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게구름을 뭉개고
나기철 지음 / 문학의전당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시를 말하는 시 68



시와 편지

― 뭉게구름을 뭉개고

 나기철 글

 문학의전당 펴냄, 2004.12.30.



  종이에 글을 적어 띄우기를 퍽 좋아합니다. 어릴 적부터 꽤 즐깁니다. 나는 혀짤배기라서 ㄹ소리를 제대로 못 내기 일쑤이고, 조금만 빨리 말해야 해도 혀가 꼬입니다. 내 말소리를 듣고 웃거나 놀림으로 삼는 이웃이나 동무가 많았어요.


  그런데 종이에 글을 쓸 때에는 아무도 웃지 않고 놀리지 않습니다. 글에는 혀짤배기 소리가 없고, ㄹ을 소리내지 못하는 일도 없습니다. 입으로 말을 할 적에는 해 본 적이 없는 이야기이지만, 글로 쓸 적에는 무슨 이야기이든 모두 할 수 있습니다.



.. 그대를 만나러 / 이 드넓은 도시 / 외딴 집 / 아무리 꽁꽁 숨어 / 간다 해도 / 거기 꼭 아는 이를 / 만날 것만 같습니다 ..  (비밀)



  글맛을 본 뒤, 글이란 얼마나 재미있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말은 입으로만 할 수 있지 않고 손으로도 할 수 있으니, 말솜씨가 변변하지 못한 사람한테도 길이 있습니다.


  말을 변변하게 못하더라도 밥을 맛나게 지을 수 있습니다. 말을 시원스레 못하더라도 흙을 기름지게 가꿀 수 있습니다. 말을 똑똑하게 못하더라도 즐겁게 뛰놀 수 있습니다. 말을 또렷하게 못하더라도 옷을 정갈하게 빨아서 갤 수 있습니다. 말을 힘있게 못하더라도 살림을 알뜰살뜰 여밀 수 있습니다.



.. 저는 그저 텅 빈 가을 들녘 / 바라볼 뿐입니다 ..  (먼 길)



  내가 쓰는 글은 내가 나한테 쓰는 글월과 같습니다. 말솜씨가 변변하지 못하고 혀짤배기인데다 우물쭈물거리는 나한테, 찬찬히 기운을 내라고 북돋우는 글월과 같습니다. 글을 쓰면서 새롭게 기운을 내고, 글을 쓰는 동안 새삼스레 힘을 내며, 글을 쓰고 나서 즐겁게 숨을 쉬도록 이끕니다.


  누군가는 밥벌이로 글을 씁니다. 누군가는 문학이나 예술을 하려고 글을 씁니다. 누군가는 숙제와 보고서 때문에 글을 씁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삶을 지으려고 글을 씁니다. 삶을 짓는 기운을 얻으려고 글을 쓰며, 삶을 짓는 슬기를 북돋우려고 글을 씁니다.


  마음밭에 심는 씨앗 한 톨처럼, 내 수첩과 공책에 또박또박 글을 씁니다. 나는 내가 쓴 글을 빙그레 웃으면서 읽습니다. 마음속으로 소리를 내어 읽습니다. 내 입은 혀가 짧지만, 내 마음은 혀가 짧지 않습니다. 내 입에서 꼬이던 소리라 하더라도 내 마음에서는 술술 풀립니다. 이렇게 마음속으로 오랫동안 읊고 외치고 노래하다 보면, 나중에 입으로 말을 터뜨릴 적에 냇물이 흐르듯이 부드럽게 말길이 열리기도 합니다.



.. 유리 깨지듯 우는 / 새소리 푸르름이 / 찰찰 넘친다 // 그래, 이 나무들 / 천 년 만 년 / 살 것 같다 ..  (겨울 비자림에서)



  나기철 님 시집 《뭉게구름을 뭉개고》(문학의전당,2004)를 읽습니다. 뭉게구름을 뭉갠다니, 하늘에서 뭉갠다는 소리일는지, 마음속에서 뭉갠다는 소리일는지 아리송합니다. 그러나, 시를 쓴 나기철 님한테는 뭉게구름을 뭉개려는 마음이 무척 컸으리라 느껴요. 이 마음이 이 시집에 고스란히 흐르리라 느낍니다.



.. 꽃이 서른 번은 더 피었다 졌습니다. 이제 바다 물소리 가까이 들려옵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즐거웠습니다. 나뭇잎 몇 번 흔들릴지 알 수 없스니다. 고맙습니다 ..  (편지)



  나기철 님은 나기철 님한테 글월을 띄웁니다. 짤막짤막 끊은 글줄에 이야기를 얹어 글월을 띄웁니다. 스스로 삶을 사랑하고 싶어 글월을 띄웁니다. 스스로 삶을 노래하고 싶어 글월을 띄웁니다. 스스로 삶을 껴안고 싶어 글월을 띄웁니다.


  먼 옛날부터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한 까닭이 있습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바로 나한테 들려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내 손에서 나오는 모든 글은 바로 나한테 띄우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가는 말이란, 남한테 가는 말이 아닙니다. 나한테 가는 말입니다. 오는 말도, 남한테서 오는 말이 아닙니다. 나한테서 오는 말입니다.



.. 길 가다가 문득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합니다. 누나가 어쩌면 말투하며 목소리가 꼭 그대로냐고 합니다. 누나도 꼭 그대로입니다 ..  (삼십 몇 년 후)



  글월을 적고, 글월을 읽습니다. 내가 나한테 띄우는 글월에 깃든 이야기를 새롭게 읽고, 내가 나한테서 받은 글월에 서린 이야기를 새삼스레 읽습니다. 어제 띄운 글월에는 오늘 살아갈 숨결이 흐릅니다. 오늘 띄운 글월에는 모레 살아갈 숨결이 흐릅니다.


  뭉게구름이 피어납니다. 양털구름이 피어납니다. 새털구름도, 닭털구름도, 토끼털구름도 피어납니다. 물고기 비늘 같은 구름도 피어나고, 새빨간 구름과 샛노란 구름도 피어납니다. 이슥한 밤이 지나 새벽이 다가오면 시퍼런 구름까지 피어나요. 한밤에는 달빛에 어린 어룽어룽 하얀 구름이 피어나기도 합니다.


  시골에서는 저 먼 누리에서 피어나는 미리내가 구름처럼 번집니다. 수많은 별이 깊고 너른 누리에서 피우는 하늘구름이란, 별구름이란, 참으로 놀랍습니다. 저 먼 별에서 지구를 바라볼 적에도 지구는 미리내가 될 수 있을까요. 지구도 별구름처럼 다른 별에 보일 수 있을까요.



.. 여선생들 모여 조르르 웃고 몇몇 선생들 컴퓨터 앞 야후 검색 하거나 벅스뮤직 듣거나 화투놀이 하고 있다 ..  (직원실에서 김지하를 만나다)



  비는 비구름이 몰고 옵니다. 눈은 눈구름이 몰고 옵니다. 오늘 나는 일곱 살 큰아이하고 눈구름을 그립니다. 큰아이는 전남 고흥 포근한 시골자락에 함박눈이 펑펑 내리기를 바랍니다. 서른 해나 쉰 해쯤 앞서라면, 이 포근한 시골에도 함박눈이 내릴는지 모르나, 요즈막에는 이곳에 함박눈은커녕 싸락눈이 내리기도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올겨울에는 함박눈이 몇 차례 찾아오리라 생각해요.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꿈을 꾸니까요. 눈을 꿈꾸면서 그림편지를 쓰니까요. 눈구름을 신나게 그려서 집안에 붙여놓고 날마다 바라보니까요. 이 가을이 저물고 새 겨울이 찾아오면 참말 멋스럽고 어여쁜 눈구름이 우리 마을에 도톰하게 피어나리라 믿습니다. 4347.11.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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