르익는 동안 풀벌레와 개구리가 이루는 노래잔치를 누릴 수 있으니까요.



.. 당신이 이렇게 흙과 씨름하고 있는 사이, 구즈베리와 서양까치밥나무 가지에 처음으로 작은 싹이 돋아난다. 나무에 싹이 돋은 것을 당신이 처음 보았을 때 봄은 이미 그곳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이다 … 모든 거름들은 흙이 부드럽고 따뜻해지도록 영양을 공급해 주는 물질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흙에 이용할 수 있거나 이용할 수 없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 자연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새순과 꽃망울과 싹은 자연계의 가장 위대한 기적이다 ..  (11, 40, 69쪽)



  흙을 지으려면 눈앞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도 심고 저것도 심는다는 생각이 아니라, 앞으로 무엇을 먹으면서 삶을 어떻게 지을 때에 즐거울까 하는 대목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나무도 심고 저 나무도 심는다는 생각이 아니라, 보금자리를 아름다운 숲으로 가꾸어서 언제나 즐겁게 철 따라 우리 몸을 살리는 열매를 얻을 만한지 생각해야 합니다. 나무가 앞으로 어느 만큼 클는지 살피고, 이 나무를 나중에 아이들이 물려받아 기쁘게 누릴 수 있는 얼거리를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심은 나무는 오늘 우리가 누릴 수 있지만, 오늘 우리보다도 우리 아이들한테 훨씬 사랑스럽고, 우리 아이들이 낳을 아이들이 나중에 더욱 사랑스럽게 누립니다.


  나무 한 그루는 즈믄 해를 내다보고 심습니다. 나무 두 그루는 뒷날 우리 아이들이 새롭게 지을 집을 톺아보면서 심습니다. 오백 해는 너끈히 버틸 튼튼한 집을 짓고 싶다면, 오백 살을 살아낼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삼백 해쯤 훌륭히 버틸 멋진 집을 짓고 싶다면, 삼백 살을 살아낼 나무를 심어야 해요.


  나무를 심고 풀을 돌보며 꽃을 마주하는 삶은 바로 오늘 이곳에서는 사랑으로 보살피는 기쁨을 누리는 일입니다. 이러면서 아이들한테 삶을 사랑하는 길을 보여주면서 가르치는 일입니다.


  어른인 우리가 할 일은 사랑입니다. 아이들이 어른한테서 배울 대목은 사랑입니다. 책을 아이한테 읽혀 가르칠 삶이 아니라, 사랑을 아이한테 보여주면서 물려줄 삶일 때에 아름답습니다.



.. 가깝게 다가가서 보면, 원예가는 꽃을 만드는 게 아니라 흙을 만들고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 자신의 발 아래를 내려다보며 정말 질 좋은 흙이라고 감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 국화는 그저 피어 있으면 그것으로 그만이기 때문이다. 꽃은 강인하다. 단지 인간만이 내리막길에서 나약한 소리를 낼 뿐이다. 차가워지는 가을바람에도 국화는 절대로 주저앉지 않는다 ..  (43, 167, 188쪽)



  《원예가의 열두 달》을 쓴 카렐 차페크 님은 두 손으로 흙을 만지고, 두 손으로 풀을 뜯으며, 두 손으로 나무를 보듬었기에 힘있고 따스하며 사랑스러운 글을 쓸 수 있었으리라 느낍니다. 이녁 스스로 흙을 가꾸면서 숲을 지키고 삶을 일구려는 마음이었기에, 이녁이 나고 자란 체코에 민주와 평화가 싹터서 널리 퍼지기를 바라는 넋이 되었으리라 느낍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글을 쓰는 이들도 밭을 일구고 숲을 돌볼 수 있기를 빌어요. 시나 소설을 쓰든, 초·중·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든, 오늘날 한국에서 글과 책을 만지는 이들은 누구나 흙을 늘 만지면서 보살피는 일을 함께 해야지 싶어요.


  흙을 안 마지고 지식과 글과 책으로만 ‘자연’과 ‘환경’을 읊으니, 4대강사업을 홍보하는 공무원 자리에 떡하니 앉는 짓을 일삼습니다. 지식과 글과 책으로만 ‘자연’과 ‘환경’을 다루는 이야기를 읽기만 하니, 막상 몸을 움직여 손수 삶을 짓는 길로 나아가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우리는 늘 풀을 먹습니다. 쌀이든 김치이든 모두 풀입니다. 돼지고기이든 소고기이든 닭고기이든, 모두 풀을 먹는 짐승한테서 얻은 살점입니다. 비록 오늘날 공장 축산업에서는 사료와 항생제와 촉진제만 먹인다 하지만, 우리가 먹는 뭍고기는 흙에서 자란 풀을 먹는 짐승이에요. 바다에서 낚는 물고기도 숲에서 흘러내려서 바다로 가는 흙이 있어야 영양분을 얻어 목숨을 이어요. 지구별에서 모든 목숨은 흙에서 비롯하고, 지구별에 있는 흙은 풀이 있어야 기름집니다. 이러한 얼거리를 올바로 깨닫고 슬기롭게 살필 때에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길을 열 수 있습니다.



.. 노동을 한다면 좋아서 해야 할 것이다. 또는 기량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것도 좋다. 결국은 살아가기 위해서 한다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이념을 위해 장화를 만드는 것이라든가, 단지 이념을 위해 또는 도덕적인 동기에 의해 이루어지는 노동은 거의 무가치한 노동에 불과하다 … 관청의 창가에는 아무것도 피어 있지 않거나 빨강과 흰색의 제라늄만이 피어 있을 뿐이다 … 철도청 관리 아래서 식물은 가장 왕성하게 성장하며, 우체국과 전화국에서는 도무지 아무것도 피지 않는다 … 그 중에서도 세무서는 황폐해진 사막으로 표현하면 딱 알맞다 ..  (84, 138쪽)



  카렐 차페크 님이 쓴 다른 글이 궁금합니다. 손수 흙을 가꾸는 삶을 돌보면서 바라본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지구별 얼거리를 읽으면서 지구별을 아름답게 스스로 보듬는 길을 알아차린 이녁이 어떤 문학을 꽃피우면서 우리한테 기쁨을 베풀려 했는지 궁금합니다.


  《원예가의 열두 달》이라는 책에서 카렐 차페크 님이 밝히기도 하지만, “노동을 한다면 좋아서 해야” 합니다. 즐겁게 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생각하면서 해야 합니다. 웃고 노래하면서 일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럴 때에 온누리에는 민주와 평화가 싹틉니다. 즐거움도 웃음도 기쁨도 노래도 없다면, 이때에는 노예나 종이 되면서 굴레나 쳇바퀴나 톱니바퀴가 되어요. 전쟁무기를 만들고 군대를 세우는 이들은 즐거움도 기쁨도 모르는 바보입니다. 따돌림과 괴롭힘을 일삼는 이들은 웃음도 노래도 모르는 얼간이입니다. 이들은 흙을 만진 적이 없을 뿐 아니라, 흙을 사랑하는 손길을 모릅니다. 나무를 심은 적 없기에 이웃을 해코지합니다. 풀을 손수 뜯어서 풀밥을 지은 적 없기에 동무를 못살게 굽니다.



.. 어떤 혁명도 싹이 트는 시기를 미룰 수는 없으며, 5월 이전에 라일락을 피울 수 없다. 즉, 영리한 인간이라면 지금껏 계속되어 온 법칙과 습관에 따르고 순종하게 된다 … 우리는 흔히 봄을 일러 싹을 품는 시기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을이 그렇다. 과연 자연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한 해의 주기는 분명 가을로 끝난다. 그러나 가을에 한 해가 시작된다고 하는 편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 … 가을에 꽃이 시드는 것 역시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는 꽃이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  (82, 206, 207쪽)



  정치나 경제를 뜯어고쳐야 나라가 살지 않습니다. 해마다 봄이 찾아와야 나라가 삽니다. 문화나 예술을 북돋아야 나라가 살지 않습니다. 여름에 들과 숲에 잎이 우거져야 나라가 삽니다. 교육과 복지를 키워야 나라가 살지 않습니다. 가을에 온갖 풀열매와 나무열매가 익어야 나라가 삽니다.


  발전소와 공장과 관광단지와 골프장과 고속도로 따위로는 나라를 살리지 못합니다. 들과 숲이 비로소 나라를 살립니다.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나라를 살리지 않습니다. 시골지기나 시골내기나 흙지기나 흙일꾼이 나라를 살립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나요? 학교에서 어른들은 무엇을 가르치나요? 사회에서 아이들은 무엇이 될 수 있나요? 사회에서 어른들은 무엇이 되는가요?


  시골에서 지내는 열두 달은 다달이 새로운 노래요 숨결입니다. 도시에서 지내는 열두 달은 다달이 똑같은 직업이고 월급입니다. 시골에서는 철마다 달마다 날마다 늘 다른 일을 합니다. 도시에서는 달력 숫자만 바뀔 뿐 하루 내내 똑같은 몸짓을 되풀이합니다.


  가을에 가을바람을 쐬면서 가을하늘을 누리는 사람이 싱그러이 웃습니다. 겨울에 두툼하게 옷을 입고 눈을 뭉치면서 노는 아이가 해맑게 노래합니다. 봄에 두꺼운 옷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들을 누비는 사람이 신나게 뛰어놉니다.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들딸기와 멧딸기를 훑는 사람이 기쁘게 사랑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떤 일로 삶을 지을 사람인가 되돌아봅니다. 4347.11.6.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숲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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