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의 린네 14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4년 9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403



보름달빛은 구름을 비추고

― 경계의 린네 14

 타카하시 루미코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4.9.25.



  보름달이 뜹니다. 보름달은 보름날 뜨는 달입니다. 그믐에는 그믐달이 뜹니다. 그믐달은 우리 눈으로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눈으로 알아보기 어려울 뿐, 그믐에 뜨는 그믐달은 틀림없이 하늘에 있어요. 온누리를 그믐빛으로 밝힙니다. 보름달에는 보름빛으로 밝혀요.


  지구와 아주 가까운 자리에 있는 달은 무척 크게 보입니다. 그래서 달은 온누리에 있는 수많은 별 가운데 지구에 가장 밝다 싶은 별빛을 비춥니다. 온누리 숱한 별을 놓고는 그냥 별이라고만 하는데, 달한테만큼은 따로 ‘달’이라는 이름이 있어요.


  지구가 있는 누리에는 해가 있습니다. 해는 빛과 볕과 살을 베풉니다. 달은 그저 달빛이지만, 해는 햇빛과 햇볕과 햇살이 있어요. 햇빛으로 그림을 그리고, 햇볕으로 숨결을 살찌우며, 햇살로 따사롭게 보듬습니다. 이리하여, 해는 해님이요, 하얗다는 빛깔을 낳았으며, 해사한 웃음을 보여줍니다.



- “쥬몬지 네가 어떻게 좀 해 봐.” “그보다 피자나 시켜 먹을까? 분명히 말하는데 넌 안 사 준다.” ‘아아, 그래도 꿈만 같다. 따뜻한 이불에서 뒹굴거리며 피자를.’ (23쪽)

- “하지만 왜일까? 상자에서 어쩐지 익숙한 냄새가.” “싸온 것은 캣푸드뿐인가.” ‘아, 린네 님의 가난내구나.’ (42쪽)

- “로쿠도, 아이들을 위해 싸우는 거지? 잠시 콩을 주워 먹으러 왔나 했지만.” “터무니없는 오히야, 마미야 사쿠라.” (52쪽)





  타카하시 루미코 님이 빚은 만화책 《경계의 린네》(학산문화사,2014) 열넷째 권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만화책을 이루는 주인공은 모두 고등학생 또래입니다. 린네는 하늘나라에서 땅나라로 와서 ‘사신’ 노릇을 하고, 린네와 짝꿍처럼 어울리는 사쿠라는 땅나라 여느 사람이지만 ‘귀신’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쿠라는 귀신을 알아볼 수 있어도 두렵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저 귀신을 알아볼 뿐입니다.


  린네도 귀신을 두렵게 여기지 않습니다. 악령을 쫓는 일을 하고, 땅나라를 떠들며 하늘나라로 못 가는 넋을 찾아서 하늘나라로 보내는 일을 할 뿐, 따로 마음이 흔들리거나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 아이들은 더없이 차분하고, 그지없이 맑습니다.


  멋진 아이들이라 할 텐데, 어른이라면 어떠할까요? 어른들도 귀신을 두렵게 안 여길까요? 어른들도 제 할 일을 씩씩하거나 꿋꿋하게 할까요? 어른들도 삶을 옳게 바라보면서 곱게 여미는가요?





- “하지만 100년 전에 여우를 퇴치했다면, 할머닌 대체 몇 살이야?” “얘는, 그런 걸 어떻게 아니?” (75쪽)

- “쥬몬지, 너. 혹시 여우 핑계로 평소의 원한을 풀고 있는 것 아니냐?” “무슨 소리냐?” (91쪽)

- “훗. 남자들이 마치 꽃에 덤벼드는 벌레 같구나. 저것에 이 페로몬 향수를 잔뜩 뿌려 뒀거든.” “저 영은 가짜지?” (126쪽)



  보름달빛은 구름을 비춥니다. 구름은 낮에도 밤에도 하얗습니다. 낮에는 햇빛을 받으면서 하얗고, 밤에는 달빛을 받으면서 하얗습니다. 쌀쌀한 늦가을 바람을 쐬면서 마당에 서서 하늘바라기를 하다가, 뒤꼍 무화과나무를 바라봅니다. 한가을에 실컷 무화과알을 따먹었어요. 무화과나무는 우리가 따먹은 무화과알 말고도 더 알을 베풀려고 애씁니다. 늦가을로 접어들었는데 아직 잎을 다 떨구지 않았고, 가지 끝에 올망졸망 무화과 봉오리가 봉긋봉긋 굵습니다.


  뒤꼍 무화과나무 둘레에는 가을풀이 돋습니다. 무화과나무 둘레에 돋는 가을풀은 날마다 즐겁게 뜯어서 된장이나 양념으로 버무려 먹습니다. 나도 곁님도 아이들도 기쁘게 먹습니다. 봄에는 봄풀을 먹고, 여름에는 여름풀을 먹으며, 가을에는 가을풀을 먹어요. 얼마나 고마우면서 반가운지 모릅니다. 한겨울에도 갓과 유채는 돋습니다. 전라남도 바닷가와 가까운 시골에서는 한겨울에도 유채가 꽃대를 올리고, 겨울이 저물고 새봄이 찾아올 무렵 빈 들마다 노란 꽃물결을 이뤄요. 이즈음에는 겨울을 난 배추도 꽃을 피우지요. 이곳저곳 노란 꽃밭입니다.





- ‘로쿠도의 아버지를 정점으로 에헤라 데헤라 하는 사기신들과는 전혀 달라! 근면해. 정말 부지런한 아이야!’ (145쪽)

- “렌게, 하나만 물어 보자. 죽을 때가 안 된 혼을 부당하게 저승으로 보내는 사기신의 업무가, 잘못됐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 “나는, 어떤 환경에서도 톱을 노릴 뿐이야.” (162쪽)



  즐거울 적에 놀이입니다. 기쁠 적에 일입니다. 만화책 《경계의 린네》 열넷째 권에는 ‘렌게’라는 아이가 새롭게 나옵니다. 아마 이 아이는 앞으로도 곧잘 나오겠구나 싶습니다. ‘린네’ 아버지가 차린 ‘거짓말쟁이 회사(사기신 컴퍼니)’에서 일하는 렌게는 생각이 없이 일을 합니다. 그저 1등을 바라면서 일을 합니다. 어떤 일이든 살피지 않고, 그저 1등을 바랍니다.


  이런 마음이니 ‘거짓말쟁이 회사’에서 일할 만하겠구나 싶어요. 솜씨가 뛰어나고 재주가 좋으나, 생각이 없거나 마음이 없으면, 사랑도 없고 꿈도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니 1등으로 치달립니다. 꿈이 없으니 1등을 좇습니다.


  그러면, 이 아이는 1등이 되면 무엇을 할까요? 1등을 지키려고 또 치달릴 테지요. 다른 것은 하나도 생각하지 못합니다. 스스로 삶을 그리지 못합니다.


  린네라는 아이와 사쿠라라는 아이는 ‘1등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아이들은 ‘삶을 생각합’니다. 삶을 생각하기에 사랑을 생각하고, 사랑을 생각하기에 꿈을 그릴 수 있습니다.



- “렌게, 너는 첫 단계에서 실수를 범했다.” “?” “너는 로쿠몬을 조종해서 우리에게 노비차를 먹이도록 꾸몄지. 하지만! 로쿠몬은 몸에 속속들이 밴 생활습관 때문에 찻잎을 정량의 10분의 1밖에 넣지 않았던 거야!” “훗, 어쩐지 차가 묽다 했더니.” “과연 로쿠몬이야.” ‘윽, 혼은 조종해도, 뼛속까지 밴 가난뱅이 근성은 고칠 수 없다는 건가!’ (187∼188쪽)



  늦가을에 보름달을 올려다보면서 두 팔을 하늘로 치켜듭니다. 우리 집 마당에 있는 후박나무 밑에 서서 빙글빙글 춤을 춥니다. 달빛이 좋아서 달춤을 추고, 달내음이 고우니 달노래를 부릅니다. 달빛은 우리 집 지붕을 비추고, 달내음은 우리 집 나무마다 곱게 스며듭니다. 아침 낮 저녁으로 하늘바라기를 하고 먼산바라기를 합니다. 풀밥을 먹고 풀잎을 읽습니다.


  만화책 《경계의 린네》에 나오는 아이들은 저마다 하루하루 새롭게 지으면서 이야기를 쌓습니다. 나는 시골집에서 우리 아이들과 복닥이면서 하루하루 새삼스럽게 지으면서 이야기를 이룹니다. 조그마한 종잇조각에 그리는 그림도 이야기입니다. 소꿉놀이도 이야기입니다. 밥 한 그릇도 이야기입니다. 빨래 한 점도 이야기입니다. 잠든 아이들 이마를 쓰다듬고 이불깃을 여미는 손길도 이야기입니다. 작은 삶조각이 모여 웃음꽃으로 핍니다. 4347.11.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